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너보다는 낫다 (11)
[필라델피아 - 밀워키, NLDS에서 다시 붙는다.]
[버논 빌링스, 제프 야쿠보우스키 격돌]
10월 1일, 정규시즌 마지막 시리즈에서 맞붙은 양 팀의 리턴 매치가 결정됐다.
2년 전,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버논 빌링스는 이후에도 붉은 군단에 강점을 보이며 천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올 시즌 성적은 13승 12패, 평균자책점 2.40,
평균자책점에 비해 승운이 따라주질 않았지만 217이닝 동안 274탈삼진을 잡아내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이에 맞서는 야쿠보우스키는 올 시즌 부상으로 20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8승 5패, 평균자책점 3.38, 133과 1/3이닝 동안 삼진 113개를 잡아냈다.
안정성은 빌링스에 떨어지지만 구위는 뒤지지 않는 수준, 데뷔 시즌에 뛰어난 성적을 거뒀지만 빌링스에 밀려 신인왕 2위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형성된 라이벌 관계, 평균 구속 95마일을 넘나드는 파이어볼러의 맞대결은 여론의 흥미를 끌었다.
“야쿠보우스키는 빌링스를 이글 수 없다.”
“통산 5번 맞대결 했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밀워키 여론은 야쿠보우스키를 자극했다.
야쿠보우스키는 밀워키를 상대로 1승 2패, 평균자책점 3.20을 거두고 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에이스와의 맞대결에서 밀린 게 현실,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빌링스가 워낙 뛰어난 것 뿐이다.
그렇게 남과 비교 당하는 게 선수에게 얼마나 큰 자극이 되는가, 작년 시즌 평균자책점 4.14를 기록한 야쿠보우스키는 올해 한 단계 성장했다.
자신감만 잊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 필라델피아 여론은 야쿠보우스키도 밀리지 않는다며 반격에 나섰다.
‘솔직히 밀리는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인영은 현실을 인정했다.
빌링스는 코너웍을 찌르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스트라이크가 필요할 때 카운트를 잡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96마일이 넘는 공을 경기 후반까지 던질 수 있는 체력까지, 투구 수 관리만 해주면 어지간해서 무너지는 일은 없다.
야쿠보우스키도 최고 102마일 빠른 볼을 던지지만 카운트를 잡는 능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 불리한 카운트에서 빠른 볼을 밀어 넣다 얻어맞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래도 올 시즌 3점대 초반으로 평균자책점을 낮춘 건, 땅볼 비율이 높아진 덕분, 그런데 이건 그만큼 운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217이닝 동안 274탈삼진을 잡아내는 빌링스
133과 1/3이닝 동안 113탈삼진에 그친 야쿠보우스키
위기 상황을 확실히 떨쳐낼 수 있는 투수는 어느 쪽인가.
필라델피아가 1차전을 잡는 확실한 방법은 막강한 타선으로 빌링스를 끌어내리는 것, 밀워키의 마크 보이어 감독은 디비전 시리즈를 위해 빌링스가 마지막 등판을 거르게 했다.
어지간해서는 내려올 일 없다는 뜻, 투수전이 길어지면 어느 쪽이 유리할까. 빌링스를 끌어내리는 게 최선, 다른 길은 없다는 분석을 내렸다.
* * *
“그거 의학적 근거는 있는 소리야?”
[응, 나는 안 되나 봐.]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을 앞둔 10월 2일, 이인영은 한국에 있는 아내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아기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구의 영향을 많이 받을까.
논란은 있었지만 결국 양 쪽의 영향을 모두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아기의 행동은 부드럽고 정서적으로 온화해 지는 편, 그런데 아빠가 상대라면 180도 달라진다.
근육이 한껏 긴장하고 팔, 다리를 아빠 쪽으로 쭉 쭉 뻗는데, 이런 활동이 신체적 발달로 이어진다는 게 증명 됐다.
‘내 아들은 잘 크고 있는 건가?’
