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there is no bargain (3)
[필라델피아 로버트 필, 옷 잘 입는 선수 1위 등극]
3월 28일, 개막을 앞두고 한 패션잡지는 팬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스프링캠프를 오가는 메이저리거 중 누가 가장 옷을 잘 입었냐는 것,
로버트 필은 풍성한 금발 머리와 잘 다듬어진 턱수염 그리고 194cm의 훤칠한 키와 근육질 몸매 덕분에 예전부터 팬들로부터 미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여기에 후디와 트레이닝 팬츠를 중심으로 한 편안한 옷차림부터 중후한 패션까지 어떤 것도 잘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인영은 1위부터 20위까지 어디에도 끼지 못했고 워스트 쪽에 이름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스타일 자체가 나쁘다는 평가는 받지 않았다.
컬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악세서리를 하면 옷을 잘 입는 줄 착각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런 유형에는 끼지 않은 것, 다만 스타일 자체가 너무 똑같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이인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신은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똑같은 청바지를 입고 출근을 하더군요. 그 브랜드를 좋아하는 겁니까?”
“네, 몇 번 입고 버리기 딱 좋으니까요.”
질문을 던진 기자는 경악했다.
이인영이 스프링캠프 동안 입고 다는 청바지는 기본 600달러는 넘어가는 명품이다. 같은 옷만 계속 입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몇 번 입고 버리는 거였나.
물론 농담으로 하는 말, 이인영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일관된 패션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했을 때 전문가들은 물론 팬들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2할 8푼에 20홈런만 쳐줘도 훌륭하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팬들은 이제 제가 3할 5푼 이상에 30홈런은 기본으로 해주길 바라죠. 그리고 저는 지난 5년 동안 꾸준한 성적으로 그 기대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패션도 마찬가지죠. 사람이 가끔 변화를 주는 것도 좋겠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스타일이 제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하고 다닐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상관 없습니다.”
성적이든 패션이든 올해도 일관성을 유지하겠다는 뜻,
이 인터뷰에 감명을 받은 청바지 회사에는 이인영을 광고 모델로 채용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지난 72년 동안 꾸준하게 사랑을 받은 의류 회사, 가끔 불황도 겪었지만 지금까지 브랜드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품질에 대한 고집과 신념 덕분이었다.
그건 이인영도 마찬가지, 스윙이 너무 퍼져 나온다. 빠른 볼에 대응하기 어려울 거다. 데뷔 때부터 온갖 참견이 날아들었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난 5년 동안 꾸준하게 성적을 냈다.
우리 회사의 이미지와 딱 맞는 선수, 덕분에 이인영은 작년에 이어 광고 계약을 하다 더 추가했다.
하지만 이건 앞으로 맺을 계약에 비하면 잔챙이에 불과, 이 이상의 외도는 하지 않았다.
“자!! 이인영 선수가 2032시즌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397, 홈런 38개, 130타점!! 2년 연속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이 선수 만큼 꾸준했던 선수는 없었습니다. 올해도 팬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3할 5푼 이상은 쳐줄 거라는 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못 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이제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졌습니다.”
올해부터 이인영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2번으로 자리를 옮겼다.
2번 타자로 나섰다면 30타석은 더 들어설 수 있었겠지, 당연히 40홈런도 넘겼을 거다.
FA를 앞둔 선수에게 30홈런과 40홈런은 차원이 다른 영역,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을 2번에 배치해 구단을 압박했다.
‘얼른 계약 제시 안 하고 뭐해?’
저 선수는 대체 불가능한 전력, 40억 달러가 넘는 중계권 계약도 맺었는데 구단은 뭘 꾸물거리는 건가.
그 중 10%가 조금 넘는 돈을 투자해도 충분한데 아직도 반응이 없는 구단, 필라델피아 팬들도 구단의 신속한 행동을 촉구했다.
[이인영, 타율 0.356, 홈런 6개 17타점]
[FA 대박 위한 예열 마쳤다]
눈 깜짝 할 사이 흘러간 한 달, 이인영은 통산 10번째 월간 MVP를 놓쳤지만 통산 31번 째 이 주의 선수를 차지하며 변함없는 활약을 예고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계약, 버티기 싸움에서 백기를 든 필라델피아는 에이전트 제프 메츠에게 7년 3억 4천만 달러를 제시했다.
연평균 5천만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계약, 하지만 제프 메츠는 계약 기간을 들려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나이로 31살 밖에 안 된 선수에게 7년 계약은 조금 짧은 것 아닌가. 기간을 좀 더 늘려달라고 요구했지만 필라델피아 구단은 그렇다면 평균 연봉을 줄일 수 밖에 없다는 답을 내놨다.
‘우리야 아쉬울 것 없지.’
제프 메츠 에이전트는 이번에도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뉴욕의 사장 시어드로 시모어는 구단주에게 지원 받은 6억 달러를 왜 쓰지 않았을까. 시장에 마땅한 매물이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대물을 낚기 위해 미끼를 아껴뒀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젠 우리도 정면승부다.’
제프 메츠는 필라델피아 구단과 나눈 협상을 여론에 공개했다.
선수 쪽이 구단에 요구한 액수는 9년 4억 5천만 달러, 작년 11월 스페인 리그의 축구 선수 알렉산더 파우스트가 소속 팀과 연봉 330억 원에 재계약했다.
하지만 이것도 MLB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 이인영은 구단에 9년 5400억원 규모 계약을 요구했다.
정말 성사된다면 유럽 최고의 슈퍼스타가 맺은 계약을 전 세계 22위로 밀어내버리는 계약, 이인영을 좋게 보는 필라델피아 팬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과하다는 것, 하지만 이인영은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협상의 여지는 없을 겁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간 협상, 어떤 진전도 없이 전반기가 흘러갔다.
