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there is no bargain (6)
[이곳에서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어.]
트레이드 루머가 사실로 드러나자 필라델피아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팬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만 그건 선수단도 마찬가지, 특히 이인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스 브런들은 SNS를 통해 개인적인 심정을 밝혔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해 봐, 월드시리즈 우승도 했고 지난 6년 동안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함께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어,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아마 팬들도 나와 같은 심정일 거야. 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겠어? 나는 널 진심으로 존경하고 앞으로도 내 형제처럼 대하고 싶어.
정말 만약이지만 네가 우리 곁을 떠난다고 해도 언제나 건강하고 예전처럼 활약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동료 선수가 아니라 연인에게 보내는 프로포즈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 건 왜 일까.
브런들의 SNS를 확인한 팬들도 차라리 청혼을 하라며 부추겼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브런들은 내용을 비공개처리했지만 이미 내용은 저 멀리 퍼져나갔다.
“어이~ 꽃다발은 안 준비 했냐? 약혼반지는?”
“그만해!!”
다음 날 클럽하우스에 출근한 브런들은 동료들의 놀림을 받았다.
그 녀석이 떠나는 게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런 글을 올렸을까.
하지만 서운한 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그래서 브런들을 놀려 대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렸다.
“온다!!”
“맙소사!! 저리 비켜!! 나 숨을 거야!!”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만남,
평소보다 약간 늦게 출근한 슈퍼스타는 클럽하우스를 뒤집어 놨다. 브런들은 급히 샤워실로 숨었고, 그 사이 이인영은 무슨 일 있었냐는 얼굴로 클럽하우스에 발을 들였다.
“야, 그 자식 샤워실에 숨었어. 데리고 와.”
“때 되면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동료들의 장난에 이인영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내용은 평생을 함께 할 아내에게 쓸 것이지, 왜 나한테 주절거린 건가. 뭣보다 공개청혼 당했다고 그 자리에서 무조건 OK 해야 되나.
분위기에 휩쓸린 연애는 언제나 파국으로 이어질 뿐, 브런들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야, 그런데 너 오클랜드로 가면 문제 있는 거 아냐?”
“실은 나도 그게 제일 걱정이다.”
오클랜드는 월드시리즈 우승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강팀, 이인영도 처음엔 그곳으로 가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정말 그게 원인일까요?”
“예, 일단 제 말씀대로 해보시고, 안 되면 그 때 다시 원인을 찾아보죠.”
1년 전, 이인영은 눈이 침침한 문제로 의사와 상담을 나눴다.
나이 30에 노안이 온 건 아닐 테고, 혹시 무슨 병이라도 온 건가. 하지만 정말 간단한 문제였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LA – 시카고를 거쳐 홈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치렀는데, 미국 대륙을 관통하는 장거리 일정에 선수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녹초가 됐다.
하지만 홈에서 6연전을 치르면서 그런 증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필라델피아는 동부지구에 위치한 도시, 거기다 메이저리그 팀이 거의 다 동쪽에 몰려 있다. 당연히 이동거리는 짧은 편, 이인영이 필라델피아에서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건 짧은 이동 거리도 한 몫했다.
하지만 오클랜드는 다르다.
작년 시즌, 오클랜드 – 산호세 – 애리조나 - LA 등 태평양에 인접한 서부지구 팀은 모두 4만 km가 넘는 이동거리를 기록, 그 중에서 오클랜드는 4만 8천 킬로미터를 찍었다.
2만 3천 km에 불과했던 필라델피아에 비하면 무려 2배가 넘는 이동거리, 거기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연봉보조 문제로 문턱에 걸린 트레이드, 무산 되면 팀이 손해지 내가 손해 보는 건 아니다.
올해는 이곳에서 시즌을 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태도로 경기에 임했다.
‘잘 잤네.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아.’
그라운드에 나선 이인영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다른 건 까다롭게 굴지 않지만 수면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 원정게임을 나갈 때 다른 선수들은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카드를 치지만, 이인영은 잠을 택했다.
