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일단 먹고 본다 (4)
“자, 이제 경기는 3회 말로 접어듭니다. 1대 0으로 뒤진 뉴욕의 반격, 타석에는 스캇 험프리 선수가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55 - 홈런 9개 – 3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홈런 타자에게 삼진은 세금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선수는 세금만 내는 타입입니다. 받을 건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박한우 위원은 하위 타선에도 깐깐한 잣대를 들이댔다.
험프리는 올해 데뷔 3년 차를 맞이한 선수, 데뷔 시즌에 타율 0.252, 홈런 7개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문제는 너무 떨어지는 볼 카운트 싸움 능력, 바깥쪽 빠른 공이나 떨어지는 공에 어이 없이 배트를 내는 경우가 많다.
삼진이 많아도 볼넷이 어느 정도 따라온다면 괜찮겠지만 작년 시즌 기록은 82삼진 29볼넷, 출루율은 겨우 0.320을 기록했다.
그렇다고 훈련이나 경기를 게을리하느냐, 열심히는 하는데 결과가 안 따라주니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선수, 보스턴 배터리는 험프리의 성향을 십분 활용했다.
‘앞발 끝이 열려 있다고?’
하지만 험프리도 생각없이 당하지만은 않았다.
메이저리그 닷컴에서 험프리의 앞발 끝이 열려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런 자세로는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없다나?
앞발 끝이 열려 있으면 어깨는 자연스럽게 열려 버린다. 당연히 공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도 일정하지 않고 뭣보다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일 확률이 높다.
험프리의 문제점을 압축한 해설, 박한우 위원도 이 점을 지적했다.
[딱~!]
“파울입니다. 역시 바깥 쪽이네요.”
“험프리 선수는 밀어칠 때 발꿈치가 약간 들렸다가 다시 내려가면서 스윙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건 컨택이 된 후에요. 앞발을 닫아놓는 건 문제가 없는데, 닫을 거면 마지막까지 닫든지 열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앞발을 자연스럽게 열어줘야 스윙이 매끄럽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닫아 놓고 최소한의 회전으로 안타를 만들어 내는 선수들도 있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을 택하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험프리는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컨택은 됐지만, 앞발이 너무 일찍 풀리면서 스윙을 원하는 지점까지 끌고 나오질 못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지막까지 닫아 놓는 게 나을 텐데, 성운 라이온즈 감독 시절 선수들을 가르치던 시절이 떠올랐는지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까지 닫아놓는 게 좋겠어.’
다행히 험프리는 문제점을 빨리 깨달았다.
떨어지는 2구를 골라낸 뒤 바깥쪽 공을 가볍게 밀어냈는데, 그렇게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양질의 타구를 만들어 냈다.
‘하아~ 야구 너무 어렵다.’
1루에 안착한 험프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1루 코치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쳤다.
약점으로 알려진 바깥쪽 공을 안타로 만들었는데 보스턴 배터리는 다음 타석 때 어떤 볼배합을 들고 나올까.
마지막까지 앞발을 닫아놓으면 몸 쪽 공에 대처하기 어렵다.
앞발을 닫아둔 만큼 스윙 폭은 좁아지고 몸쪽으로 들어온 공을 힘으로 밀어내지 못할 텐데, 한 곳을 보완하면 또 다른 곳에 구멍이 생기는 타격의 세계, 그런데도 3할 5푼을 치는 녀석이 뉴욕 벤치에 앉아 있다.
어떻게 타격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즐거움, 험프리는 1루에서 멀어지며 상황을 살폈다. 이후 볼넷과 진루타가 나오면서 1사 주자 2 – 3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바깥쪽 - 2구는 몸 쪽, 볼 배합을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지.’
홈런 맞기 무섭다고 바깥쪽으로 도망다니는 투수들은 상대하기 쉽다.
앞발을 마지막까지 닫아놓고 가볍게 밀어내면 끝, 그런데 이렇게 좌우로 찔러대면 타자 입장에선 곤란하다.
