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23화 (223/309)

223화. 너보다는 낫다 (9)

[이인영 4타수 무안타, 시즌 타율 0.393으로 하락]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한국 기자들은 비보를 내보냈다.

한국에서도 했던 4할, MLB에서도 해내길 바랐는데 역시 무리인 건가. 반면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인생은 뷔페가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골라 담을 순 없죠.”

때론 패배하고 고꾸라지기 마련, 언제부터 내가 이기는 싸움만 했나.

오늘 일어난 불행도 받아들일 뿐,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어지는 콜로라도와의 시리즈 2차전, 이인영은 평소처럼 경기를 준비했다.

“자, 세스 브런들 선수의 타석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올 시즌 타율 0.314, 홈런 31개, 82타점, 커리어 최고 시즌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1번부터 6번까지 지뢰밭입니다. 이게 1번 타자가 낼 성적이 아니거든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타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 브런들은 첫 타석부터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뽑아냈다.

어제 4타수 4안타, 오늘은 첫 타석부터 안타,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의 타격감도 만만치 않았다.

시즌 중반까지 이인영과 타율왕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너무 벌어진 격차, 그래도 타율 0.341 - 홈런 22개 - 73타점을 기록하며 중심타선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산 넘어 산, 콜로라도 배터리는 마음을 비우고 승부를 걸었다.

‘이걸 왜 잡아주지?’

초구를 지켜본 잉글리시아는 인상을 구겼다.

후반기에 살짝 주춤하면서 3할 7푼을 오르내리던 타율은 3할 4푼대로 하락, 방망이가 안 맞으면서 살짝 신경이 민감해져 있다.

하지만 누구 말대로 인생은 뷔페가 아니지 않은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악~!]

“타격,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보통 앞발이 오픈되면 손도 같이 따라가는데, 제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잉글리시아 선수는 앞발이 너무 일찍 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앞발이 마지막까지 닫혀있을 순 없거든요. 마지막에 열리면서 자연스러운 스윙이 돼야 하는데, 다만 그게 너무 빠르다는 거예요.”

“저도 그렇고 팬 여러분들도 박한우 위원님을 통해 이런 저런 지식을 습득하긴 하는데, 타격이 정말 어렵긴 어렵네요. 잉글리시아 선수가 6월 달까지만 해도 이인영 선수보다 타격이 높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재능인 거죠. 지금 필라델피아에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가 3명이나 있는데, 3할 타자가 아예 없는 팀도 많거든요. 이런 리그에서 3할 9푼을 치고 있는 이인영 선수가 대단한 거죠.”

잉글리시아는 3구를 걷어냈지만 좌익수 키를 넘기지 못했다.

최근 17타수 2안타, 잉글리시아가 쓰린 속을 다스리는 사이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된다.’

4할에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 한국에서도 4할을 쳐봤지만 특별한 비결 따윈 없다.

그저 치고 열심히 달릴 뿐, 차분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초구는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지금도 백 핸드 토스같은 동작을 하고 있거든요. 박한우 위원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공을 친 다음의 팔로우 동작이 백 핸드 토스와 거의 비슷하거든요. 제가 잉글리시아 선수의 타격을 언급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앞발이 일찍 열리면 손도 같이 따라갑니다. 그걸 방지하고자 하는 연습 동작이죠.”

이인영은 마지막까지 앞발을 닫아놓고 상체 회전은 최소화 하는 동작으로 타구를 밀어낸다.

힘이 있으니 가능한 타격, 잉글리시아도 이 타법을 모방해 재미를 봤지만 선천적으로 떨어지는 힘과 후반기 들어 떨어진 체력이 발목을 잡고 있다.

반면 아직 건재한 이인영의 방망이, 콜로라도 배터리는 바깥쪽을 집중 공략했다.

따아악~!!

타격이 되는 순간, 좌익수는 추격을 포기했다.

좌중간을 지나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타구, 8경기 동안 멈춰 있던 홈런이 여기서 터질 줄이야.

콜로라도 벤치가 아쉬움을 삼키는 동안 먼저 홈을 밟은 브런들은 친구의 시즌 36번째 홈런을 축하해줬다.

“축하받긴 이르지. 이제 시작인데”

“몇 개를 더 치려고 그래?”

“한 2개는 더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브런들은 멀어지는 친구의 헬멧을 두들겼다.

쓸데없는 농담은 안 하는 자식, 그리고 그만한 실력이 있는 녀석이라 기대가 됐다.

“자, 필라델피아의 1회 초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타석에는 루이스 햄, 올 시즌 타율 0.279, 홈런 44개, 13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셔널리그 홈런 1위, 타점 역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는데, 솔직히 이렇게 빨리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했겠죠. 삼진이 조금 많긴 하지만 40홈런 치는 선수에겐 의미가 없는 지적입니다.”

한편, 벤치에 앉은 이인영은 루이스의 타격을 지켜봤다.

올 시즌 루이스의 BABIP은 0.357, 리그 평균보다 5푼이나 더 높다.

2할 7푼대 타율은 내년에 폭락할 위험이 있다는 건데, 저 선수를 어떻게 봐야 하나.

내 자리를 위협할 만한 경쟁자인지 아니면 한 시대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공갈포 중 하나인지, 일단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세인트루이스의 테드 반디에 비하면 임팩트가 떨어지는 건 사실, 테드 반디는 지금 타율 0.333, 홈런 40개, 119타점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인영은 3할 9푼대 타율과 36홈런을 기록하고 있지만 정규시즌 MVP 수상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루이스 햄도 무시할 수 없는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 방심하진 않았다.

[따아악~!!]

“어!! 이 타구는!! 이번도 좌측 담장 위로 사라집니다!! 연타석 홈런!! 루이스 햄 선수가 시즌 45호 홈런 포를 쏘아올립니다!! 스코어 3대 0!! 필라델피아의 화력이 초반부터 불을 뿜고 있습니다!!”