어떻게 잤느냐에 따라 그날 공이 달라 보일 정도, 가벼운 몸으로 더그아웃을 어슬렁거렸다.
“거기 아가씨, 오늘 시간 좀 있으신가?”
때맞춰 등장한 브런들, 이인영은 평소 시답지 않은 장난은 치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가드를 내렸다.
“미안한데 어제는 내가 실수한 거야. 없었던 일로 해 줘.”
“왜? 아주 눈물에서 폭포가 흐를 정도의 문장이던데”
민망한지 얼굴을 돌려버리는 브런들, 이인영은 그 옆구리를 푹 찔렀다.
“내가 떠나면 네가 이 팀의 일인자다.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같은 팀에 있는데 일인자 이인자가 무슨 소용인가. 브런들은 뚱한 표정을 지었고 이인영은 아부를 이어갔다.
“솔직히 올해는 네가 나보다 낫잖아. 너야말로 필라델피아의 영웅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브런들은 후반기에 무서운 타격감을 선보이며 현재 타율 0.330, 홈런 22개를 기록하고 있다.
타율 0.314, 34홈런을 기록한 작년이 커리어 하이인줄 알았는데 올해는 더 가파른 상승세, 세부성적을 따져보면 더 대단하다.
작년 시즌, 세스 브런들은 승률기여도(WPA) 플러스 6.2를 기록했는데 홈런을 맞은 팀의 기대 승률이 50%에서 40%로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홈런을 맞은 투수는 0.1승을 손해 보고, 홈런을 친 타자는 0.1승을 적립하겠지. 브런들이 6.2를 기록했다는 건 팀 기대 승률을 6.2% 높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떨까. 브런들은 8.73의 기대 승률을 기록, 이인영이 7.8로 그 뒤를 잇고 있다.
눈에 띄는 성적만 놓고 보면 이인영이 한 수 위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활약만 보면 브런들이 팀 승리에 조금 더 기여한 건 사실이다.
물론 이건 이인영이 2번에서 브런들을 지지해주고 있는 것도 한 몫 했겠지, 브런들은 네가 있으니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거라고 답했다.
“네 실력이 발전한 거지 내가 무슨 도움을 줬겠냐.”
“아니야. 네가 있으니까 내가 마음 놓고 칠 수 있는 거라고”
“야, 저리 가서 말해. 눈꼴 사나우니까.”
보다 못한 산체스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선수는 필라델피아 타선을 이끄는 핵심, 그건 인정했지만 네가 더 잘났다고 공을 넘기는 꼴은 눈 뜨고 보기 어려웠다.
최강논쟁은 언제나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 올 시즌 필라델피아 최고의 타자는 누가 될 것인가.
올 시즌 유독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는 산체스는 그 논쟁에 자기가 끼어들길 바랐다.
그런데 네가 서로 최고라고 띄워주고 있는 녀석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이인영은 그런 산체스의 속마음을 알아챘다.
“내가 올해의 실버슬러거 맞춰볼까?”
“뭐?”
“포수 부문은 굿윈이 받을 거야.”
이 발언은 산체스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작년 시즌 산체스는 35홈런을 터트렸지만 애리조나의 알렉스 굿윈에게 실버슬러거를 빼앗겼다.
산체스도 잘 해줬지만 타율이 너무 낮았던 게 흠, 알렉스 굿윈은 타율 0.288, 31홈런, 88타점을 기록하며 밸런스 있는 공격력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올 시즌은 어떨까.
산체스는 타율 0.288, 25홈런, 알렉스 굿윈은 타율 0.307, 23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접전, 그래도 전문가들은 밸런스가 잡힌 굿윈에게 영광이 돌아갈거라고 예측하고 있다.
마침 오늘 필라델피아가 상대할 팀은 애리조나, 산체스도 은근 신경이 쓰이겠지.
