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there is no bargain (9)
“당신 몸에 검고 뜨거운 것 좀 넣어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봤지.”
“그래서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커피는 벌써 마셨다고 하더라고”
“맙소사, 그건 네가 차인 거야 멍청아.”
“아니지, 그 여자가 커피 마시자고 오해한 걸 수도 있잖아.”
이곳은 오클랜드 클럽하우스, 선수들은 경기를 앞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겼다.
하지만 이인영은 혼자서 먼 곳을 바라보거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할 뿐, 선수들과 말을 섞진 않았다.
실력은 확실한데 붙임성이 약간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필라델피아에서도 저랬는지 오클랜드 선수들은 눈치만 살필뿐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너도 내가 차였다고 생각해?”
이때 눈치를 살피던 다비드 블루포드(3루수)는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에 나섰다.
바에서 만난 여자와 가볍게 하룻 밤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돌아온 답은 커피는 벌써 마셨어요. 이건 내가 차인 걸까 아니면 여자가 질문을 잘못 이해한 건가.
차인 걸 뻔히 알면서도 동료들을 웃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겠지, 잠깐 망설이던 이인영은 나름대로 답을 해줬다.
“그 여자 말고 나한테 집중해 보는 게 어때?”
“뭐라고?”
“나 정도 되는 선수가 너희들하고 이렇게 어울려 줄 시간이 또 있겠냐?”
이인영이 트레이드 됐을 때 오클랜드 여론은 난리가 났다.
구장 보수도 제대로 못 하는 팀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를 데려오다니, 찔러봐도 안 넘어올 여자를 꼬드겨서 집까지 데려온 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이 잠깐의 동거에서 결과는 확실히 내야 될 것 아닌가. 의미심장한 질문에 블루포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넌 너무 비싸, 내가 단장이라도 안 살 거 같아.”
“말은 똑바로해야지. 살 마음은 있는데 노력도 안하고 포기하는 거 아냐?”
10년 계약은 너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그럼 기간은 줄이고 연봉을 높이는 대안도 있다.
결국 다들 날 살 마음은 있는데 문제는 돈 아닌가.
돈이 없으면 최소한 성의라도 보여야지, 넌 너무 비싸다고 욕만 하면 어느 선수가 마음을 열겠나.
미녀 앞에서 ‘당신은 아름답지만 다가가기엔 너무 부담스러워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 이인영은 그런 배짱 없는 놈들에겐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다.
“너 그 여자가 커피 벌써 마셨다고 했을 때 어떻게 했어?”
“그야 뭐 … ”
“됐다. 내가 괜한 말을 했다. 안 봐도 뻔한데 말이야.”
제대로 한 방 먹은 블루포드는 유구무언, 한 선수의 희생 덕분에 클럽하우스는 활기를 띄었다.
오늘 상대할 팀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뉴욕, 미리 보는 ALCS라는 평가를 받는 경기라 여론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자, 오늘 뉴욕은 리차드 케이시를 선발로 내보냅니다. 올 시즌 21경기 등판 7승 8패 평균자책점 3.88, 116이닝 동안 볼넷 46개, 탈삼진은 98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뉴욕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륵이죠.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햄버거가 나온 꼴입니다.”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노골적인 해설을 이어갔다.
4년 전 뉴욕과 8년 3억 1천만 달러 계약을 맺은 리차드 케이시, 첫 시즌은 20승 9패, 평균자책점 2.54로 활약 했지만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5이닝 6실점을 허용하고 무너졌다.
그 다음 시즌은 부상으로 절반을 날려 먹었고, 성적도 올스타와 거리가 먼 수준, 대형 계약 3년 차 시즌 때도 홈런을 33개나 맞고 평균자책점 4점대를 찍었다.
올 시즌 4천만 달러를 받는데 성적은 그냥저냥 괜찮은 투수, 고작 이런 선수에게 3억 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은 건가.
트레이드를 하려고 해도 연봉 보조를 많이 해 줘야 되고, 뉴욕은 울며 겨자 먹기로 케이시를 써야 하는 입장, 돈은 돈대로 쓰면서 우승을 못 하는 행보에 뉴욕 팬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우승이 고픈 건 오클랜드도 마찬가지, 양 팀은 1회부터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오~ 다시 몸 쪽이군요. 리틀 선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케이시 선수의 문제점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제구력이죠. 벌써 10년 차인데 고쳐지질 않습니다.”
리차드 케이시는 메이저리그 직행을 조건으로 뉴욕과 계약을 맺었다.
평균 98마일, 최고 103마일까지 던지는 우완 파이어볼러, 덕분에 빠르게 자리를 잡았지만 제구력은 언제나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다른 유망주는 마이너리그를 거치면서 제구력을 가다듬지만 그 과정이 생략된 케이시는 구단 정책에 따라 투구 수 제한을 받았다. 한 게임에 던질 수 있는 공은 80~ 90개 정도, 이것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온 경기가 더 많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경기가 잘 안 풀리면 흥분해 버리는 멘탈적 문제도 지적, 어쨌든 케이시는 2년 차 시즌에 14승 9패,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하며 뉴욕의 1선발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들쑥날쑥한 제구 때문에 구위와 별개로 안정성은 떨어진다는 평가, 오늘 경기도 다르지 않았다.
따악~!!
가운데로 몰린 공, 구속은 96마일을 찍었지만 토드 리틀은 2루수 옆으로 빠져나가는 안타를 기록했다.