“스피드는 쓸만한데 무게가 떨어지네요. 역시 클레이튼 선수의 구위로는 넘어서기 벅찬 타선입니다.”

콜로라도의 선발 제프 클레이튼은 후속 타자 산체스에게도 안타를 허용했다.

빠른 볼이 먹히질 않으니 어떤 공을 던져도 무의미, 하위 타선은 잘 남겼지만, 3회부터 시련은 반복됐다.

오늘로 메이저리그 통산 4번째 선발 등판을 치르고 있는 제프 클레이튼, 이인영은 망설임 없이 어린 싹을 짓밟았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밟아야 하는 무대, 인정 따윈 베풀지 않았다.

따악~!!

“우왓!!”

투수 머리로 날아온 타구, 깜짝 놀란 클레이튼은 글러브를 들이댔다.

글러브에 맞고 2루 쪽으로 튄 공, 팬들의 관심은 심판 판정에 쏠렸다.

“여기서!! 아~!! 아웃이군요!! 이인영 선수가 두 번째 타석은 범타로 물러납니다.”

“지금은 클레이튼 선수의 수비를 칭찬할 수밖에 없네요. 어지간하면 2루수에게 맡길 법도 한데, 본인이 직접 처리를 했어요.”

클레이튼은 글러브를 매만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타구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욱 커진 야수진의 글러브, 그건 투수도 마찬가지다.

최근 수비는 공을 잡는 게 아니라 일단 막고 던지는 게 중점, 투구는 형편 없지만 기본을 지킨 수비에 만족했다.

하지만 기본은 기본일 뿐, 그 이상을 요구하는 메이저리그 무대는 끊임없는 시련을 던졌다.

‘내 생각이 맞나?’

다음 타자 루이스 햄은 클레이튼의 글러브에 주목했다.

글러브에 평평한 검지 커버를 붙이는 회사도 있지만, 일부러 일자 주름이 잡힌 커버를 붙이는 회사도 있다.

일부 투수들은 공을 던질 때, 검지를 펴거나 접는 경우가 있는데 구질에 따라 검지 커버 주름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 몇 몇 회사는 선수의 요청에 따라 그래서 처음부터 주름이 잡힌 커버를 붙인다.

하지만 클레이튼이 사용하는 글러브에는 평평한 검지 커버가 붙어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빠른 볼을 던질 때는 주름이 안잡히는 느낌, 확신이 서질 않아 일단 다음 공도 지켜봤다.

‘맞는 것 같다.’

주름이 진 글러브 덮개, 구질은 변화구, 이 정도면 믿어볼만 하지 않나.

다음 공에 초점을 맞췄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지금은 타이밍이 완전히 늦었거든요. 변화구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들어온 건 직구네요.”

헛스윙을 돌린 루이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글러브만 봐도 구질을 읽는 선수들이 있다고 하는데, 설마 나도 그 레벨에 발을 들인 게 아닐까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주 거하게 헛발질,

이인영은 평소 루이스에게 볼을 보는 습관부터 길러야 선구안이 좋아진다는 조언을 해줬다.

상대의 버릇을 읽는 꼼수는 베테랑들이 하는 일, 경험이 부족한 루이스는 자신에겐 기본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름이 없다.’

하지만 어느새 또 글러브로 향한 눈, 앞 다리를 살짝 들고 있던 루이스는 그대로 스윙을 내질렀다.

따아악~!!

“어?!!”

“하나 더 추가!!!!”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루이스는 동료들의 환호를 받으며 베이스를 돌았다. 역시 나는 투수의 버릇을 읽어낸 건가.

다른 선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일단 선구안에 일가견이 있는 이인영을 시험했다.

“저기, 내 말 좀 들어봐.”

“뭔데?”

“나 좀 천재인 것 같아. 들어 볼래?”

자기가 발견한 버릇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루이스, 이인영은 그 앞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미안한데, 난 이제 나이가 30이라 너처럼 눈이 좋지 않아.”

무슨 현미경도 아니고 투수의 글러브를 보고 구질을 파악하나.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이인영은 10년 동안 그렇게 구질을 예측하진 않았다. 차라리 사인을 훔치는 게 현실적, 그렇다고 루이스의 주장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도 대단한 것, 다음 타석도 잘 해보라며 격려해줬다.

‘이거 큰일이네. 어린 것들이 치고 올라오잖아.’

이인영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멀티 홈런으로 46호 홈런에 올라선 루이스, 격차는 10개로 벌어졌다.

이러다 내년엔 내 자리를 넘어서는 거 아닌지, 테드 반디도 무섭게 성적을 끌어올리고 있다.

조금 더 분발해야 하는 입장, 5회 초 3번 째 타석에 들어섰다.

4이닝 4실점 투구를 한 클레이튼은 내려갔고 마운드에는 에디슨 람, 되지도 않는 버릇 읽기는 때려치웠다.

[딱~!]

“파울입니다. 99마일이 나오는군요.”

“상대를 정확히 알고 있네요. 하긴 이제 5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각 구단도 이인영 선수의 특징은 알고 있을 겁니다.”

에디슨 람은 초구부터 전력투구를 펼쳤다.

올 시즌 95마일 이상 빠른 볼에 0.407를 때려내고 있는 이인영, 하지만 98마일로 구속이 올라가면 0.333으로 떨어진다.

천재 타자라도 100마일을 넘나드는 공에 반응하는 건 어려운 일, 에디슨 람은 다음 공도 몸 쪽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이런 뻔히 보이는 장난에 당할 거라고 생각했냐?’

이인영은 바로 응징을 가했다.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 빠른 공을 고집하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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