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너보다는 낫다 (10)
[5타수 5안타면 정확하게 4할]
[이인영, 마지막 경기에서 4할 도전 나선다]
9월 28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필라델피아의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을 1번 타자로 기용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현재 이인영은 654타수 259안타, 타율 0.396를 기록하고 있다.
4타수 4안타면 0.3996, 5타수 5안타를 쳐야 가능한 기록,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많은 타석에 서야 승산이 있다.
첫 타석에서 아웃 되면 사실상 도전 종료, 볼넷을 얻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래저래 어려운 일, 이인영은 중도 포기는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첫 타석에서 아웃 됐다고 교체 될 거라면 그날 경기는 안 나가는 게 낫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라델피아 여론은 박수를 보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미 역사에 남을 시즌, TNT 파크는 대기록 달성을 염원하는 4만 2천여 팬들로 북적거렸다.
1회 초 밀워키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자!! 이인영 선수가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96, 홈런 37개, 130타점!! 위대한 도전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159경기에서 259안타를 쳤는데, 안타를 못 친 경기는 14게임 밖에 안 됩니다. 이 외에도 멀티 히트 게임 62회, 4안타를 친 경기도 10게임이 됩니다.”
“8월 이후 성적은 말이 안 나오죠. 8월부터 지금까지 48경기에서 타율 0.447, 다시 말씀드리는데 출루율이 아니라 타율입니다. 8월에는 5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면서 월간 MVP에 올랐죠. 출루율이 4할이 넘는 것도 대단한데 두 달 동안 이런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중계석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인영이 지금까지 거둔 업적을 나열했다. 그래야 실패해도 팬들이 박수를 보낼 것 아닌가.
첫 타석부터 무산되는 도전기, 이인영은 첫 타석부터 강한 스윙으로 팬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지금은 위험했어!!”
“신중하게!! 신중하게!!”
다행히 파울, 홈팬들은 신중한 타격을 요구했지만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평소보다 앞발을 더 열어둔 자세, 어차피 안타 못 치면 끝나는 도전이다. 평소 앞발을 닫아두고 최소한의 스윙을 하지만 오늘은 과감한 스윙을 돌렸다.
‘하든 못하든 대단한 선수다.’
피트 와이즈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했다.
어지간한 선수들은 대기록을 앞 두고 심적 부담을 느끼는데 여기까지 4할에 근접한 타율을 끌고 왔으니, 팬들과 달리 과감한 스윙을 응원했다.
“이번에는 바깥쪽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그립에도 약간 변화가 있는 것 같네요. 예전에는 그립이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가 파워를 장전하면서 스윙이 나왔는데, 처음부터 그립이 뒤로 밀려 있는 느낌이네요.”
“그런데 이렇게 시즌 중에 타격 폼에 변화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닙니까?”
“경우에 따라 다른 거죠. 타격이란 게 멈춰 있는 공을 치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른 타격도 필요하거든요. 거기다 이인영 선수는 11년 차 시즌에 접어든 베테랑 아닙니까? 다른 시대의 강타자들도 큰 틀은 건드리지 않고 미세하게 폼을 수정하면서 대기록을 세웠거든요. 자신이 해 왔던 틀을 깨버리는 건 문제지만, 이인영 선수는 그게 아닙니다.”
약간 변화를 줬지만 큰 틀은 지키고 있는 자세, 파워보다 정확도에 집중한 자세지만 밀워키 배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따악 ~ !!
“와아아 ~ !!”
3구 타격, 정확히 맞힌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첫 타석부터 아웃되면 팬들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그래서 첫 타석은 최대한 안타를 높이는 확률을 스윙을 한 것, 두 번 째 타석부터는 원상복귀 됐다.
‘뭐 이래?’
밀워키의 벤 자일스 포수는 그 사이 바뀐 자세에 혀를 내둘렀다.
타격이란 일정한 자세에서 치는 게 핵심이라고 배웠는데, 가끔 돌연변이들이 나타나 통념을 깨버린다.
저렇게 폼을 바꿔가면서 쳐도 안타가 나오다니, 이번 타석은 더 기막힌 결과가 나왔다.
[따악 ~ !!]
“자!! 이 타구는 우중간 사이에 떨어집니다!! 이인영 선수는 오늘 2타수 2안타!! 4할 달성에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지금은 높은 공이었는데 걷어 올렸네요. 역시 높낮이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선수입니다.”
왼쪽 팔꿈치를 내리면서 치는 타법, 이런 스윙은 낮은 공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높은 공에 약점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왼쪽 팔꿈치를 내렸다는 건 처음부터 낮은 공을 노렸다는 건가.
하지만 들어온 건 높은 공, 이걸 어떻게 안타로 연결한 건가.
왼쪽 팔꿈치를 내리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스윙, 그러다 왼쪽 어깨를 당기면서 스윙을 최대한 짧게 끌고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스윙 각도를 수정했다는 뜻, 얼핏 보면 공이 알아서 배트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공을 던져도 다 쳐낼 수 있는 선수, 밀워키의 마크 보이어 감독도 혀를 내둘렀다.
“어지간하면 도망치지 말라고”
사실 경기 전, 마크 보이어 감독은 투수진에 볼넷만은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건 승리, 그건 보이어 감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고의 선수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야구의 즐거움 아닌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그게 MLB 무대의 클래스다.
그 격식에 맞는 타격을 하는 선수, 적이라도 그 정도 예의는 갖췄다.