스윙을 한다고 모든 지점에서 파워가 실리는 건 아니다.
몸 쪽 공을 때릴 때 앞발을 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빨리 열어버리면 스윙이 지나치게 빨리 돌면서 애써 모아둔 파워를 잃어버린다.
스윙이 빨리 돌아나온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 뜻, 이인영은 어떤 포인트에서 내 스윙의 힘이 극대화 되는지 알고 있다.
문제는 투수가 거기에 맞춰주질 않는다는 것, 지금처럼 좌우를 찔러버리면 강한 타구가 나오는 포인트를 순간 잃어버릴 수 있다.
타격 감이 좋을 때는 투수가 좌우를 찔러도 대응할 수 있지만, 기계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그 포인트를 정확히 잡아내겠나.
일단 몸 쪽은 버리고 바깥쪽 공에 초점을 맞췄다.
“몸 쪽,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어딜 노리고 있는지 대략 보이죠. 문제는 켄 자일스 투수가 몸 쪽을 던질 자신이 있냐는 거겠지만요.”
“첫 타석에서는 철저하게 도망 다녔는데, 이번 이닝은 몸 쪽 승부가 많네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흥미롭습니다.”
타자가 바깥쪽 공을 노리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배터리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이인영은 우직하게 바깥쪽 공만 노렸다.
딱~!
설마 했던 몸 쪽, 때려냈지만 힘이 실리지 않는 구간에서 컨택이 되고 말았다.
내야를 겨우 벗어난 타구, 배트를 집어 던진 이인영은 1루로 달렸다.
‘집중, 집중’
이때 3루 주자 스캇 햄프리가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시범 경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멍하니 있었다가 득점 기회를 놓친 적이 있지 않나.
마지막까지 2루수에 주목, 왼쪽 발이 지면과 떨어진 걸 확인하고 홈으로 돌진했다.
“안돼!! 멈춰!! 멈춰!!”
3루 코치가 저지에 나섰지만 이미 엎어진 물, 2루수는 급히 송구하려 했지만 왼 발이 떠 있는 상태라 바로 송구를 하지 못했다.
설마 했던 내야 희생플라이, 이렇게 이인영은 동료 덕분에 시즌 89번째 타점을 올렸다.
타율도 손해 보지 않고 일석이조, 가끔은 이런 행운도 있는 거 아닌가. 사양한다고 타점이 취소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먹고 봤다.
“너도 내야 플라이를 때리는구나?”
“왜, 신기하냐?”
“응 처음봤어.”
험프리는 이인영 옆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인영은 통산 플라이볼 대비 내야 뜬공 비율이 2.3% 밖에 안 되는 선수, 내야 뜬공이 득점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폐기물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인영은 분명 생산성이 높은 타자다.
올 시즌 처음 때린 내야 플라이, 그런데 이것마저 동료의 재치로 희생플라이로 바꿨다.
야구가 잘 되는 날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날도 있는 법, 베테랑 답게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득점 올려줬잖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
“내가 뛰라고 애원했냐? 네가 좋아서 뛴 거잖아.”
“어? 그럼 타점 취소”
“이미 먹은 걸 어떻게 뱉어내냐?”
마지막까지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 동료, 험프리는 너무한 것 아니냐며 불만을 표했지만 비슷한 상황은 6회에도 일어났다.
1사 주자 만루에서 이인영의 타석, 우익수 쪽으로 깊은 타구를 날렸고 상황을 살피던 험프리는 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이인영은 안타 하나 없이 2타점을 추가, 90타점으로 메이저리그 선두 자리를 지켰다.
“올 시즌 그 친구가 몇 타점을 올리든 1타점은 제 덕분입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해 두세요.”
경기가 끝난 후, 스캇 햄프리는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내야 희생플라이 하나로 단숨에 이인영 도우미로 올라선 햄프리, 햄프리는 그 친구가 올 시즌 몇 타점을 기록하든 그 중 하나는 내 덕분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게 문제, 햄프리는 마음에 담아둔 불만을 쏟아냈다.
