256화. 거짓말은 안 한다 (7)
“리(Lee), 오늘 활약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1차전의 부진이 어느 정도 만회된 것 같은데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분명한 건 저와 뉴욕의 동거가 오래 가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인터뷰 룸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1차전은 부진했지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2차전, 그런데 이인영은 기자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조금 빗겨 갔다.
“동거가 오래가진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제 나이는 올해 미국 나이로 32살입니다. 뉴욕이 10년 6억 달러를 투자하긴 했지만, 제게 기대하는 전성기는 대략 3~ 4년이겠죠. 그 안에 우승하지 못하면 뉴욕의 투자는 실패한 거고 절 트레이드 시키려고 할 겁니다.”
다소 냉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소리 아닌가.
질문을 던진 기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인영은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3~ 4년 안에 뉴욕이 우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뉴욕이 제게 최고의 대우를 해 준 이유고, 저는 고객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물론 10년 장기계약의 의미를 정확히 관통한 발언, 정말 뉴욕과 이인영의 인연은 3~ 4년 안에 끝나는 건가.
하지만 10년 6억 달러라는 대형계약이 뉴욕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선수를 어느 구단이 수 억 달러를 주고 쓰려고 하겠나.
이래서 전문가들이 뉴욕의 투자를 모험이라고 단언한 것, 우승을 해도 본전이고 우승을 못 하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내가 구단의 손해를 걱정할 입장은 아니지만, 어쨌든 10년 계약이 마지막까지 갈지는 불투명, 이인영은 3~ 4년 안에 뉴욕의 우승을 이뤄내면 내 갈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갈 길을 가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을 해 봤는데 장기계약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도 이혼하는 세상인데 10년 계약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 봤자 서로에게 부담스러울 뿐이죠. 저는 적당한 때가 되면 뉴욕을 떠날 겁니다. 그리고 절 필요로 하는 다른 구단을 찾아 나설 겁니다.”
기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계약 3년 차에 걸려 있는 옵트아웃, 그때 이인영은 35살의 노장 선수가 된다. 남은 7년 4억 2천만 달러 계약을 파기하고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까.
우승하면 돈 더 달라고 뉴욕 구단을 압박하는 건 아닌지, 이인영은 해석은 당신들 자유라고 선언했다.
[Not Yet]
이어지는 디비전 시리즈 3차전,
텍사스로 날아간 뉴욕 팬들은 우리가 헤어질 때는 지금이 아니라는 팻말을 흔들었다.
1차전에서 죽을 쑨 일로 뉴욕 여론이 싸늘하게 돌아선 건 사실, 그런데 6천만 달러를 받으면서 그 정도 비난은 감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뉴욕과 자신의 인연을 철저한 계약관계로 규정, 동거해봤자 이득이 없으면 헤어지는 거 아닌가.
3~ 4년 안에 우승을 못 하면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 지금 입고 있는 유니폼에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이번 시리즈 성적은 9타수 2안타, 타율 0.222 – 홈런 없이 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얼마 전 뉴욕 여론을 뒤흔들어 놨죠. 포스트 시즌에서 옵트 아웃을 운운한 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비난도 있었는데 박한우 위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이인영 선수가 구단에 돈을 더 달라고 한 말이 아니라, 이번 시즌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거라고 생각합니다. 포스트 시즌 진출이 매년 이뤄지는 게 아니거든요. 뉴욕이 이인영 선수에게 원하는 건 우승 청부사입니다. 3~ 4년 안에 우승을 못 하면 뉴욕과 동거할 의미가 없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겠죠.”
“어쨌든 입만 열면 여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선수가 됐습니다. 논란을 떠나서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중계석에서 말이 오가는 동안, 뉴욕의 개릿 앤더슨 감독은 심각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사실 앤더슨 감독은 이인영의 영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타격 실력은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지만, 필라델피아 시절부터 화려한 언변과 강한 개성을 앞세운 선수, 팀 케미를 해칠 수도 있는 선수로 평가했다.
“나도 그 친구(케이시) 마음에 안 듭니다.”
“네(드로렌조)가 나와 동급이라고 생각해?”
예상은 적중했다.
이인영은 팀 내 1선발 리차드 케이시와 기싸움을 벌였고, 유망주 드로렌조를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다.
올해는 그냥저냥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이런 아슬아슬한 관계가 계속 될 수 있을까.
문제는 이인영이 그걸 대놓고 여론에 흘려버렸다는 것, 나와 뉴욕의 관계는 앞으로 3~ 4년이 한계라고 정해버렸다.
솔직한 것도 정도가 있지 개성이 너무 강한 선수, 내가 앞으로도 저 친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실력이 … ’
앤더슨 감독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인영은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렸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으로는 흠 잡을 게 없는 선수, 감독이 선수를 상대로 이겨먹으려고 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나. 앞으로도 비위를 맞춰주기로 했다.
“맙소사!!”
염려했던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4회 말 텍사스의 공격, 2사 주자 1 – 2루에서 뉴욕의 선발 밥 레지슨이 바깥쪽 꽉 차는 결정구를 던졌다.
그대로 이닝이 끝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욕의 포수 벤 자일스는 잠시 그 자세를 유지했다.
“야!! 뛰잖아!!”
그 사이 눈치를 살피던 2루 주자는 3루까지 진출, 밥 레지슨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늦었다.
스트라이크를 안 잡아주면 바로 다음 투구를 준비할 것이지, 연봉 수백 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심판의 자비를 구하고 있나?
이닝이 끝난 후 밥 레지슨은 파트너와 말다툼을 벌였다.
“방금 네 꼴이 어땠는지 알아?!! 굶주린 개가 주인에게 매달리는 꼴이었다고!!”
