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거짓말은 안 한다 (4)
[윌리엄 드로렌조, 오늘도 호투]
[7이닝 1실점, 8K, 시즌 3승 달성]
어느덧 9월에 접어든 시즌,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뉴욕은 또 다른 호재에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터지지 않던 선발 유망주가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지난 8월 15일 메이저리그에 승격된 드로렌조는 3경기 연속 승리를 거두며 앤더슨 감독의 눈에 띄었다.
최고 101마일의 포심과 90마일 초반에서 형성되는 슬라이더로 타자를 찍어 누르는 파워 피처,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19이닝을 던지면서 볼넷도 4개 밖에 내주지 않았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뉴욕 여론도 칭찬을 이어가고 있는 중,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유망주는 자신의 입지를 잊어버렸다.
‘내가 없어도 상관없잖아.’
오늘은 팀 내 1선발 리차드 케이시가 등판하는 날, 내가 벤치를 떠난다고 팀에 무슨 손해가 있겠나.
더그아웃에서 할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건 은근 따분한 일, 기회를 엿보다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자, 리차드 케이시 선수가 7회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오늘 피안타 없이 볼넷 1개 - 탈삼진 10개, 노 히트 노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 팬들이 바라던 모습이 이거죠. 어린 선수들의 활약에 뭔가 자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케이시는 초구부터 101마일 광속구를 선보였다.
연 평균 3900만 달러를 받으면서 투구 수나 관리받고 있는 신세, 아무리 귀한 화초라도 이 정도면 내다 버리는 게 팀에 이득 아닌가.
일부 팬들은 케이시를 두고 이런 극단적인 주장까지 내놨다.
케이시가 없어도 뉴욕의 패권에 변화는 없을 거라는 것, 이런 분위기는 에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선수는 실력으로 보여줘야 하는 법, 성격은 까칠해도 메이저리그 경력 12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딱~!!]
“강습 타구!! 막아 냈고!! 이인영 선수가 직접 달라와 베이스를 밟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좋은 수비를 보여주는 군요!!”
“왜 이 선수가 연봉 6천만 달러를 받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죠. 다른 1루수들과 수비 범위가 다릅니다.”
한눈에 봐도 1루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인영, 이건 정상적인 위치가 아니다.
이렇게 깊은 곳에 있으면 다른 포지션으로 타구가 갔을 때 어떻게 신속히 1루로 이동을 할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행동으로 옮겼을 뿐, 1루 쪽으로 오는 타구는 막기만 해도 아웃을 잡아낼 수 있다.
이번 이닝에서 선두타자로 나온 에릭 샌더스는 좌타자, 좌측으로 타구를 날린다고 해도 1루수로 귀루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나는 1루 강습 타구에 대비할 뿐, 그리고 수비 범위가 좁은 2루수의 능력을 고려해 평소보다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결과는 강습타구, 한 번에 잡으려 하지 않고 일단 막아낸 다음 1루로 달려가 베이스를 밟았다.
2루수의 수비 부담을 줄여주고 투수의 노 히트 무산까지 막아 낸 플레이, 현장관계자들은 이 수비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었다.
“젠장!!”
하지만 케이시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했지만 후속 타자에게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허용한 것, 대기록이 무산되면서 팬들도 아쉬움을 표했다.
현재 투구 수는 87개, 굳이 완봉까지 갈 이유도 없지 않나.
뉴욕의 앤더슨 감독은 이번 이닝만 지켜보기로 했다.
[따아악~!!]
“아~ 여기서 이 타구가 … 좌측 담장으로 넘어가는군요. 리차드 케이시는 7회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투구 수가 90개에 가까워지면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네요. 앤더슨 감독이 마운드에 오릅니다.”
리차드 케이시는 감독이 내민 손에 공을 넘겨줬다.
마지막에 무너지긴 했지만 어쨌든 6과 2/3이닝 동안 2실점 - 삼진 11개를 잡아낸 호투, 홈 팬들은 박수를 쏟아냈지만 케이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코치들이 내민 손도 외면하고 라커룸으로 퇴장, 여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 보고 말았다.
‘이 자식이 경기 중에 게임을 해?’
베테랑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장면, 케이시는 드로렌조가 앉아 있는 소파에 수건을 집어던졌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뇌가 없는 거 아냐?!!”
“왜 그렇게 화를 내?”
“경기 중이면 다른 투수가 던지는 걸 봐야 할 거 아냐?!!”
“내가 그걸 꼭 봐야 돼? 노히트 무산 됐다고 나한테 화풀이 하는 건 아니지?”
“뭐야?!!”
높아지는 언성에 주위에 있던 클러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나마 경력이 되는 클럽 매니저가 중재에 나섰지만 한창 혈기 넘치는 두 덩치를 막아내기엔 역부족, 케이시는 대놓고 루키에 면박을 줬다.
“입에서 젖 냄새도 안 가신 자식이 베테랑처럼 굴어?!! 너 여기서 몇 이닝 던졌어?!!
드로렌조는 선뜻 입을 다물었다. 겨우 19이닝 경력, 그에 비해 케이시는 12년 동안 1900 이닝을 넘게 소화했다.
내가 던지는 날이 아니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메이저리거, 지금 불펜에 앉아 있는 투수들은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 경력 좀 먹은 선수들도 그렇게 행동하는데 풀타임 1년도 못 되는 놈이 이러고 있으니, 너 같은 건 메이저리거가 될 자격도 없다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다른 선수들도 알게 되면서 이 사건은 큰 문제로 번졌고, 이인영은 드로렌조를 따로 불러 주의를 줬다.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네가 우리와 대등하다고 생각하냐?”