정곡을 찔린 산체스는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너처럼 상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야. 누가 받든 상관없어.”
“그런데 왜 입술이 부르르 떨리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떨려버린 산체스, 왜 저 자식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가. 한 방 먹은 산체스는 구석에서 말없이 장비를 착용했다.
1회 초 애리조나의 선공으로 시작하는 경기, 필라델피아 홈 팬들은 사방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나는 이 트레이드 반대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급해도 심장은 팔면 안 된다. 필라델피아는 지금 심장을 뽑아내는 짓을 하고 있다]
이인영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목소리, 호이싱튼과 리치아디가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똑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뭘 먹느냐에 따라 만족감은 다른 법,
팬들은 1억 4천만 달러 짜리 메인 메뉴(호이싱튼)에 딸려오는 디저트(리치아디)보다 5억 달러 짜리를 원했다.
필라델피아가 투수진 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는 건 사실, 그렇다고 리치아디 하나 얻자고 이인영을 트레이드 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팀에 그런 주문을 넣은 적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봉보조 문제로 트레이드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은 고민을 안고 경기를 관람했다.
선발 야쿠보우스키는 첫 두 타자를 잡아내며 산뜻하게 출발, 문제의 그 선수가 등장했다.
“자, 이제 알렉스 굿윈의 타석입니다. 올 시즌 타율 0.307 - 홈런 23개 – 70타점, 뛰어난 공격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야쿠보우스키 선수가 올 시즌 1회 피홈런이 유독 많거든요. 이 위기를 잘 넘어가야 겠습니다.”
이제는 언급하기도 지겨운 1회 징크스, 도망쳐서 뭘 어쩔 건가.
굿윈도 최근 유행에 맞춰 바깥쪽 공을 밀어치는 타격을 하고 있지만 필라델피아 배터리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딱~!!
“와아아~!!”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이인영이 타구를 낚아 챈 것, 빠졌다면 최소 2루타라 야쿠보우스키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건 산체스 포수도 마찬가지, 라이벌의 안타를 하나 지워낸 거 아닌가.
경기 전 내 심기를 건드렸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실버슬러거를 수상하길 원하겠지, 지난 일은 다 잊어버렸다.
“이봐!! 팀 동료랑 바람나지 말라고!!”
이어지는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 팬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브런들을 향해 놀림 섞인 축하를 보냈다.
2년 전 첫 아이를 유산으로 잃은 브런들, 뇌를 빼고 다니는 멍청이 때문에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불행은 또 다른 축복으로 씻어내는 법, 얼마 전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브런들은 팬들에게 많은 응원과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SNS에 그런 말을 남긴 건가. 어쨌든 브런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따악~!!]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 … 좌익수는 뒤로, 계속 뒤로!! 담장을 넘어 갑니다!!!! 솔로 홈런!! 세스 브런들의 시즌 22호 홈런이 터집니다!!”
“지금은 낮고 빠른 타구였는데, 마지막까지 포물선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브런들 선수가 올 시즌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는 한 방이네요.”
후반기 들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타격 페이스,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베이스를 통과한 브런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친구와 손을 맞부딪쳤다.
단언컨대 필라델피아 역사상 최강의 콤비, 이 역사에 남을 콤비가 멍청이들 때문에 해산되는 건가.
팬들의 시위에 응하듯 이인영도 바깥쪽 높은 공을 밀어냈다.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시즌 31호 홈런, 필라델피아 구단관계자들은 결단을 내렸다.
“5억 줘 버려, 더 끌어봤자 의미 없겠어.”
“알겠습니다.”
필라델피아는 1회가 끝나기도 전에 오클랜드 구단에 트레이드는 없었던 일로 하자는 통보를 보냈다.
오클랜드 구단은 이에 반발, 연봉조정은 사무국에 관련 자료만 제출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이건 일방적인 계약 파기라고 반발했지만, 필라델피아는 일방적으로 모든 논의를 백지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