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일단 먹고 본다 (3)
따악~!!
“와아아~!!”
제대로 걸린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유유히 홈으로 들어오는 역전 주자, 8점 차를 뒤집은 대역전극에 뉴욕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리 와!!”
“도망 칠 생각하지 말라고!!”
뉴욕 선수들도 1루를 밟은 오늘의 영웅을 에워쌌다.
별로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호들갑을 떠는 동료들, 이인영이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덩치들의 축하를 받아들이는 동안 끝내기를 허용한 투수는 터덜터덜 힘 없는 발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도 이겨내지 못한 벽,
선수들이 하나 둘 더그아웃을 떠나는 동안, 오클랜드의 보이스 감독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승부를 지시한 건 내 실수였던 건가. 8점 차 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패장은 기자들 앞에서 힘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8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했는데 패배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 … 글쎄요. 분명한 건 득점권에서는 인 플레이 타구를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 원칙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보이스 감독은 이인영에게 타격을 허용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득점권에서 특별히 강한 타자가 존재하는 건 사실일까?
득점권 타율이 야구계에서 사장된 개념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주자가 없는 상황, 득점권 상황에서 투수가 던지는 볼배합이 다른 것처럼, 타자도 상황에 따른 타격을 하기 마련이다.
■ 주자가 없을 때 투수가 초구로 빠른 볼을 던질 확률 : 54%
■ 카운트가 유리할 때 투수가 빠른 볼을 던질 확률 : 37%
■ 카운트가 불리할 때 투수가 빠른 볼을 던질 확률 : 24%
■ 투 스트라이크에서 투수가 빠른 볼을 던질 확률 : 35%
이건 작년 시즌을 통계로 낸 투수들의 볼 배합, 상황에 따라 볼배합이 달라진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는 어떨까.
좌타자는 인플레이 타구가 나왔을 때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게 사실, 특히 상황이 득점권이라면 배터리는 절대 타격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래서 오클랜드 배터리는 아웃 피치를 적극 이용한 것, 하지만 보이스 감독은 통계가 증명한 원칙을 잊고 승부를 지시했다.
오늘 패배는 전적으로 내 책임, 보이스 감독은 승부를 택한 투수에겐 죄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볼넷을 주더라도 승부를 해선 안 됐습니다. 저는 그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패배를 한 겁니다.”
“리(Lee)를 상대로 승부를 한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늘의 영웅은 보이스 감독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기자들은 다시 뉴욕 클럽하우스로 이동,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스캇 쉴즈가 승부를 피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보이스 감독이라면 승부를 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근거가 있나요?”
“물론이죠. 저는 남의 뒤를 캐내는 걸 좋아하니까요.”
이인영은 작년 시즌 오클랜드 선수들과 후반기를 함께 했다.
당연히 불펜 투수들의 투구 성향도 어느 정도 꿰고 있는데, 스캇 쉴즈는 좌타자를 상대로 초구 포심을 즐겨 던진다.
그리고 유리한 카운트를 선점하면 체인지업을 던질 확률은 36%까지 상승,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라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삼는 투수일수록 초구로 빠른 볼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투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진 않는다.
이인영은 보이스 감독이 위기 상황에서 불펜에게 자주 지시를 내리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패스트볼을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게 보이스 감독의 성향, 카운트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이 원칙은 절대 깨지지 않는다.
구위가 좋은 불펜이 많았던 작년 시즌이라면 이 작전이 통했을지도 모른지만 오클랜드가 자랑하는 핵심 불펜 3인방은 구단주의 바겐 세일 정책으로 해산됐다.
보이스 감독이 이런 현실을 인정했다면 도망치는 피칭에 좀 더 신경을 썼겠지, 거기다 이인영은 오클랜드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축 선수 아닌가.
나와 상대를 잘 이해했다면 이런 볼배합은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이인영은 보이스 감독이 볼배합에 개입한 건 명백한 실책이라고 주장했다.
“투수들은 득점권 상황에서 저와 승부를 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보이스 감독이 승부를 택한 건 실책이라는 뜻이죠.”
“근거가 있는 주장인가요?”
“믿기 어렵다면 직접 찾아보시죠. 출루율이 4푼 이상은 차이가 날 겁니다.”
기자들은 그 말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나섰다.
정말 출루율이 그렇게 차이가 날까, 결과는 놀라웠다.
■ 비득점권 : 타율 0.353 – 출루율 0.423 – 장타율 0.634
■ 득점권 : 타율 0.360 – 출루율 0.470 – 장타율 0.642
득점권의 타율과 장타율은 비득점권에 비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출루율은 무려 5푼 정도 차이가 났는데, 투수들이 득점권에서 이인영을 상대로 승부를 피한 건 사실로 드러났다.
유독 득점권에서 높아지는 출루율,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MLB 닷컴에서 분석에 나섰다.
“득점권 상황에서 타점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공을 쳐서 인 필드 타구를 만들어야 하죠.”
“그렇습니다.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인 필드 타구를 만들어 내는 선수가 누구죠?”
“리(Lee) 아닙니까?”
“정답입니다. 답이 나왔네요.”
주자를 내보낸 상황에서 투수는 어떤 타자를 가장 까다롭게 생각할까?
홈런을 넘길 수 있는 파워를 갖춘 선수? 볼을 차분하게 골라내는 천리안의 능력자? 둘 다 아니다.
