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일단 먹고 본다 (1)
“우리 팀의 캡틴은 마이크 서튼이다.”
이인영 입단식을 앞두고 뉴욕 구단은 논란을 차단했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로 쓴 이번 계약, 뉴욕 현지에서는 이인영이 마이크 서튼을 밀어내고 새로운 주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마이크 서튼은 9년 동안 뉴욕의 안방을 책임진 베테랑,
드래프트 24라운드에 뽑혔으니 뉴욕이 즉시 전력감으로 보고 뽑은 선수는 아니다. 그래도 마이너리그에서 꾸준히 기량을 키웠고 포수라는 입지 덕분에 출전 시간을 늘리면서 기어이 주전 자리를 꿰찼다.
문제는 최근 2년 동안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특히 타격보다 수비의 쇠퇴가 두드러졌다.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그럼 아니라는 거야?!!”
실제로 작년 시즌, 마이크 서튼은 수비 문제로 팀 동료와 말다툼을 벌여 팬들을 실망시켰다.
4년 전만 해도 AL 골드 글러브를 수상한 선수가 투수들의 짐짝으로 전락해 버리다니, 그래도 뉴욕은 마이크 서튼을 포기하지 않았다.
작년 시즌 타율 0.282, 홈런 27개, 84타점을 기록한 선수를 왜 내쳐야 하나. 특히 지명타자로 나선 경기만 따져보면 타율 0.313 - 홈런 12개 – 46타점을 기록, 방망이는 아직 쓸 만한 선수다.
지명타자로 돌리고 4~ 5번에 배치하면 화력은 따라 오겠지, 언론에서 뭐라고 해도 마이크 서튼은 뉴욕을 대표하는 선수, 플레어티 단장과 햄스턴 구단주도 그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올 시즌 뉴욕 팬들은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게 될 겁니다. 뉴욕이 그 친구를 영입한 건 영화의 예고편입니다.”
입단식 참석을 약속한 마이크 서튼은 여론을 통해 이인영을 칭찬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인생이지만 학교 입학 – 취업 – 결혼 등, 이런 특정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이벤트가 발동하려면 일정 조건이 필요한 법, 왜 뉴욕은 지난 24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건가.
이벤트가 발동하기 위한 조건을 채우지 못한 탓, 마이크 서튼은 이인영을 영입했으니 조건은 다 채워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올 시즌 뉴욕의 우승이라는 영화의 주연 배우가 될 겁니다. 저는 뉴욕의 캡틴이지만 주연 배우를 빚내주기 위한 조연이 되길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박힌 돌이 굴러들어온 돌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 하지만 이인영은 뉴욕의 주역이 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뉴욕의 일원이 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나? 그저 돈을 많이 주기에 왔을 뿐, 입단식에서도 그 점을 명확히 밝혔다.
“저는 영화 찍자고 여기에 온 거 아닙니다. 뉴욕의 주역이 될 생각도 없고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저에게 집중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구에선 주역이라는 게 없습니다. 팀원들이 각자에서 제 역할을 한다면 뉴욕이 우승을 하는 날도 올 겁니다.”
뉴욕은 최근 20년 동안 가을야구에서 눈물만 흘렸다.
2013년, 월드시리즈에서 캘리포니아 차저스(현 LA)에게 1승 4패로 탈락
2014년, ALCS에서 보스턴에게 스윕 패
2015년, ALDS에서 디트로이트에게 2승 3패로 탈락
2017년, ALDS에서 클리블랜드에게 1승 3패 탈락,
그 뒤는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최근 24년 동안 뉴욕이 기록한 포스트 시즌 전적은 16승 33패, 돈을 안 쓴 것도 아니고 능력 있는 유망주가 없는 것도 아닌데 가을야구만 되면 처참하게 파괴됐다.