“시범경기 첫날이었나요? 그때 저는 내야 플라이에 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그 친구에게 잔소리를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멋지게 홈을 훔쳐냈죠. 이 정도면 칭찬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네, 물론이죠.”
“그런데 그 친구는 칭찬을 너무 안 해요. 당신들이 뭐라고 좀 해 봐요.”
한국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칭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어린애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정도면 잘 했다고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이인영은 마지막까지 냉정했다
“그건 햄프리가 잘 한 게 아니라 상대가 빈틈을 보인 겁니다. 그 녀석이 오늘 홈런이나 결승타를 때린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칭찬을 해야 합니까?”
“그래도 칭찬 한 말씀 해주시죠.”
“아니요. 저는 그 정도로 칭찬을 베풀 만큼 마음이 넓지 않습니다.”
2할 5푼을 겨우 넘는 타율과 형편 없는 출루율, 햄프리의 잠재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
최근 하위타선에 배치되고 있지만 기대만큼 성장했다면 최소 2번은 쳐야 할 선수, 주루 플레이보다 타격의 성장이 더 간절한 선수다.
주루 플레이 하나 잘 했다고 칭찬해야 한다면 나중에 홈런을 쳤을 땐 절이라도 해야 하나.
이인영은 험프리가 시즌 20홈런을 칠 때까지 칭찬은 아껴두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게 나한테 맞구나.’
이날을 기점으로 험프리는 의미 있는 활약을 이어갔다.
바깥쪽과 몸쪽을 모두 공략하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일관성이 없어진 타격, 그러다 바깥쪽에 초점을 두다 보니 앞발이 열리는 현상이 사라졌다.
몸 쪽 공이 들어와도 지켜볼 뿐, 가운데로 들어온 공은 놓치지 않으면서 시즌 타율은 0.266까지 올라왔다(7월 기준).
3할을 훌쩍 넘는 타율을 기록하는 선수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지만, 2년 동안 이렇다 할 반전을 만들어 내지 못한 험프리에겐 의미 있는 기록, 덕분에 주전 2루수 자리를 완전히 꿰찼다.
하지만 몸 쪽 공에 약점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7월 2일 첫 경기에서도 몸 쪽을 집중 공략당했다.
“오~ 지금은 몸에 맞을 뻔 했습니다.”
“험프리 선수가 최근 몸에 맞는 볼이 부쩍 늘어났죠. 약점을 극복하자마자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험프리는 태연하게 자세를 잡았다.
출루도 못하던 내가 몸에 맞는 볼로 1루를 밟다니, 엄청난 발전 아닌가. 누구 말대로 공짜로 주는 건 일단 먹고 보는 법, 몸에 맞는 볼도 사양하지 않았다.
따악~!!
“와아아~!!”
가볍게 밀어낸 타구는 우중간을 꿰뚫었다.
바깥쪽 공에 완전히 자신감이 붙은 스윙, 개릿 앤더슨 감독은 박수를 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후속 타자 앤서니 몬테로는 삼진 아웃 됐지만 브라이언 러시 – 이안 덱스터 – 이인영으로 이어지는 상위 타순, 대량 득점을 기대했다.
‘또 만루네.’
앞 선 타자들이 출루해주면서 1사 주자 만루, 이인영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유독 타점 기회가 많은 편, 최근 7경기에서 만루 기회만 3번이다. 이어지는 밥상 러시에 행복한 비명을 지를 정도, 차분하게 장비를 챙겨들었다.
“몸 쪽, 볼입니다. 최근 몸쪽 승부가 늘어난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아닙니다. 이인영 선수가 최근 몸 쪽에 타이밍을 잘 못 잡고 있거든요. 그래도 감각이 있는 선수라 조만간 이겨낼 겁니다.”
“말씀 드리는 사이 또 몸 쪽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2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 잡히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야생의 세계, 다음 공은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