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거짓말은 안 한다 (5)
[이인영, FA 계약 첫 시즌 마무리]
[91만 9천 달러 기부 한다.]
10월 1일,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일정이 끝났다.
이인영은 뉴욕으로 둥지를 옮기면서 뉴욕연방은행과 계약을 맺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대략 이랬다.
■ 홈런 하나에 1만 달러, 타점 하나에 1천 달러를 기부한다.
■ 개인 타이틀마다 10만 달러를 추가 기부한다.
이인영은 올 시즌 46홈런 159타점을 기록, 이것만으로 61만 9천 달러를 기부했다.
여기에 아메리칸리그 타격 삼관왕을 차지하면서 30만 달러 추가, 기부금만 100만 달러를 채웠다.
얼핏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이 정도는 뉴욕의 햄스턴 구단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햄스턴 구단주 – 올해 1억 5천만 달러 기부]
[올해도 메이저리그 구단주 기부액 1위]
햄스턴 구단주는 2022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연방법에 따르면 햄스턴 구단주는 미국 시민 최상위 0.001%에 속하는 사람으로 세율이 무려 40%에 달한다.
그런데 실제로 따지면 수익에서 부담하는 세율은 18% 정도, 세금을 절반 이상으로 줄여버린 건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미국은 전체 수입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게 아니라 세법에 열거한 소득에 대해서만 세금을 징수한다.
즉, 내가 A라는 사업으로 돈을 벌었는데 세법에 A가 포함이 되지 않았다면 그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낼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납세자들의 종합소득을 매년 계산하긴 하지만 정부가 앞장 서 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내는 세금이 많지 않은 것,
이인영은 야구만 하면서 돈을 버는 입장이지만, 햄스턴 구단주는 부동산이나 다방면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 1억 5천만 달러를 기부금으로 내놓을 수 있었던 것, 정부가 많은 세금을 부과했던 햄스턴 구단주가 그만한 기부금을 내놨겠는가?
이런 배경 때문에 미국의 기부 문화를 환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의 이득을 보장해 주는 것도 또 다른 형식의 정의지’
이인영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소득세를 엄청 냈다.
많이 버는 놈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말 할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국민에게 세금을 덜 거두는 대신, 부자들에게 세금을 왕창 거둬들이는 구조다.
심지어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소득세를 안 내는 구조,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저소득층이 세금을 덜 내는 구조다.
그런데도 여론은 부자들이 기부를 안 하고 사회에 환원을 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하고 있으니, 부자들 입장에선 좀 억울한 일이다.
“그럼 세금 덜 거둔 만큼 기부를 하자. 그럼 부자들 이미지도 좋아지고 서로 윈 윈 아닌가?”
이인영은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기부 재단을 세우고 아이들을 꾸준히 지원했는데, 빌딩 몇 개 샀다고 일부 팬들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기부 재단을 세운 건 탈세를 피하기 위한 꼼수였던 거야]
[그래, 법인으로 건물을 사면 세금을 아낄 수 있잖아]
왜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면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그럼 미국 정부처럼 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고, 기부를 권장하는 문화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세금을 절세하고 1억 5천 만 달러를 기부한 햄스턴 구단주는 이기적인 존재인가? 단편적인 면만 보고 부자를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인영은 그런 시선에 환멸을 느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빌딩 사는 거잖아. 그런데 그게 죄야?”
가끔 이게 정말 민주주의 사회인지 혼동이 되는 한국, 부자들한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사회악으로 몰아넣는 게 최선인가.
100만 달러 기부하면 그거 다 세금 줄이려는 거라고 하고, 그럼 뭘 어쩌라는 건가.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됐지만 기부 기사가 나가는 게 썩 달갑지는 않았다.
‘몰라, 돈 나올 구멍이나 찾아보자.’
이제는 돈을 굴릴 수 있는 입장, 이걸 쌓아두면 뭐할 건가.
그런데 마침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날아들었다.
“여기에 투자해 보시죠. 이득은 확실합니다.”
“저는 주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해 드립니다.”
제프 메츠 에이전트가 귀띔을 줬다.
금융은 오래 전부터 부자들이 돈을 불려온 수단, 하지만 투자금이 하락할 수 있다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 보험(옵션)을 들어 놓으면 되는 거 아냐?’
이런 배경 때문에 금융업체는 각종 옵션을 끼워팔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시장에 사과가 한 개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값이 오를지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누가 평생 쌓은 목돈을 쉽게 투자 할 수 있겠나. 그런데 보험을 들어놓으면 얘기가 좀 다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등장한 수단이지만 이제는 수익을 내는 편법으로 바뀐 옵션 제도, 만기일에만 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옵션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매년 수백억을 버는 자산가가 돈을 놀리는 건 낭비, 제프 메츠 에이전트는 날 믿어준다면 수익을 내주겠다고 설득을 이어갔다.
‘뭐 … 200만 달러 정도는 괜찮겠지.’
잃어도 딱히 손해 될 게 없는 돈, 그래도 나 혼자 이런 결정을 하면 아내가 서운해 하지 않겠나.
이 소식을 들은 혜진 씨는 경악했다.
“자기야, 그 사람 믿어도 되는 거야?”
“콜 옵션하고 풋 옵션을 모두 걸어두면 괜찮데”
“그게 뭐야? 난 전혀 모르겠어.”
“한마디로 나부터 살자 이거지.”