이인영은 타율 0.344 - 홈런 27개 - 63타점의 변함없는 활약, 반면 필라델피아는 작년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을 거뒀다.
43승 43패로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2위, 와일드카드 싸움은 산호세에 7경기 뒤처져 있다.
결단이 필요한 상황, 필라델피아 구단은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후반기에 팀이 극적으로 반등할지 누가 아나. 7월 30일까지 남은 시간은 2주, 이인영도 팀 반등에 최선을 다했다.
아직은 필라델피아 선수, 내년에 안 볼 사이라고 적당히 하는 게 프로의 자세인가. 더 나아가 FA 대박이 걸린 시즌, 한 타석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 * *
“자, 필라델피아가 후반기 첫 경기를 치릅니다. 1회 초 샬롯 머스키티어스의 공격, 로키 넬슨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79 – 12홈런 – 3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쿠보우스키 선수가 올 시즌 피홈런이 너무 많거든요. 지금까지 116이닝 동안 26개를 맞았는데, 그 중 9개가 1회에 나왔습니다. 본인도 의식을 하고 있을 거예요.”
어느 때보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 게임, 마운드에 오른 야쿠보우스키는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올 시즌 기록은 24경기 등판 6승 5패 평균자책점 6.08, 작년 시즌 에이스 노릇을 했던 그 선수가 맞나.
그나마 이것도 시즌 초에 비하면 나아진 성적, 첫 6경기에서 4경기를 조기 강판 당했고 평균자책점은 8.48을 찍었다.
이후 페이스를 되찾나 싶었지만 5월 14일, 2이닝 7실점을 하면서 다시 강판, 다음 경기에선 5이닝 6실점을 하고도 승리투수가 됐다.
평균 97마일을 넘나드는 패스트볼은 건재하지만 문제는 체인지업,
원래 야쿠보우스키는 슬라이더보다 체인지업을 더 잘던지는 투수였고, 작년 시즌도 체인지업 덕분에 많은 땅볼을 유도하면서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프로 3년차 시즌에 접어들면서 투 피치 위주의 패턴은 공략당하기 시작했다.
체인지업 구종가치가 17.1에서 0으로 폭락한 게 그 증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슬라이더 비중을 늘렸다.
문제는 이것도 임시방편에 그쳤다는 것, 슬라이더 제구가 흔들리면서 투구 수가 급격히 늘었다. 가뜩이나 선발진이 부족한 팀에서 야쿠보우스키의 부진은 치명적, 오늘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선두 타자 로키 넬슨이 볼넷으로 출루, 다음 타자 버게스는 범타로 물러났지만 3번 타자 빌 스태포드가 좌중간을 넘어가는 투 런 홈런을 터뜨렸다.
2회에도 제이미 호아에게 볼넷을 내주며 불안한 출발, 야쿠보우스키는 다음 타자 데릭 로를 병살타를 이끌어냈지만 볼넷 2개를 내주며 위기를 자초했다.
2회도 안 끝났는데 투구 수는 43개,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홈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따악~!!]
“아~ 이 타구가 라인 안쪽에 떨어지는 군요.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우익수가 꾸물거리는 사이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 … 옵니다 … 스코어 4대 0, 필라델피아는 오늘도 어려운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샬롯 타자들이 변화구는 다 거르고 빠른 볼만 노려 치고 있어요. 빠른 볼이 이렇게 밀려난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닌데요.”
한 이닝에 너무 많은 공을 던지다 보니 벌써 빠진 체력, 마운드로 향한 와이즈 감독은 투수 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더 마운드에 두는 건 팬들은 물론 투수에게도 못할 짓, 야쿠보우스키는 고개를 떨군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작년까지 필라델피아 투수진의 기둥이라는 환호를 받았던 선수가 1년 만에 저 모양 저 꼴이라니, 5년 동안 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인영은 야쿠보우스키의 씁쓸한 퇴장을 말 없이 지켜봤다.
막말로 대형 계약 맺고 저렇게 몰락해 버리면 팀 입장에선 대재앙, 하지만 내가 그런 걸 따져야 하는 입장인가.
모험을 걸어야 하는 쪽은 팀, 나는 쓰임을 받는 입장이라 내 가치만 어필하면 된다.
‘저는 올 해 30줄에 접어들었으니 에이징 커브가 곧 시작될 겁니다. 그러니까 9년 4억 5천만 달러 계약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자신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하겠나.
나를 잘 포장하는 것도 기술, 9년 4억 5천만 달러가 비싸면 안 사면 될 거 아닌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연봉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달라질 건 없었다.
“자, 이제 경기는 필라델피아의 4회 말 공격으로 접어듭니다. 선두 타자는 이인영 선수, 오늘 첫 타석에서는 2루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필라델피아가 팀 평균자책점은 최하위권이지만 타격 만큼은 올해도 대단하거든요. 4대 0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첫 바퀴는 별 일 없이 돌았지만 2번째 바퀴도 그렇게 될까.
하지만 4대 0으로 앞서고 있는 경기, 샬롯 배터리는 과감한 승부를 택했다.
‘내가 이런 타자다. 다들 잘 보라고’
이인영은 2구를 우측 펜스 밖으로 날려버렸다.
428피트를 날아 2층 6열에 처박힌 시즌 28호 홈런, 연장계약을 이끌어내지 못한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은 이 홈런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후반기에 내 타격 페이스가 떨어질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트레이드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별이냐 계약이냐, 구단 관계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