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21화 (221/309)

221화. 너보다는 낫다 (7)

‘저런 경솔한 친구가 아닌데’

필라델피아의 와이즈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서 뛴 경력까지 합치면 무려 11년 차 베테랑, 그런 선수가 적시타 치고 혀를 내미는 세리머니를 하다니, 조금 경솔한 행동 아닌가.

빈볼에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 일, 1회 초 공격이 끝난 후 이인영은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더그아웃에 발을 들였다.

“야, 그러다 빈볼 맞으면 너만 손해야.”

이때 잉글리시아가 한 소리 거들었다.

저 녀석은 어느 팀에 가도 대체 불가능한 선수,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걱정어린 충고를 날렸다.

“어린애들한테는 너무 자극적인 행동이었냐?”

“뭐?”

“어린애들은 혀만 내밀어도 발끈하잖아.”

피의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로에서 상대를 도발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발끈하느냐 차분하게 대응하느냐의 차이일 뿐, 진짜 멋있는 복수는 실력으로 갚아주는 거다.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평균 연령이 젊은 편, 이 정도 도발에 흥분한다면 아직 어리다는 증거 아니겠나? 이인영은 나는 베테랑으로서 어린 것들을 시험하는 것 뿐이라며 뻔뻔한 반응을 보였다.

“두고 보자고, 다음 타석에 내가 빈볼을 맞나 안 맞나.”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린애들이라고 비웃어주면 돼.”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때는 정말 악당 같은 녀석, 어쨌든 1회에 2점을 낸 필라델피아는 2회에도 공세를 이어갔다.

“자, 헨리 데븐포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43, 홈런 5개, 11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기를 출장한 건 아니죠. 대타나 대수비 요원으로 자주 나오는데 오늘은 선발출장 기회를 잡았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지금 중견수 자리가 아주 뜨겁죠. 좌익수는 세스 브런들, 우익수는 루이스 햄으로 고정이 됐는데, 중견수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때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말이죠.”

데븐포트는 키 193cm에 몸무게 101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

27살에 메이저리그에 승격된 늦깎이지만, 상체와 손목 힘으로 담장을 넘길 정도로 파워는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비도 안정적, 가능성이 있는 선수라 와이즈 감독도 기대를 걸었다.

‘엇?’

초구를 던진 팀 해리스는 움찔했다.

몸쪽으로 붙인다는 게 타자를 직격할 줄이야, 하지만 데븐포트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1루로 향했다.

누구 말대로 쉽게 흥분하는 건 어린애 같은 짓, 다음 타석에서 갚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 헬멧을 눌러쓰며 1루에서 멀어졌다.

다음 타자는 투수 어빈 칼데론, 타율은 0.150으로 높지 않지만 6월에만 홈런 2개를 때려낸 선수라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도 얕잡아 보진 않았다.

‘신문지도 단단하게 말아서 때리면 제법 아프다고’

칼데론은 지명타자 도입에 반대하는 선수,

투수가 치는 배트는 신문지로 만든 배트인가? 칼데론은 그 신문지로 통산 11홈런을 때려냈다.

1901년 이후 통산 10홈런을 때려낸 선수는 역대 3명 뿐, 칼데론은 프로 5년 차에 접어든 젊은 선수지만 벌써 그 경지에 도달했다.

마음 같아선 타자를 하고 싶지만 타선이 강한 필라델피아에서 타자로 살아남는 건 불가능, 이렇게나마 아쉬움을 달랬다.

[따아악~!!]

“오~!! 멀리 가는데요?!! 좌측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타구!! 담장을 넘어 갑니다!!!! 어빈 칼데론의 투 런 홈런!! 칼데론 선수가 다시 한 번 장타력을 발휘합니다!!”

“이젠 투수까지 홈런을 쳐내고 있네요. 올 시즌 필라델피아 타선은 정말 무섭습니다.”

3루를 통과한 칼데론은 혀를 쭉 내밀었다.

세인트루이스를 다시 한 번 자극하는 행동, 이 사태를 주도한 이인영은 덕분에 관심 밖으로 조금 밀려났다.

“지금 해 보자는 거야?!!”

팀 해리스는 결국 폭발했다.

홈런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저런 행동은 봐줄 수가 없을 정도, 하지만 칼데론은 홈으로 향하면서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린애라 이런 것도 자극이 되나 보지?!!”

“뭐라고?!!”

“억울하면 너도 홈런 치던가!! 하긴 너는 평생 하나도 못 치겠지만!!”

양 측 더그아웃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수들, 해리스와 칼데론은 유치한 대립을 이어갔다.

“너 다음에 보자!! 나도 홈런 칠 테니까!!”

“웃기고 있네!!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냐?!!”

주심이 양팀에 경고를 주면서 사건은 진화됐다.

하지만 4대 0으로 뒤진 게임에 도발까지 당한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냉정함을 잃어버렸고, 이후에도 끌려가는 게임을 계속했다.

‘별 것 아니군.’

3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선두 타자 스티브 월터를 삼진 처리한 칼데론은 한껏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이런 어린애들이 내셔널리그 최고 승률 팀이라니, 어른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꾸짖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다음 타자 테드 반디도 희생양으로 삼았다. 초구는 몸 쪽 깊숙한 공, 테드 반디는 살짝 인상을 구겼다.

“얼굴 좀 펴라고 애송이, 모든 일이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산체스 포수도 도발에 나섰다.

상대는 2년 차 시즌에 MVP 급 시즌을 달리고 있는 선수, 잘 할수록 견제가 심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몸 쪽 공에 인상을 구기는 건 아마추어나 할 짓이라며 속을 긁었다.

팀 전체가 악의 소굴, 브라이스 주심은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스크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지금은 너무 낮은 공 아니었나요?”