이 비극을 끊기 위해 6억 6천만 달러들 들여 능력 있는 단장과 선수를 영입한 뉴욕, 받은 돈을 생각하면 이인영은 정말 영화 한 편 찍어야 되는 입장이다.
하지만 캐스팅 된 배우는 주연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니, 그럼 돈은 왜 받은 건가. 장난기 섞인 기자의 질문에 이인영은 퉁명스러운 답을 내놨다.
“일단 먹고 보는 거죠. 당신은 10년 6억 달러 준다는데 거절할 겁니까?”
질문을 던진 기자는 할 말을 잃었다.
주는 거 먹었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이인영이 영화를 망치는 먹튀가 되든 영화를 살리는 주연배우가 되든 그건 뉴욕이 선택한 일, 누굴 원망하겠는가.
이번 영입을 주도한 플레어티 단장도 내심 뜨끔했지만 이인영이 먹고 튈 선수가 아니라는 걸 믿었기에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 * *
[유니폼 하루 만에 매진]
[고가 전략 통했다]
이인영을 영입한 뉴욕의 경제적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각 팀 유니폼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뉴욕은 좀 비싼 편, 얼마 전 유명 의류 회사의 로고까지 붙이면서 가격이 더 올라갔다.
현재 이인영의 유니폼은 227달러(세금 제외)에 팔리고 있는데, 현지에서 너무 비싸다는 말이 나왔지만 당일 준비한 400벌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사인을 받으려면 그 선수의 유니폼을 구매하는 게 매너, 미국 현지에서 유명 선수의 사인이 적힌 볼이나 유니폼을 구매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들여야 한다.
일례로 LA의 에이스 킨사이드의 사인볼은 723달러에 팔리고 있다.
유명 선수가 손을 댔다 하면 값어치가 급격히 올라가는 물건, 180달러 유니폼을 사서 사인을 받으면 값이 4~ 5배 이상 올라간다.
팬들에겐 딱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 뉴욕의 고가 전략은 멋지게 맞아들었고, 추가로 400벌을 더 찍어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찍어내면 나 야구 못합니다. 페이스 조절하세요.”
이인영은 구단에 항의를 표했다.
그렇게 비싼 옷을 사준 팬들의 사인 요청을 어떻게 거절하나.
400명에게 사인을 해주는 것도 큰일인데 400장을 또 찍어내다니, 본전을 너무 빨리 뽑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햄스턴 구단주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유니폼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득이지’
남들이 비싸다고 투덜거릴 때 유니폼을 사둔 팬들은 환호성을 외쳤다.
이래서 투자는 과감해야 하는 법,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이인영은 훈련장을 오가며 팬들의 사인 요청에 응했다.
“이거 어디서 구했어요?”
“한국에서 직구했어요.”
“죄송하지만 이거 제 이름 아니에요.”
머리를 쓰는 팬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오클랜드나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내밀고 사인을 요청해 봤자 뉴욕 관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사인을 받기 위해 성운 라이온즈 유니폼을 공수해오는 팬들도 등장, 그런데 미국인들이 한글을 잘 모르는 걸 악용해 ‘이’씨 성이 붙은 유니폼을 속여 파는 사기꾼들도 등장했다.
이영우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런 걸 내 이름이 박힌 유니폼으로 알고 구매한 팬들, 기막힌 현실에 이인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공인구 사오시면 거기에 사인해 드릴게요.”
“이거 당신 이름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건 이영우라는 선수 유니폼이에요. 여기에 사인 받아도 좋으시다면 해 드릴게요.”
“맙소사!!”
사인 하나 받겠다고 해외에서 직구까지 하는 팬들, 그냥 구단이 400벌 더 찍어내게 내버려 둘 것 그랬나.
어쨌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뉴욕 구단은 팬들에게 성운 라이온즈 유니폼 구매를 자제할 것을 부탁했다.