이인영은 아들이 살짝 걱정됐다.
아빠가 많이 놀아줘야 신체 발달이 빠르다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머나먼 미국에서 이러고 있으니, 혹시 신체 발달이 또래보다 조금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못 놀아준 만큼 한국에서 많이 놀아줘야겠지. 일단은 눈 앞의 일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꼭 이기겠어.’
한편, 등판을 앞둔 밀워키의 에이스 빌링스는 전의를 불태웠다.
통산 필라델피아 상대 전적은 4승 무패 평균자책점 1.00, 착실하게 타자들을 몰아세웠지만 한 선수만은 무너뜨리지 못했다.
올 시즌 4할에 근접한 기록을 올린 이인영이 그 주인공, 2년 전에도 그 선수에게 맞은 안타 때문에 퍼펙트 게임을 날렸다.
통산 상대 전적은 16타수 7안타, 홈런은 맞지 않았지만 볼넷을 4개나 내주며 어려운 승부를 했다.
삼진을 하나도 잡지 못한 것도 특이 사항, 이인영을 상대할 때는 다른 선수들을 상대할 때보다 힘이 더 들어간다. 팀의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이 최우선이지만, 개인적인 목표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0월 3일, 필라델피아의 홈구장 TNT 파크에서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이 열렸다.
‘내가 이긴다. 너보다는 나으니까.’
1회 초 밀워키의 선공, 야쿠보우스키는 1회부터 전력 투구를 펼쳤다.
1회를 제외한 평균자책점은 2.94, 1회에 약한 걸 의식했는지 100마일을 넘나드는 구속으로 상대를 윽박질렀다.
“오 ~!! 몸에 맞았는데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이 두 선수는 정말 악연이네요. 산체스 포수가 앞을 막아섰습니다.”
알프레도 리먼은 투수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작년 시즌, 7월 25까지 19홈런을 기록하며 순항했지만 야쿠보우스키에게 쇄골을 저격 당해 21홈으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악감정, 올 시즌도 빈볼 시비로 한 판 붙었다.
하지만 이게 야쿠보우스키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알프레도는 언제나 배트 박스 상단 오른 쪽에 자리를 잡는다.
몸쪽에 약점이 있으니, 잘 칠 수 있는 바깥쪽을 집중 공략하겠다는 것, 당연히 몸에 맞는 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본인이 감수한 위험인데, 몸쪽 볼 던진다고 화내면 누가 들어주나. 이인영은 산체스 포수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덤비게 놔 둬!! 우리가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덤비겠다면 받아줄 뿐, 산체스 포수가 앞길을 열어주자 알프레도는 말 없이 1루로 향했다.
덤빌 배짱도 없는 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가. 몸에 맞는 볼이 나왔지만 밀워키 벤치는 별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초반부터 밀린 기싸움, 밀워키의 마크 보이어 감독은 쓴 웃음을 지었다.
투구 수는 조금 많았지만 야쿠보우스키는 실점 없이 1회를 마무리,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빌링스의 구위는 오늘도 건재, 첫 두 타자를 공 5개로 처리하고 호적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기는 아빠를 상대할 때 신체적으로 긴장한다고?’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아내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빌링스는 확실히 날 상대할 때 더 위력적인 공을 던진다. 아빠와 노는 아기가 잔뜩 긴장한 것과 유사한 상황 아닌가.
나와 놀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뿐,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아악 ~!!]
“이 타구는 우중간으로 멀리 날아가 갑니다!! 중견수!! 우익수!! 펜스를 직접 때리는군요!! 이인영 선수는 그 사이 2루까지!! 천적관계를 다시 한 번 증명합니다!!”
“어리네요. 어려요. 슈퍼 에이스라고 해도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포수가 던진 공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는 빌링스, 박한우 위원은 그 모습에 아빠 미소를 지었다.
아빠를 못 이겨서 뿔이 난 아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하긴 저 정도 입지에 올라섰다면 특정 선수에게 약점을 보이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동안 장타는 맞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의 넘어갈 뻔 했던 타구, 자존심이 많이 상했겠지.