출발이 좋은 1회, 다음 타자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타율 0.354 - 홈런 35개 - 90타점을 올리고 있는 특급 타자, 구위에 자신이 있는 케이시는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하라면 해야지 뭐’
포수 마스크를 쓴 알렉스 말레도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케이시는 짧은 인터벌로 타자를 몰아붙이는 유형, 사인을 많이 내는 포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투구 방식이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지난 8월 11일 경기에서도 5이닝 4실점을 하며 무너졌다. 투심을 조금 섞어줘도 괜찮을 텐데, 하지만 케이시는 자기 고집을 밀고 나갔다.
“음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케이시 선수가 포심과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나머지 구종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거든요. 체인지업이나 투심이 기본만 해줬어도 200탈삼진은 쉽게 잡을 선수인데, 보시다시피 구위에 비해 삼진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저는 케이시 선수의 부진이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패스트볼을 던지는 게 죄가 아닌데, 여론에서 너무 뭐라고 하는 게 아닌지 … 그런 생각도 드네요.”
임선우 위원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내놨다.
뉴욕의 투수진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적은 패스트볼을 던진다.
패스트볼이 홈런을 맞을 비율이 높다는 게 그 이유, 통계를 살펴보니 패스트 볼 100개를 던지면 평균 0.17점을 손해 보는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슬라이더나 커브는 나란히 구종가치 1, 2위를 기록, 통계만 따지면 패스트볼을 던지는 건 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건 타자들이 변화구에 배트가 따라 나왔을 때 적용되는 통계, 오클랜드 타선은 메이저리그에서 변화구를 제일 잘 골라내는 팀이다.
이런 팀을 상대로 빠른 볼을 줄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케이시는 투심을 버리고 포심 위주의 투구를 이어갔다.
‘배짱도 좋군.’
이인영은 4구를 잡아당겨 우익수 앞에 떨어트렸다.
네 개가 모두 빠른 볼이라 타이밍을 잡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 후속 타선이 범타로 물러나며 선취점을 내지 못 했지만 오클랜드는 특유의 21구를 끌어냈다.
빠른 볼 위주의 투구는 더 많은 체력을 소모, 3회 초부터 케이시의 구위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따악~!!]
“밀어낸 타구가!! 2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가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오클랜드가 다비드 블루포드의 적시타로 9경기 연속 선취점을 기록합니다!!”
“정말 도깨비 같은 팀입니다. 지금 타선에 이인영 선수를 제외하면 그렇게 대단한 타자도 없거든요. 없는 살림에서 최대의 결과를 끌어내고 있네요.”
6회까지 4대 0 리드를 잡은 오클랜드,
보이스 감독은 리차드 바티아 – 마이클 알바레도 – 루이스 마르케스로 이어지는 불펜진을 동원해 나머지 이닝을 틀어막았다.
오클랜드는 선발진도 대단하지만 이 세 명이 지키는 후반부는 말 그대로 통곡의 벽, 4점차면 선발투수를 좀 더 지켜볼 법도 한데, 인정사정 없는 불펜투입은 뉴욕의 추격의지를 꺾어버렸다.
“너무 불펜진을 혹사시키는 것 아닙니까?”
경기가 끝난 후, 뉴욕 기자들은 보이스 감독을 붙잡고 시비를 걸었다.
작년 시즌도 정규시즌에 불펜을 남용하다 ALCS에서 피를 보지 않았나.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보이스 감독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을 내놨다.
“저는 오클랜드에서 4년 째 감독을 하고 있지만, 올해처럼 투수진이 탄탄했던 적은 없습니다. 이런 자원을 활용하지 않는 것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쓸만한 불펜 투수가 없는 뉴욕에 비하면 저희 사정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패스트볼이 홈런 맞을 위험이 높다고 못 던지게 하는 바보들이 어디에 있나?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꼴, 보이스 감독의 인터뷰가 논란에 불을 붙이면서 뉴욕 진영에 변화가 일어났다.
2차전부터 투수들의 패스트볼 비율이 늘어난 것, 빠른 볼에 강점이 있는 이인영은 그물 속으로 뛰어드는 물고기를 놓치지 않았다.
[따악~!!]
“이번에는 우측으로 날아갑니다!! 계속 날아 원 바운드로 펜스를 때리는군요!!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득점!! 이인영 선수는 오늘도 멀티 히트 게임입니다!!”
“이러면 5대 1인데, 오클랜드 불펜진을 고려하면 끝난 경기네요.”
메이저리그 평균 득점 3위를 달리고 있는 뉴욕의 창은 오클랜드의 방패를 뚫진 못했다.
2경기에서 낸 득점은 6점, 반면 투수진이 10점을 내주면서 스윕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후반기에 25승 10패를 기록하고 있는 오클랜드, 특히 이인영을 영입한 이후의 성적은 18승 5패로 더 좋다.
주자가 쌓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려줄 선수가 없었는데, 비어있던 퍼즐 조각이 채워진 것, 오늘도 멀티 히트 포함 2타점을 올린 이인영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오클랜드가 올해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12년을 뛰면서 이렇게 강한 팀은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보이스 감독의 투수진 운용은 아주 인상적이죠. 타격만 조금 받쳐준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내가 부족한 점을 채워줬으니 우승은 틀림없다는 걸 돌려서 말한 것, 이때 한 기자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클랜드는 지금 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팀에 3~ 4년 만이라도 남아준다면 더 많은 역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이기는 팀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승리보다 더 좋은 건 돈이죠. 돈도 많이 받고 이길 수 있는 팀으로 가겠습니다.”
솔직한 답에 기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결국 이 무적의 조합은 올해가 마지막, 오클랜드 팬들도 올해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