득점권에서 투수가 승부를 피하는 건 당연, 이런 상황에서 타구를 파울 라인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이인영은 그 능력을 보여줬고, 2030 - 2032시즌엔 4할이 넘는 득점권 타율을 기록했다.
세이버 매트릭스에서 타점은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큰 지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마냥 그렇지도 않다.
득점권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선수는 분명 존재하고 이건 통계로 증명이 됐다.
뉴욕이 왜 10년 6억 달러라는 대형계약을 이인영에게 안겨줬겠는가? 클러치 상황에서 투수들이 피하는 타자, 여기서 이미 답이 나온 거다.
그걸 알고도 승부를 택한 오클랜드는 패배를 자초했을 뿐, 이후에도 이인영은 득점권 악마는 실존한다는 걸 증명해 나갔다.
[따악~!!]
“우익수 쪽으로 날아가는 타구!! 잡았고!!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옵니다!! 뉴욕이 추가점을 올리면서 4대 1로 앞서나갑니다!! 이인영 선수는 27경기 연속 타점, 타점 머신의 본능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지금 페이스면 184타점까지 가능하거든요. 물론 이 페이스가 언제까지 계속된다고 보장할 순 없지만, 역대급 시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뉴욕의 개릿 앤더슨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이인영 앞에 손을 내밀었다.
득점권에서 안타는 못 때려도 어떻게든 타점을 만들어 내는데, 이게 정말 무서운 선수 아닌가.
컨택 능력을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니, 뉴욕은 그동안 홈런을 최우선으로 삼고 공격을 이끌었다.
이인영의 스타일은 그 원칙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타격, 그런데도 3할 5푼이 넘는 타율과 홈런 - 타점이 따라온다.
연봉 6천만 달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선수, 시즌이 6월에 들어서면서 타격감은 만개했다.
[이인영 또 안타, 타율 0.363로 상승]
[224안타 – 42홈런 - 178타점 페이스]
소속팀 뉴욕도 56경기에서 41승 15패를 기록, 압도적인 승률을 바탕으로 아메리칸 리그 승률 1위에 올라섰다.
작년과 달라진 건 선수 한명을 보탠 게 전부,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 가능한 건가. 햄스턴 구단주는 기자들 앞에서 7년 전 내린 잘못된 선택을 후회했다.
“당시 국제 스카우터였던 시어도르 시모어 고문은 리(Lee)가 1억 달러를 줘도 아깝지 않은 선수라며 구단 관계자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구단 관계자들은 그 주장을 무시했죠. 그리고 우리는 6억 달러를 주고 그 선수를 다시 사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후회 되십니까?”
“6억 달러를 투자한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선수를 조금 더 일찍 영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뉴욕의 역사는 더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이인영이 미국 나이로 32살이 돼서야 성사된 양 측의 만남, 햄스턴 구단주는 내가 7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구단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 따귀를 때려버렸을 거라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20년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보지 못한 뉴욕 팬들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 이런 비극적인 배경은 이인영의 활약을 더욱 빛내는 영화 속 장치로 작용했다.
“어제 리(Lee) 안타 쳤어?”
“글쎄, 적어도 1루는 밟았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너 야구장 안 간지 얼마나 된 거야?”
“이 멍청아, 삼일 전에 너하고 같이 갔다 왔잖아.”
“그랬었나? 왜 이렇게 오래 된 것 같지? 오늘은 야구장 가야겠어.”
이인영의 활약은 어느 덧 뉴욕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타율 3할 6푼, 출루율 0.450을 넘기는 선수가 출루를 못 했을까.
그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노인네가 10년 6억 달러를 투자했을 땐 뉴욕 팬들도 이게 말이 되냐며 혀를 내둘렀지만 이제는 그 가치를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정도, 심지어 신보다 낫다는 말을 하는 팬들도 나타났다.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 하지만 리는 팬들이 안타와 타점을 요구할 때 그 외침을 외면하지 않지, 그러니까 그 친구를 찬양하라고, 적어도 신보다는 나으니까!!”
점 점 타격의 신으로 굳어져 가는 별명,
4만 3천 관중석을 채운 뉴욕 팬들은 이인영의 타석이 돌아오면 ‘Do you believe in God’을 연호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62, 홈런 23개, 88타점, 홈런과 도루를 제외한 모든 타격 지표에서 메이저리그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전반기에 100타점 채울 기세입니다. 올 시즌 이인영 선수는 유독 먹을 복이 많네요.”
“더 많이 먹어도 상관 없습니다. 타점을 사양하는 선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도 간단하게 1사 주자 2루에서 시작하는 타석, 이인영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초구를 지켜봤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경계심을 높이는 배터리, 그래도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게 스타 아닌가. 뭣보다 날 믿어주는 팬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기로 들어가면 맞는다.’
보스턴의 선발 켄 자일스는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바깥쪽 투구가 더 위험한 타자, 그렇다고 몸쪽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주자가 없다면 승부를 했겠지만 지금은 득점권, 2구도 바깥쪽으로 빠지면서 볼넷을 주더라도 승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
“너는 여기서 실점할 운명이야!!”
“받아들이라고!!”
점 점 높아지는 뉴욕 팬들의 원성, 하지만 켄 자일스는 다음 공도 바깥쪽으로 뺐다.
득점권에선 이인영을 피하는 게 정답, 비겁한 놈이라고 욕을 먹어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