얼마 전, 독일의 금융시장에서 큰 손들이 풋옵션을 행사했는데, 한국 자산운용사가 어설프게 손을 썼다가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기일에만 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유럽 증권 시장에서 한국 자산운용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말 그대로 박살이 났고, 이 피해를 세금으로 채워야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한국 여론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나는 옵션 행사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투자를 하는 것,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빠져나올 퇴로도 마련해 뒀다.
한 번 해보고 잘 안 되면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혜진 씨는 남편을 말리고 나섰다.
“자기야, 그냥 야구만 열심히 해, 돈 더 안 벌어도 되잖아?”
“집안 살림 거덜 내는 것도 아니고, 200만 달러만 투자하는 거야.”
“그래도 좀 불안한데….”
“이번 한 번만 해볼게. 그리고 그 정도 돈은 잃어도 괜찮잖아. 그냥 땅속에 묻어뒀다고 생각하려고, 이득이 나면 기부하지 뭐.”
혜진 씨는 남편을 붙잡고 싶었다.
한국에서 부동산 투자로 제법 많은 돈을 벌어들인 남편, 연봉도 메이저리그 1위 아닌가.
이 정도면 충분한데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건지, 일단 지켜보고 문제가 생기면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 * *
“와아아~!!”
“뉴욕이 무조건 이긴다!!”
이곳은 ALDS 1차전이 열리는 뉴욕 햄스턴 스퀘어 가든,
올 시즌 뉴욕은 108승, 구단 역대 최고 승률 3위를 기록하는 역사적인 시즌을 보냈다.
햄스턴 구단주가 이인영에게 6억 달러를 투자하자, 제정신이 아니라며 혀를 내두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과감한 투자가 불러온 기적, 특별석에 앉은 구단주는 어깨를 들썩였다.
‘겁쟁이들이 투자를 두려워 할 뿐, 나는 너희들과 달라’
사업을 하다보면 손해를 볼 때도 있지만 이득을 볼 때도 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10달러에도 벌벌 떨지만, 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 투자를 할 수 있는 법,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일개 선수 영입에 6억 달러를 퍼부었겠나.
뉴욕은 올 시즌 3억 4천만 달러의 순수익을 올렸다.
메이저리그 구단 평균 수익이 1억 5천만 달러 정도라는 걸 고려하면 뉴욕은 그 배 이상의 수익을 낸 거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덩치, 이인영 정도 되는 슈퍼스타를 품을 수 있는 구단이 몇 개나 되겠나.
처음부터 우리가 품어야 했던 선수, 햄스턴 구단주 옆에 앉은 플레어티 단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1회 초 원정팀 시카고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텍사스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자, 스캇 험프리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66 – 홈런 29개 – 74타점, 주전 경쟁을 이겨내고 드디어 뉴욕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올 시즌 리드오프 홈런만 9개거든요. 텍사스 배터리가 어떻게 볼 배합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텍사스의 홀리스 투시는 포수가 보낸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드 오프 홈런이 9개? 그게 무슨 상관인가.
투수는 어떻게든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해야 하는 입장, 험프리를 피해도 장타자들이 줄줄 나오는 뉴욕 타선, 여기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아악~!!
“와아아~!!”
하지만 이 도박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좌중간을 훌쩍 넘어가는 대형 홈런, 선취점을 내주면서 텍사스 진영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다음 타자 몬테로까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고조되는 분위기,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삼관왕을 달성한 히트 상품, 이 주가의 상승세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당분간 하락할 일은 없겠지, 팬들은 물론 구단관계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이런 때도 있는 거지.’
믿었던 주가는 첫 타석부터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하게 맞았지만 2루 정면이었던 게 문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팬들도 어쩌다 일어난 불행으로 여겼다.
“이봐!! 왜 이래?!!”
“당신은 가을의 영웅이잖아!!”
하지만 상한치를 친 주가는 계속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포스트 시즌에서 통산 타율 0.424 – 11홈런 – 37타점을 기록한 선수가 이런 활약이라니, 물론 이인영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162경기를 치르면서 매 경기 상한가를 쳤겠나?
투자를 했으면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법, 성급한 팬들의 목소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박아두면 제 몫은 한다.’
한편, 플레어티 단장은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아무리 부진해도 마지막까지 믿고 기용하는 선수도 있는 법, 야구도 투자나 마찬가지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시장질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야구, 저 선수를 기용한다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나마 확실한 선수를 기용할 뿐이다.
오늘 한 경기 아니, 이번 시리즈에서 죽을 쒀도 이인영은 마지막까지 로스터에 남을 선수다.
그렇다면 믿을 뿐, 한 번 신뢰한 이상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따악~!]
“아~ 이 타구는 다시 정면인데요. 이인영 선수가 세 번 째 타석도 범타로 물러납니다.”
“득점권에서 계속 범타로 물러나고 있다는 게 조금 아쉽네요. 물론 언제나 잘 할 수는 없지만,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이날 뉴욕은 험프리의 선제 솔로 홈런으로 승기를 잡았지만
득점권에서 중심타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5대 3, 충격의 역전패를 당했다.
일단 여론은 득점권 기회를 2번이나 말아먹은 3번 타자를 질책하는 분위기, 이인영은 피하지 않고 기자들을 마주했다.
“오늘 경기의 부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죠.”
“뭐 … 저는 내일도 3번 타자로 경기에 나설 겁니다. 남은 경기에서도 그렇겠죠. 당신들이 제 형편없는 경기력을 비난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팀 입장에서 저는 절대 처분할 수 없는 주식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충분한 답이 됐습니까?”
예상은 했지만 너무도 당당한 태도,
1차전 패배에 실망한 햄스턴 구단주도 속은 쓰렸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인영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