‘벌써 이렇게 됐나.’
그렇게 경기는 흘러 6회 말 필라델피아의 공격, 이인영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전광판을 살폈다.
평소 잘 치던 동료들도 오늘은 조용한 편, 이 페이스면 5번째 타석이 돌아오는 건 무리다.
운이 있다면 운명이 내게 기회를 주겠지, 마음을 비우고 타석에 섰다.
[따악 ~ !!]
“몸쪽!! 잡아당겼고!! 파울 라인 안쪽에 들어갑니다!! 장타 코스!! 이인영 선수는 1루를 돌아 2루까지 들어갑니다!! 3타수 3안타!! 이제 타율은 0.398입니다!!”
“지금은 몸쪽 바짝 붙은 공이었는데 앞발은 무너지고 팔도 제대로 안 펴진 상태에서 스윙이 나왔거든요. 만약 한국에서 어린 선수가 저런 스윙을 했다면 감독에게 욕 엄청 먹고 2군으로 내려갔을 겁니다.”
“하하 ~ 너무 말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감독이었을 때 선수들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한 스윙이 바로 이거거든요. 그런데 저런 자세로도 안타를 때려내니, 제가 할 말이 없네요.”
박한우 위원은 11년 전 일을 떠올렸다.
내 품에 들어온 여드름 자국도 지워지지 않은 애송이, 솔직히 하면 얼마나 하겠냐고 마음 속으로 비웃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젠 정도(正道)와 사이비를 드나들며 안타를 때려내고 있는 녀석, 별로 도와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잘 클 줄 누가 알았겠나.
상식을 파괴하는 타격에 할 말을 잃은 건 밀워키 벤치도 마찬가지, 이러다 정말 4할 타자 나오는 거 아닌가.
하지만 오늘 이인영 외엔 별 다른 활약이 없는 필라델피아 벤치, 남은 타자들만 잘 처리하면 4할 도전기는 실패로 끝난다.
우리가 승부를 피한 게 아니라 필라델피아 타선이 받쳐주지 못한 것 뿐, 마크 보이어 감독도 필승조 투입을 망설이지 않았다.
“자, 어느새 경기는 7회 말로 접어듭니다. 선두 타자는 찰스 콜먼, 오늘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가 올 시즌 경기 당 9.6안타를 때려낼 정도로 막강한 공격력을 보여줬는데 오늘은 5안타 빈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중 3개는 이인영 선수가 때려내고 있어요.”
“아 ~ 이젠 정말 기회가 없는데요. 힘을 내줬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바람과 달리 찰스 콜먼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다음 타자 역시 삼진 아웃, 피트 와이즈 감독은 투수 타석에 대타를 기용했지만 이것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7회는 종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필라델피아 홈팬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따라 수위를 넘어선 발언, 어느 관중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이봐!! 자식을 잃은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8회 초, 외야로 나가던 세스 브런들은 발끈했다.
브런들은 얼마 전 아내가 유산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남의 집 자식이 그런 일을 겪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인간인데, 더군다나 내 자식 아닌가.
그래도 브런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타율 0.314, 홈런 34개를 쳐내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새로 썼다.
날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죽은 자식을 건드린 건 그냥 싸우자는 짓, 흥분한 브런들은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외야석, 1루에서 경기 재개를 준비하던 이인영은 돌발사태에 할 말을 잃었다.
‘저렇게 흥분할 자식이 아닌데’
아직 덜 된 상황 파악, 구단 경비원이 흥분한 선수를 끌어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눈물까지 흘리며 울분을 표하는 브런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뭔가 짐작이 되는 게 있었지만 설마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닝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 자초지종, 이인영은 나라면 그 인간을 죽여버렸을 거라며 분노했다.
“XXXX, 그걸 말이라고 … ”
더그아웃 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인영은 문제가 일어난 장소를 노려봤다.
해선 안 될 말을 가려내는 능력도 없는 건가. 좌측 외야를 노려보다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필라델피아 팬이 그런 짓을 했다면 더욱 용납이 안 되는 일,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타석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4번 째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 4할 도전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대수비와 교체됐다.
그래도 1947년 이후 가장 4할에 근접했던 기록,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친구에게 일어난 불행을 가슴에 두고 있던 이인영은 커튼 콜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시즌 최종전은 4대 1 필라델피아의 패배로 종료, 슈퍼스타는 약간 피곤한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커튼 콜에 응하지 않은 건 대기록에 실패한 것 때문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다른 이유라도?”
“여러분들도 들었겠지만, 오늘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안타 좀 못 친다고 선수가 관중에게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합니까?”
팀이 내 기록을 위해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이 안타를 못 쳐서 4할 달성에 실패했다고 쳐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오늘 경기 안타가 없다고 관중에게 그런 말을 들은 브런들, 브런들은 필라델피아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다.
그런 인재가 홈경기에서 팬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앞으로도 이 팀을 위해 뛰고 싶겠나?
나라면 그 관중을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관중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브런들은 미국에서 상위 1%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연봉도 2천 4백 만 달러를 받고 누구보다 잘난 엘리트죠. 쓰레기와 비교될 사람이 아니고, 그런 모욕을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이인영은 모든 관중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앞으로 선수들에게 욕설을 하더라도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가리자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재활용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
그런 쓰레기는 다시는 야구장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구단에서 조치를 해주길 바란다는 말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