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there is no bargain (1)
[이인영 선수, 한국엔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바빠서 당분간 못 갈 것 같네요.”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
“울어야 돼요.”
10월 27일, 이인영은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인연을 맺은 기자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필라델피아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캔자스시티에게 시리즈 전적 4대 2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르는 건 특별한 일, 정상 근처에서 미끄러진다는 게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패배가 확정된 그날, 이인영은 어느 때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며칠 동안 죄인처럼 칩거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털어낼 때, 그래서 친분이 있는 기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이제 내년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으시잖습니까? 소속 구단과 논의는 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아직은 이렇다 할 논의는 없네요.”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하면서 필라델피아 구단은 변화를 선언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세인트루이스를 잠재운 필라델피아,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 얇은 투수진이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졌다.
타력만으론 우승을 할 수 없다며 투수진 보강을 선언한 필라델피아, 결국 내년에도 이인영에겐 돈을 안 쓰겠다는 것 아닌가. 점점 현실화 되는 이별, 별로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라 이인영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만약 팀을 옮긴다면 어떤 팀을 원하십니까?]
“돈 많이 주는 구단으로 가야죠. 저도 이제 30대 초반이라 지금 아니면 큰 돈 만질 기회가 없어요.”
[하하~ 여전히 솔직하시네요.]
기자는 얼마 전 신뢰할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이인영의 몸값을 두고 계산기를 두들겼는데 엄청난 액수가 나온 것,
22년 전, 볼티모어의 슈퍼스타 로널드 하우저가 뉴욕과 10년 2억 9천만 달러 계약을 맺은 사건이 일어났다.
2억 달러 짜리 계약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 하우저가 맺은 계약은 2031년을 기준으로 해도 역대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고, 당시 화폐 기준을 따져보면 6억 3천만 달러라는 정신 나간 수치가 나온다.
샐러리 캡 제한이 사실 상 없는 MLB,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인영이 지난 5년 동안 거둔 성적은 wRC+197으로 요약 가능, 일반 선수들보다 2배 정도 팀 득점에 기여 했다는 뜻이다. 160만 넘어도 명예의 전당 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197이면 대략 감이 오지 않나.
이인영은 올해 미국 나이로 30살, 한 전문가는 최소 10년을 기준으로 잡고 몸 값을 측정했다.
“리(Lee)의 몸 값은 기록만 따지면 10년 6억 5천만 달러가 적당하다. 문제는 이만한 돈을 투자할 구단이 있느냐는 건데, 아마 현실이 된다면 메이저리그 팬들은 22년 전, 로널드 하우저의 계약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규모, 이인영 한 명을 살 바엔 NBA 구단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현재 NBA 구단의 샐러리 캡 제한은 13억 달러, 리빌딩을 하는 구단도 샐러리캡의 90%를 의무적으로 선수 연봉으로 지출하게 돼 있다.
팀 연봉이 평균에 수렴한 팀은 디트로이트, 올해 약 7억 7천 만 달러를 연봉으로 지출할 예정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6억 5천만 달러면 NBA 구단을 1년 동안 굴릴 수 있는 돈, 이걸 한 선수에게 지불 할 정신나간 구단이 등장할까.
미친 놈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법, 전문가는 또 한 번의 센세이션을 기대해보겠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인영의 행보는 이제 MLB 여론을 쥐락펴락 하는 사건, 시즌을 마무리 한 슈퍼스타는 11월 9일 인천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인영 선수,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략히 한 말씀 해주시죠.”
“당분간 집에서 쉴 겁니다.”
“다른 일정은 없으신가요?”
“운동선수니까 운동해야죠.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패배한 선수가 영웅처럼 행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패배자는 최대한 조용히 사라지는 게 예의, 따라붙는 기자들이 계속 질문을 던졌지만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를 떠났다.
“애기야,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해 봐. 연습 많이 했잖아.”
집으로 돌아온 이인영은 머리카락이 제법 올라온 아들의 배꼽인사를 받았다.
이젠 걷고 이불 위에서 점프까지 한다는 녀석, 매일 집 밖을 돌아다니는 아빠는 그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다.
돈은 잘 벌지만 그것만이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이인영은 아들을 품에 안고 아내와 눈을 마주쳤다.
“나 없는 동안 무슨 큰 일 없었지?”
“있었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심장이 두근두근 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엄마가 잠시 한 눈 팔면 소파, 의자 위에 올라간다는 젖먹이,
얼마 전엔 열려 있던 서랍을 계단 삼아 책상 위를 오르려다 저지당했다. 덕분에 집안 곳곳은 도어 가드와 완충장치로 가득, 잘못해서 떨어졌다간 대형사고 아닌가.
누구 자식 아니랄까봐 한 시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녀석, 아빠는 말썽쟁이 아들과 눈을 마주쳤다.
“너도 높은 데가 좋니?”
이 아빠도 높은 곳에 올라서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았는데 올해는 목표지점에 오르지 못하고 추락, 그에 비하면 아들은 높은 곳이 있으면 일단 오르는 근성을 보여줬다.
성공적이었던 2년 차 인생, 3년 차 인생도 부지런히 성장하라는 말을 건넸다.
“자기는 애기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해야지.”
“높은 곳이 있으면 오르는 건 좋은 자세야. 난 이 녀석의 근성이 마음에 들어.”
이인영은 아들을 품에 안고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키 190이 넘는 아빠 품에 안겨 높은 곳을 날아다니는 아기, 신이 난 젖먹이는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놀아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정도, 그렇게 얼마나 놀아줬을까.
혜진 씨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휴대폰을 남편 앞에 내밀었다.