“ … ”
“착각하지마.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고 네가 우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야.”
사회는 기본적으로 평등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차별이 있는 법,
연봉 3천 900만 달러를 받는 선수와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승격한 선수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드로렌조가 승격 후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팀 내 에이스에게 반항할 군번은 아니다. 거기다 경기 중에 라커룸으로 들어가 게임을 하다니, 뉴욕 선수단이 리차드 케이시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건방진 루키의 일탈을 두둔할 일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아직도 네가 우리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냐?”
“ …… 아니”
“알았으면 됐어.”
군기를 확실히 정립한 뉴욕, 얼마 후 이 사건은 기자들에게 공개됐고, 드로렌조는 공식 사과를 표했다.
“이번 사건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동료들은 절 혼내거나 면박을 준 게 아니라 제가 팀의 일부가 되길 바란 것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는 그동안 큰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Lee)가 그러더군요. 너는 우리와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고 말이죠. 따지고 보면 맞는 말입니다.”
드로렌조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놨다.
딱히 기자들에게 선수를 차별하는 고참을 고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인영이 선수들을 연봉으로 나열하고 차별한다고 비난했다.
“차별한 거 맞습니다. 연봉 4000만 달러 받는 선수와 최저 연봉을 받는 선수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동등하게 대우 받길 바라는 게 웃긴 일이죠.”
이인영은 냉정한 반응을 내놨다.
그라운드는 모든 선수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할 뿐, 평등한 결과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최저연봉 받는 유망주가 최고참 에이스가 투구 할 때 게임기를 붙잡고 있었다니, 차별이고 자시고 회사였다면 당장 목이 날아갈 일이다.
사회에는 규칙과 계급이 존재하는 법, 드로렌조는 동료 선수의 투구를 지켜봐야 한다는 메이저리그의 규칙을 어겼다.
나는 철 없는 유망주에게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하고 너는 그 밑바닥이라는 걸 가르쳐 준 것, 이인영은 앞으로도 팀의 기강을 해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장난이 아니구나.’
미국 여론은 이번 사건을 두고 혀를 내둘렀다.
차별 소리만 나와도 민감하게 대응하는 게 대중, 그런데 그 앞에서 나는 사람을 차별한 게 맞다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이인영은 오클랜드에서도 건방진 유망주를 쫒아낸 적이 있다. 소문은 들었지만 역시 보통이 아닌 성깔, 이때부터 드로렌조는 고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창 잘 나가던 유망주의 기를 죽인 건 아닌지,
플레어티 단장은 내심 걱정했지만 이인영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 별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9월 13일, 드로렌조는 시즌 4번 째 선발 등판에 나섰다.
“자, 드로렌조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3경기 등판 3승 무패 평균자책점 2.36, 19이닝 동안 볼넷 4개, 탈삼진은 22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안 좋은 일이 있었죠.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습니다. 경기 중에 그러면 안 되죠.”
“오래 된 일이지만 KBO에서 경기 중 더그아웃에서 간식을 먹던 선수가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그 선수는 고참이었거든요. 그런 팀이 기강이 바로 서겠습니까? 이인영 선수가 너무 권위적으로 행동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권위가 없으면 질서도 없습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어느 정도의 권위는 필요한 법이죠.”
오늘 따라 말이 많은 중계석, 그 사이 드로렌조는 초구를 던졌다.
미트를 파고드는 97마일 빠른 볼,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든 드로렌조는 바로 투구에 임했다.
‘그래, 나도 올라가면 돼.’
이번 사건을 통해 슈퍼루키는 자만심을 버렸다.
어설픈 회유로 날 설득하려 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회에는 계급이 있고 너는 밑바닥이라니, 논란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 아닌가. 거기다 상대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 나는 널 차별하고 있다는 말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억울하면 한 단계씩 올라가는 수 밖에, 공 하나에 자존심을 걸었다.
하지만 1회부터 볼넷 하나와 안타 2개를 내주며 1실점, 굳은 얼굴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어지는 뉴욕의 1회 말 공격, 1사 주자 1루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49 - 홈런 43개 – 148타점, 150타점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만약 달성한다면 뉴욕 선수로는 24년 만의 150타점이죠. 앞으로 11경기가 남아 있으니 무난하게 달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인영은 초구를 좌측으로 밀어냈다.
멀어지는 타구를 쫓는 눈, 홈런을 확신했을 때 나오는 포즈에 홈 팬들은 열광했다.
150타점을 역전타로 장식하는 순간, 이인영은 다음 타석에서도 토론토의 선발 제이 마르티네스의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추가 타점을 올렸다.
마르티네스의 슬라이더는 올 시즌 최고의 구질로 평가받는 마구, 이것마저 통하질 않는 건가.
오기가 생긴 마르티네스는 다음 승부에서도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택했지만, 상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올 시즌 만테나 어워드 수상이 유력한 마르티네스를 두들긴 하루, 드로렌조의 4연승을 견인한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첫 타석을 제외하고 모두 슬라이더를 공략해 안타를 만들어 냈습니다. 마르티네스의 슬라이더 공략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저는 사람은 차별해도 공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공이든 제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어떤 공이든 다 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얄밉긴 한데 틀린 말도 아니라 질문은 던진 기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