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55화 (255/309)

255화. 거짓말은 안 한다 (6)

“자, 오늘도 모닝커피처럼 변함없는 뉴욕의 라인업을 살펴보시죠. 역시 리(Lee)는 그곳에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바뀔 라인업이 아니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디비전 시리즈 2차전을 앞두고 뉴욕 현지 중계진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5선 3선승제로 치러지는 디비전 시리즈, 뉴욕 입장에서 1차전의 패배는 생각보다 뼈아팠다.

하지만 우승을 위해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게임, 승부의 갈림길에서 가장 많은 결승타를 때린 타자는 누구였을까.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3번 타자가 득점권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확률은 전체 타석의 37%, 믿기 어렵겠지만 2루타가 차지한 득점 비중은 전체 17%로 홈런(12%)보다 높았다.

이런 배경을 따져보면 어떤 선수를 3번에 배치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어제 경기에서 득점권 기회 2번을 모두 말아 먹었지만 이인영은 3번 자리에 최적화 된 선수, 뉴욕 현지 중계진도 어제 경기는 잊어버렸다.

‘이건 말도 안 돼.’

‘꿈일 거야.’

하지만 뉴욕의 하루는 악몽으로 시작됐다.

시즌 막판 선발진에 큰 힘이 된 드로렌조가 1회부터 만루 홈런을 맞아버린 것, 1차전 패배 이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햄스턴 구단주의 표정은 굳어버렸다.

“아~ 다시 빠지는데요. 드로렌조 선수가 급격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올 시즌 풀 타임을 치른 것도 아니고 이게 메이저리그 통산 6번 째 등판입니다. 거기다 1회부터 만루 홈런을 맞았으니, 제정신이 아니겠죠.”

뉴욕의 개릿 앤더슨 감독은 아랫입술을 잘근 거렸다.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우타 제이슨 켄드릭, 드로렌조는 올 시즌 우타 상대로 피안타율 0.224를 기록했다.

그런데 볼질이라니, 만루 홈런 하나에 정신이 무너져 내린 건가. 심지어 투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켄드릭을 몸에 맞는 볼로 내보냈다.

홈에서 2패를 당할 순 없는 일, 앤더슨 감독은 교체도 생각했지만 아직 1회라 몸이 풀린 선수도 없었다.

시간을 끌어야겠지, 앤더슨 감독이 마운드로 향하자 다른 내야수들도 마운드로 몰려들었다.

“자네는 잘 하고 있어. 다만 너무 긴장했을 뿐이야.”

누가 봐도 시간 끌기를 위해 올라왔는데 사탕발림이나 하고 있는 감독, 이인영은 루키에게 현실을 직시시켰다.

“지금이 7회라고 생각하고 던져.”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2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것 같냐?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니까 네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지라고”

냉정하지만 맞는 소리, 정신을 차린 드로렌조는 다음 타자를 3루 파울 플라이로 처리하고 한숨을 돌렸다.

마음가짐만 바꿨을 뿐인데 잡힌 제구, 드로렌조는 만루 홈런의 충격을 이겨내고 1회를 마무리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회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

선발투수가 1회부터 만루 홈런을 내주자 뉴욕 타선은 조급증에 빠졌다.

거기다 오늘 텍사스가 내세운 선발은 좌완 앤디 그레이스, 나름대로 분석은 했지만 메이저리그 경력이 많은 투수가 아니라 게임을 하면서 공략법을 찾아야 했다.

이런 경기에서는 차분히 주자를 쌓는 게 우선, 하지만 평소 홈런 위주로 공격을 풀어온 뉴욕 타선은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자, 이제 뉴욕의 3회 초 공격, 타석에는 몬테로 선수가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66 - 홈런 22개 - 67타점, 어제는 4타수 무안타,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홈런 체감이라는 게 있거든요. 몬테로 선수는 맞았다 하면 넘어가는 느낌이 있는 선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그 능력이 발휘 돼야겠죠.”

몬테로는 바깥쪽 공을 힘껏 잡아당겼지만 펜스 근처에서 붙잡혔다.