“에이전트 아냐?”
“그러네.”
혹시 연장 계약 문제?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광고 모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TV 광고 1회, 인쇄 광고 1회, 행사 3회까지 포함해서 총 18억입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 하지만 행사라는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TV 광고는 계약된 날에 찍으면 되고, 인쇄 광고 역시 초상권만 빌려주는 거라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행사, 운동선수라 일주일에 5일은 무조건 운동을 해야 되는데, 저 쪽 사정에 맞춰 주면 스케줄이 꼬여버린다.
행사를 제외하고 TV와 인쇄 광고 계약만 맺을 순 없는 건가.
하지만 광고주가 진짜 원하는 건 행사 쪽이라 협의가 어려웠다.
[수락해 주시면 저희가 계약금 5억 원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글쎄요. 별로 내키는 조건이 아니네요.”
이인영은 미국에서 땅콩 광고 찍고 750만 달러를 받았다.
1년 연봉이 800만 달러인데 광고 한 편으로 1년 연봉을 커버한 것, 그런데 겨우 계약금 5억 원에 내가 움직일 사람인가.
광고 제의를 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런 저런 행사에 끌려 다니고 싶진 않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자기한테 5억은 아무것도 아닌 거야?”
“당연하지. 내 몸 값이 얼마인데”
이인영은 아내 옆에서 한껏 콧대를 세웠다.
남자란 원래 허세를 부리길 좋아하는 동물, 특히 경제적 과시라면 더욱 그렇다.
야생 세계에서도 튼튼하고 가족을 잘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컷이 암컷의 선택을 받지 않나.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 남자에게서 경제적 능력을 빼 면 뭐가 남는가.
내가 속물이라 그런 게 아니라 수컷의 타고난 본성을 따르고 있는 것 뿐, 혜진 씨는 그런 남편 앞에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애기는 내가 볼 테니까 광고 찍는다고 해.”
“싫어. 그깟 푼돈에 이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2차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인영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날 30억을 주겠다는 제안이 날아왔지만 역시 거절, 이어지는 방송출연과 광고 계약도 모두 걷어찼다.
* * *
‘이걸 어디에 쓰지?’
이곳은 뉴욕 고다마이츠 구단 사무실, 시어도르 시모어 사장은 오프 시즌 동안 전력 보강에 총력을 기울였다.
23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한 뉴욕, 팻 햄스터 구단주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선수 영입에 쓰라고 6억 달러를 턱 건네줬는데 이걸 어디에 써야 하나.
요즘은 FA로 풀리기 전에 젊은 선수를 다년 계약으로 묶는 게 유행, 당연히 FA 시장에 나오는 물건도 예전 같지가 않다.
아무리 둘러봐도 매력적인 물건이 없는 시장, 시어도르 사장은 열었던 지갑을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그때 내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시어도르 사장은 6년이나 지난 일을 떠올렸다.
당시 시어도르는 뉴욕 구단의 스카우터로 활동, 이인영을 점찍어 두고 있다가 구단에 보고를 올렸다.
1억 달러를 줘도 못 살 선수라고 극찬 했지만 끝내 각하된 의견, 이젠 1억 달러가 아니라 4~ 5억 달러를 줘야 살 수 있는 선수가 됐다.
그때 영입했으면 싸게 써먹는 거 아닌가.
트레이드를 시도해 봤지만 필라델피아가 포스트 시즌 진출권에 들면서 실패, 아껴뒀다가 내년에 6억 달러를 주고 사 버릴까.
시어도르 사장은 이인영에게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4~ 5년만 전성기를 유지해 준다면 OK, 나머지 돈은 서비스로 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지금 뉴욕의 전력에 이인영까지 추가되면 무서울 게 없다.
작년 시즌 성적은 96승 76패, 보스턴에 4경기 뒤진 2위로 내려앉았지만 와일드카드로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최강이 되기엔 1% 부족한 팀, 그 1%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시어도르 사장은 이인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6억 달러 주지 않았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건가?”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며칠 후, 팻 햄스터 구단주는 시어도어 사장을 질책했다. 돈을 쓰라고 줘도 못 쓰는 친구, 이렇게 답답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열을 뿜어냈다.
“저는 올해는 그냥 이대로 가고 싶습니다. 대신 내년에 FA로 풀릴 그 친구를 잡고 싶습니다.”
“그 친구?”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그 선수 말입니다.”
그제야 팻 햄스터 구단주는 이인영을 떠올렸다.
2년 전 영입하기 위해 팀 유망주를 6명이나 투입했던 그 선수, 하지만 필라델피아가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자 햄스터 구단주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 친구보다는 잭 갈릿이 더 낫다.”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다면 깎아내리는 게 팻 햄스턴의 성격,
잭 갈릿이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이인영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렸다. 하지만 그 시즌에서 이인영은 54홈런을 쳐내며 대폭발, 작년 시즌도 타율 0.397, 38홈런, 130타점으로 날아올랐다.
떠올리면 속만 쓰릴 뿐, 잠시 잊고 있었는데 구단 사장의 충고 덕분에 기억을 되찾았다.
“6억 달러면 잡을 수 있겠나?”
“그 정도 돈을 풀 수 있는 구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희뿐이죠.”
작년 시즌, 뉴욕은 구단 가치 55억 달러를 돌파했다.
23년 동안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지만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최고의 선수는 최고의 팀과 함께해야 하지 않겠나.
어느 구단이 선수 한 명에 6억 달러를 지불할 수 있겠나.
22년 전에도 미친 짓을 실현해 냈던 뉴욕, 미친 짓 한 번 더 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