시즌은 개막도 안 했는데 유니폼 사태로 뉴욕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의 위상, 이인영은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으며 메이저리그 7년 차 시즌을 맞이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시범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5년 하고도 반시즌, 그리고 오클랜드를 거쳐 뉴욕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인영 선수가 한국에서 커리어를 마감하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10년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은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네요.”
“10년 6억 달러 아닙니까. 고향이 그리워도 여기서 10년 다 채워야죠.”
잊을 만하면 입에 오르내리는 공룡계약,
중계진이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동안 이인영은 초구를 골라냈다.
“6억 달러 받으면 어떤 기분이야?”
“너보다 4배는 더 좋은 기분이지.”
포수 마스크를 쓴 산체스는 옛 동료와 잡담을 나눴다.
산체스는 작년까지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었지만 FA로 풀리면서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게 됐다.
계약 규모는 6년 1억 5천만 달러, 나쁘지 않은 조건인데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나면서 묻혀버렸다.
내 입장에선 2억 달러도 엄청난 계약인데 6억 달러라니, 산체스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간 옛 동료에게 장난을 걸었다.
“대형 계약 맺은 기념으로 몸에 맞는 볼 하나 선물해 줄까?”
“그래라, 부상 당해도 돈은 나오니까.”
뉴욕 구단 관계자나 팬들이 들으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내용, 하지만 대화의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은 안 난다.’
2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먼 곳을 응시했다.
메이저리그 진출할 때 6년 54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는데, 올해 받는 연봉이 6천만 달러, 인생이 이래도 되는 건가.
그동안 받은 연봉도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꽤 많은 돈이지만 이제부터 벌어들이는 수입은 그 정도가 아니다.
참고로 이번에 상향 조정된 마이너리거 평균 연봉이 8천 달러, 그동안 잘 몰랐지만 빈부격차라는 게 뭔지 조금은 실감했다.
‘그래도 일단 먹고 본다.’
결과는 우중간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뉴욕이 선취점을 올렸다.
작년보다 매끄러워진 득점의 연결 고리, 뉴욕의 개릿 앤더슨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뛰어? 말아?’
하지만 다음 타자 마이크 서튼 타석에서 형편없는 주루플레이가 나왔다.
서튼은 3구를 잡아당겼지만 내야를 겨우 벗어난 타구, 3루 주자 스캇 험프리는 주춤거리다 제 자리로 돌아갔다.
더 놀라운 건 3루 코치도 아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 이인영은 1루 코치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아무도 뛰라고 하지 않는 거죠?”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을 잡을 때 2루수 왼발이 떨어졌잖아요. 저런 자세에선 홈 송구 못해요.”
내야 플라이가 나왔지만 충분히 홈으로 뛸 수 있었던 상황, 실제로 2루수는 포구 후 중심을 잡느라 넘어질 뻔했다.
3루 주자 스캇 햄프리가 너무 일찍 귀루해버리는 바람에 추가 득점이 무산된 것, 이런 걸 잡아주는 게 코치들의 역할 아닌가.
한 마디로 당신들은 일 안 하고 있다는 뜻, 타격만 잘 한다고 강팀이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사소한 기회도 놓치지 않아야 득점을 하고 이기면서 강팀이 되는 것, 이인영은 세심하지 못한 뉴욕의 플레이에 실망했다.
다음 타자가 병살타를 치면서 뉴욕의 1회 초 공격은 1득점으로 종료, 이인영은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너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 … 그런 것 같아.”
스캇 험프리는 순순히 실책을 인정했다.
본인도 야구 선수인데 주루 플레이의 기본을 모르겠나. 귀루를 한 게 나쁜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상황에 집중하지 않은 게 문제,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짚어주는 사람이 팀에 있었던가.
코치들도 경기에 좀 더 집중했다.
“뛰어!! 뛰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코치들, 선수들의 자세도 좀 더 진지해졌다.
시범경기가 아니라 실전 같은 분위기, 다들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자들 아닌가.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건 죄, 이인영은 이후에도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며 선수단 분위기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