뉴욕 타선의 성향을 알 수 있는 장면, 이런 흐름은 6회 말까지 계속됐다.

“스윙, 헛칩니다. 이인영 선수가 조금 조급해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지금 스코어가 4대 0이고, 주자도 없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투수가 승부를 피하겠습니까. 신중하게 볼을 보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나가는 게 낫습니다.”

7회 말 뉴욕의 공격, 선두 타자로 나선 이인영은 초구부터 과감한 스윙을 선보였다.

헛스윙이 됐지만 지켜봤어도 카운트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던 공,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딱~!!

바깥쪽 빠지는 공이 컨택되면서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이런 상황에선 방법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지간한 공은 휘두를 뿐, 몸 쪽 빠른 볼을 좌측으로 밀어냈다.

따악~!!

“와아아~!!”

타구 방향을 확인한 이인영은 총소리에 반응한 경주마처럼 튀어나갔다.

완전히 빠진 타구, 3번 타자가 저렇게 빨라도 되는 건가. 야수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인영은 2루를 통과, 3루까지 뛸까 했지만 큰 이득이 없다는 생각에 멈춰 섰다.

이번 시리즈에서 7타석 만에 쳐낸 안타,

경기 시작 2시간 12분 만에 잡은 첫 득점 기회에 뉴욕 팬들은 열광했지만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2루에서 멀어졌다.

“자, 이제 마이크 서튼 선수의 타석입니다. 오늘도 무안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짧은 안타로도 충분합니다. 한 점 한 점 따라가는 자세가 중요하죠.”

하지만 마이크 서튼은 초구부터 헛스윙을 돌렸다.

빠른 볼을 예상했는데 초구 슬라이더라니, 어떻게든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면서 본인이 노렸던 공이 뭔지 잊고 말았다.

마음이 급할 때 나오는 스윙, 뉴욕에서 평생을 뛴 베테랑도 이런 큰 경기에선 어쩔 수 없었다.

‘맞추기만 해라.’

한편, 이인영은 2루에서 득점 기회를 노렸다.

따라가는 스윙이 됐지만 이런 득점권 상황에선 인플레이 타구를 만드는 게 중요, 서튼의 컨택 능력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득점이 되면 뉴욕의 기세를 살려줄 뿐, 텍사스도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딱~!!]

“이번에는 타격!! 유격수!! 2루수가 몸을 날렸지만 잡지 못합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뉴욕의 오늘 경기 첫 득점!! 스코어는 4대 1이 됩니다!!!!”

“야구는 홈런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네요. 경기가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짧게 치면서 풀어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 여기서 투수가 바뀌는 것 같은데요. 페르난도 펠릭스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분위기가 바뀌자 텍사스는 메이저리그 경력 18년 차에 접어든 노장을 투입했다.

펠릭스는 올해 44살,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 나이에 최고 99마일 빠른 볼을 던진다면 믿겠나.

몸을 비틀어 던지는 특유의 디셉션과 다양한 볼 배합도 까다로운 편, 하지만 공략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경기 전에 우리가 한 말이 있잖아. 그걸 명심하라고.”

“걱정하지 말라고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앤더슨 감독은 대타 제이 모건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펠리스는 투수판 끝을 밟고 몸을 클로스 시키는 폼, 공을 던질 때도 몸이 바깥쪽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특유의 투구폼 때문에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지나가는 펠리스의 빠른 볼, 이런 투수를 상대할 때 타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이 빠른 투수를 상대할 땐 시선을 낮게 두는 게 좋지만, 펠리스가 던지는 낮은 공은 결정구인 체인지업이 대부분이다.

타자가 구속이 빠른 투수를 상대할 때 시선을 낮게 둔다는 허점을 이용한 것, 그렇다면 타자 입장에선 처음부터 시선을 높게 두고 빠른 볼을 노리는 것도 방법이다.

경기 전, 뉴욕 선수단이 몇 번이나 복습한 내용, 제이 모건은 그걸 잊지 않았다.

“스윙!! 헛칩니다. 아~ 모건 선수가 초구부터 노려본 것 같은데요.”