여기서 심적으로 흔들리면 어떻게 될까.
빌링스는 다음 타자 루이스 햄까지 볼넷으로 내보냈다.
“자, 이제 산체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46 - 홈런 33개 – 81타점, 2년 연속 30홈런을 넘기면서 공격력을 입증했습니다.”
“산체스 선수가 빌링스를 상대로 18타수 2안타, 삼진만 10개를 당했거든요. 빠른 볼에 밀리고 슬러브에 당하는 패턴을 반복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장면이 반복될지 지켜보시죠.”
초구는 높은 공, 시선을 낮게 두고 있던 산체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치지 못하는 공은 버리는 게 상책, 다음 공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높게 던지면서 시선을 교란하는 게 밀워키 배터리의 패턴, 똑같은 작전에 놀아나지 않았다.
3구도 골라내면서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빌링스는 카운트를 잡는 공을 택했다.
따악 ~!!
“와아아 ~!!”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타구, 2루 주자가 3루를 지나 홈으로 들어오면서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냈다.
정규시즌과는 전혀 다른 전개, 밀워키의 승리를 점쳤던 도박장 분위기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너와 길게 놀아 줄 생각 없다.’
이인영은 2번 째 타석에서도 빌링스를 괴롭혔다.
내가 놀아줘야 할 상대가 저 녀석인가, 다른 아빠 찾아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스윙을 돌렸다.
따아악 ~!!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진 타구는 1층 7열에 앉아 있던 팬이 낚아챘다.
손을 높게 들며 환호하는 남성 팬, 그 뒤를 따르는 홈팬들의 환호성, 연패를 당한 빌링스는 캡을 눌러 쓰며 돌아섰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나을 정도로 치욕적, 빌링스는 데뷔 초부터 좌타자에 약점이 있어 투심과 커브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슬러브만큼 위력적이지 않다는 게 문제, 홈런 한 방에 무너질 만큼 멘탈이 약한 건 아니지만 이 한 방은 조금 따끔했다.
‘아직 2점이다. 구위도 문제 없어.’
그래도 빌링스는 8회까지 7피안타 3실점 투구로 선전했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야쿠보우스키가 빌링스를 압도, 필라델피아는 7이닝 1실점, 9탈삼진 호투를 펼친 야쿠보우스키의 활약을 앞세워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을 잡아냈다.
빌링스를 무너뜨린 이인영도 야쿠보우스키에 밀리지 않는 활약,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전반기에 24홈런을 기록했지만 후반기는 14홈런에 그쳤습니다. 오늘은 첫 두 타석에서 장타를 날리셨는데, 컨디션이 좋았던 겁니까?”
“저는 전반기에 0.372를 치고 후반기에 0.414를 쳤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후반기에 4할을 넘게 친 타자에게 오늘은 컨디션이 좋았냐고 묻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홈런이 안 나오면 컨디션이 나쁜 건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질문, 다음 기자에게 바통을 넘겼다.
“제 눈엔 빌링스가 오늘 따라 필사적으로 투구를 하더군요. 특히 당신을 상대할 때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제가 원하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웃음으로 들썩이는 분위기, 웃음이 가라앉자 이인영은 대답을 이어갔다.
“빌링스는 좋은 투수지만 아직 발전할 부분이 많은 선수죠. 저처럼 강한 상대와 대결을 거듭하다 보면 계속 성장할 겁니다. 아기가 아빠와 놀면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하하 ~지금 빌링스를 도발하는 겁니까?”
“빌링스의 성장을 위해 한 말입니다. 딱히 비하하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여론은 이날부터 빌링스를 아기라고 놀려댔다.
아빠와 놀고 싶겠지만 바쁜 아빠는 할 일이 많다는 말도 추가, 태어나서 이런 굴욕을 느낀 적이 있었나.
빌링스는 이를 갈며 다음 맞대결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