“그건 너무 심한 말 아냐?!! 어떻게든 끝내보려고 한거 잖아?!!”
“되지도 않는 프레이밍 따윈 하지 말라고!!”
포스트 시즌이라 신경이 예민해진 것도 있지만, 밥 레지슨과 벤 자일스는 평소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터져버린 것, 벤 자일스는 자신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는 동료를 이해하지 못했다.
“난 너한테 월급 받는 거 아니라고!! 내 일에 참견하지 마!!”
“자네 둘 다 조용히 해!!”
이때, 앤더슨 감독이 상황 수습에 나섰다.
무실점으로 넘겼으면 된 거지 뭘 계속 따지고 있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앤더슨 감독은 두 선수를 벤치에 앉혔다.
‘참견하지 말자.’
이인영은 아무 말 없이 다음 이닝 준비에 나섰다.
감독이 군기를 잡고 있는데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 않나. 감독이 최근 날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어지간하면 엮이지 않았다.
[따악~!!]
“자!! 이 타구는 2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뉴욕이 3대 1로 앞서나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 2타수 2안타!! 이번 디비전 시리즈 타율은 0.364로 올라갑니다!!”
“보세요. 지켜보면 자기 역할 하는 선수입니다. 걱정할 거 없어요.”
“진짜 걱정해야 할 건 뉴욕 팀 분위기죠. 아까 앤더슨 감독이 선수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잠깐 잡혔거든요. 뉴욕이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1차전에서 패배한 뉴욕은 2 – 3차전을 연달아 잡아내며 ALCS 진출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찝찝함을 남긴 게임, 기자들은 앤더슨 감독에게 경기 중 일어난 해프닝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경기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선수들이 사소한 일로 충돌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할 만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팀 기강이 무너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는데,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진 않으십니까?”
직접 언급하긴 그렇지만 시리즈 중 옵트 아웃을 운운한 어느 선수,
그리고 오늘 설전을 주고받은 레지슨과 자일스, 거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며 짜증을 낸 감독, 전체적으로 뭔가 어수선하지 않나.
정말 사사건건 귀찮게 하는 기자들, 앤더슨 감독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가슴 속으로 밀어넣었다.
“아마 뉴욕의 탈락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당신들도 그 중 한 명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올 시즌 100승을 넘겼고 월드시리즈 우승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탈락하길 바란다고 순순히 떨어질 팀이 아니라는 거죠.”
우승할 팀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기 마련,
앤더슨 감독은 당신들이 뉴욕을 걱정해주는 만큼 우리는 더욱 강해질 거라며 기자들을 비아냥거렸다.
그 말대로 뉴욕은 3연승을 거두며 ALCS에 안착, 뉴욕으로 돌아와 다음 일전을 준비했다.
“자네들, 잠깐 나 좀 보자고”
햄스턴 구단주는 이인영과 앤더슨 감독을 별장으로 초대했다.
말이 초대지 최근 일어난 논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 이인영은 태연하게 구단주와 얼굴을 마주했다.
“자네의 속마음이 뭔가?”
“속마음이라뇨?”
“정말 연봉 올려달라고 한 말인가? 그런 거라면 나한테 직접 얘기하면 되네. 굳이 기자들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요. 제가 원한 게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원했단 말인가?”
“미인은 언제나 주위의 사랑을 받길 원하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대형 계약 맺었으니 이제 나는 뉴욕에서 10년 동안 연봉 받아먹으면서 편안하게 살면 되는 건가.
그런데 그건 좀 재미없는 일상이다.
뉴욕은 명실공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 구단, 이런 구단이 날 원한다면 선수로서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하지만 요즘 햄스턴 구단주는 이인영의 활약에 이렇다 할 립 서비스를 해주지 않고 있다.
잡은 고기에 밑밥 던져주는 사람 없다는 게 이런 건가.
사실 햄스턴 구단주는 권위주의적이고 칭찬에 야박한 성격, 이인영이 타격 삼관왕을 달성했을 때도 이렇다 할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연봉 값 해냈다고 생각했을 뿐, 그래서 이인영은 3~ 4년 안에 떠날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구단주의 속마음을 확인해 본 거다.
예상했던 대로 입질을 주는 구단주, 햄스턴 구단주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자네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야. 그걸 내 입으로 증명 받길 바라나?”
“아니요. 당신은 변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계약할 때만 해도 온갖 아부와 애교를 부렸던 햄스턴 구단주, 그런데 10년 계약을 맺더니 사람이 변했다.
이제 나는 앞으로 좋든 싫든 뉴욕에 남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건가.
하긴 어느 팀이 일개 선수에게 6억 달러라는 거금을 지불하겠나.
햄스턴 구단주도 내심 언제든 이인영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선수로 생각했던 게 사실, 이인영은 그 본심을 꿰뚫어 봤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돈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존심이죠. 절 정말 필요로 하는 팀을 위해 뛸 때 선수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게 아닌 것 같더군요. 돈만 많이 준다고 선수의 마음을 샀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뉴욕에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햄스턴 구단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이혼만 세 번을 할 정도로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까짓거 마음에 안 들면 3년 후 옵트 아웃 실행하고 나가라고 할 수도 있는데,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우리는 정말 자네가 필요하네. 그러니까 6억 달러 지불한 거 아닌가?”
“그런 말은 앞으로 기자들 앞에서 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더 빛나 보이니까요.”
“알았네. 그럼 문제 해결 된 건가?”
“예”
앤더슨 감독은 두 사람의 악수에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 잘났다고 떠들어 댄 인터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구단주의 관심이 필요했던 건가.
그건 그렇고 저 고집불통에 자기 밖에 모르는 구단주가 알아서 꼬리를 내리다니, 이인영이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