“노린 건 나쁘지 않았는데 타이밍이 너무 늦었네요. 모건 선수는 어느 때보타 지금 심장이 쿵쾅거릴 겁니다.”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제이 모건은 뛰는 가슴을 다독였다.

노렸던 공을 놓쳤으니, 배터리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을 거다. 그렇다면 작전을 다시 짜야 하는데, 제이 모건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복습했던 내용마저 잊어버렸다.

“아~!!”

2구는 낮은 체인지업, 제이 모건이 헛스윙을 돌리자 앤더슨 감독은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낮은 공은 체인지업이라고 그렇게 복습을 시켰는데 이게 무슨 추태인가.팀 동료들의 멘탈까지 날려버린 대역죄, 제이 모건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원래 긴장하면 공부한 것도 기억 안 나는 법이지.’

반면 이인영은 더그아웃에서 차분한 자세를 유지했다.

시험지를 받았는데 첫 문제부터 내가 공부한 게 나왔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나.

그런데 쉬는 시간에 자신 있게 적은 답이 오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멘탈은 그대로 날아간다.

노린 공을 놓쳤을 때 타자가 느끼는 부담감은 시험지에서 첫 문제를 틀린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제이 모건이 이해력이 떨어져서 낮은 공이 체인지업이라는 걸 몰랐겠나.

멀쩡한 사람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타석, 본인도 타자라 제이 모건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다.

이런 상황에선 머리보다 동물적 감각을 앞세우는 게 현실적, 제이 모건은 다음 공에만 집중했다.

[따아악~!!]

“타격!! 멀리 가는 이 타구는!! 우측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제이 모건의 투 런 홈런!! 스코어는 이제 4대 3!!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믿을 수 없는 한 방이 나오는군요!!”

“이러니까 야구가 모른다는 겁니다!! 초구 헛스윙 한 그 공이잖아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1루를 앞둔 제이 모건은 열광에 빠진 본진을 향해 만세 삼창을 질렀다.

처음엔 낮은 공인 줄 알았는데 이내 빠른 볼이라는 걸 깨닫고 스윙궤적을 수정, 벼락같은 스윙으로 한 방을 만들어 냈다.

뉴욕을 죽였다가 살려 놓은 선수, 동료들은 애증의 모건을 그냥 두지 않았다.

“야 이 멍청아!! 꼭 그렇게 극적으로 쳐야 했냐?!!”

“어쨌든 쳤잖아?!!”

“그건 그래!! 이 빌어먹을 자식아!!”

사방에서 날아드는 손찌검, 2연패 수렁 앞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뉴욕 선수단은 내친 김에 역전을 노렸다.

하지만 8회 말까지 득점을 내지 못했고, 경기장을 가득 채운 4만 2천 팬들은 마지막 9회에 기대를 걸었다.

“구급차 좀 미리 불러주게.”

“왜 그러십니까?”

“이대로 패배하면 난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몰라.”

한편, 햄스턴 구단주는 플레어티 단장의 옷깃을 붙잡았다.

올해를 위해 7억 2천 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디비전 시리즈부터 2연패를 당하면 내 불같은 성질이 버텨낼 수 있을까.

정말 병원으로 실려 갈지도 모를 일, 마침 선두타자 스캇 험프리가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렸다.

조금씩 달아오르는 분위기, 다음 타자 몬테로가 볼넷으로 출루하자 햄스턴 구단주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구급차 좀 불러주게.”

“또 왜 그러십니까?”

“끝내기 안타가 나오면 너무 기뻐서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

“하하~ 이래나 저래나 불러야겠군요.”

플레이터 단장은 진짜로 구급차를 대기시켰다.

마침 타석에는 이인영, 진짜 끝내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따악~!!

“와아아아아~!!”

경쾌한 타격음, 장타를 직감한 험프리는 단숨에 3루를 돌아 홈까지 파고들었다.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타구, 1루 주자 몬테로도 그대로 홈으로 파고들면서 경기가 끝났다.

말 그대로 뒤집어진 햄스턴 스퀘어 가든, 1차전의 역적에서 2차전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인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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