“반디 선수가 낮은 공에 강점이 있긴 한데, 지금은 욕심을 앞세웠네요. 조금 냉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3구, 테드 반디는 바깥쪽 빠지는 빠른 볼도 건드렸다(파울).

평소라면 절대 반응하지 않았을 공, 악당의 페이스에 말려든 초신성은 4구 만에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이제 경기는 완전히 필라델피아의 우세, 5회 초에는 무려 7안타, 3볼넷을 묶어 8점을 수확했다.

첫 타석에서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한 데븐 포트의 만루 홈런이 결정타, 스코어는 13대 0으로 벌어졌지만 홈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LA에 이어 관중동원력 2위를 차지하는 세인트루이스, 올 시즌도 평균 관중 4만 2천 명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 팀 아니면 다 나쁜 놈 취급하는 필라델피아와 전혀 다른 동네, 다른 팀 선수가 기록을 세워도 격려와 축하를 해주는 편이다.

그래서 더 놀려주고 싶다고 해야 되나.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인내심은 어디까지인가. 필라델피아의 악마들은 더 가혹한 시련을 던졌다.

“정말인지 시험해 볼 거야.”

“정말 던질 거야?”

“응”

불펜에서 몸을 풀던 로버트 필은 코치와 섬뜩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세인트루이스는 다른 지역에 비해 백인 비율이 높은 편, 메이저리그는 원래 백인 비율이 높은 스포츠지만 세인트루이스는 특히 더 그렇다.

그건 둘째 치고 인종이 다른 선수들끼리 뭉쳐 다니고 경기장 밖에서 남남처럼 지낸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말일까.

단순한 소문이라면 흑인 선수가 당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하겠지, 로버트 필은 빠른 볼로 찰스 스미스를 위협했다.

“야, 따로 다니는 거 소문 아닌가 봐.”

“그러게? 왜 다들 조용하지?”

필라델피아 진영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상황에선 목소리를 높이며 상대 선수를 비난하는 게 당연, 그런데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너무 조용했다.

점수 차가 너무 벌어져 저항할 의지마저 상실한 건가. 반면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사방에서 야유를 퍼붓는 상황, 눈치를 살피던 세스 브런들은 친구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는 인종이 달라도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그렇지?”

“손 저리 치워.”

이인영은 바로 차갑게 돌아섰다.

내가 야구를 못 했어도 이런 대접을 받았겠나.

얼마 전 은퇴한 필라델피아의 베테랑 조시 빌라는 아시아 선수가 MLB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야구를 잘 하니까 대접을 받는 것 뿐, 다른 인종끼리 친한 척하지 말자며 웃음을 유발했다.

어쨌든 이날 경기는 15대 0 필라델피아의 완승으로 종료,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로 몰려든 세인트루이스 기자들은 이인영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적시타를 치고 혀를 내민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숨길 것도 없겠죠. 도발하려고 그런 거 맞습니다.”

술렁이는 기자들, 질문을 던진 기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다른 기자가 발언권을 얻었다.

“굳이 그런 행동으로 경기를 과열시켜야 했나요?”

“과열이요? 도발도 스포츠의 일부일 뿐입니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도 프로의 자세죠. 겨우 그 정도로 욱해서 무너질 정도면 프로의 자격이 없는 거 아닙니까? 메이저리그 경기가 무슨 어린애 소꿉놀이도 아니고 혀 한 번 내밀었다고 경기가 과열됩니까?”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뻔뻔함, 이인영은 더 큰 폭탄을 던졌다.

“저는 그것보다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이 이해가 안 되네요. 해리스가 발끈했을 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선수들이 왜 8회에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미스가 98마일 빠른 볼에 주저 앉지 않았습니까? 저라면 어떻게든 불만을 표했을 겁니다. 그런데 세인트루이스 진영은 너무 조용하더군요. 저게 정말 메이저리그 최고 승률을 달리는 팀인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 팀은 팀원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겁니까?”

상대 팀의 분열까지 유도하는 발언,

심지어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클럽하우스에서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훈훈한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우리는 어느 팀과 달리 모든 선수들이 잘 지낸다는 과시, 깜짝 놀란 세인트루이스의 데이비드 셰퍼 감독은 해명에 나섰다.

“우리는 그저 필라델피아의 도발에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특정 선수를 따돌리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일부 선수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겁니까?”

“문제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팀을 분열시키는 건 정말 비열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데이비드 셰퍼 감독은 불쾌한 반응을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파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조직을 이룬 이상 모든 구성원과 친하게 지낼 순 없다.

마음에 맞는 선수들끼리 다니는 게 이상한 건가? 그걸 이상하게 확대해석해서 선전을 벌이는 악마 같은 놈들, 데이비드 셰퍼 감독은 이인영을 타고 난 악마로 여겼다.

‘이대로 계속 당할 순 없어.’

테드 반디도 이인영을 넘어서야 할 존재 그 이상으로 여겼다.

짜증나긴 하지만 말빨로 상대를 흔드는 것도 기술, 테드 반디는 너무 얌전한 성격이라 그런 능력이 없다.

팬들이 너무 조용하고 매너 있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말빨이 늘지 않는 이유 중 하나, 좀 더 독해져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언론 플레이도 해 본 놈이 하는 법, 천성이 물러 터진 테드 반디는 독해지지 못했다.

따악~!!

“좋아!! 그렇지!!”

“저런 놈들에게 승률 1위는 너무 과분하다고!!”

다음 날도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상대를 자극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는 아무 것도 못하고 시리즈 3차전까지 헌납, 반면 필라델피아는 시카고 전의 악몽을 떨쳐내고 동부지구 1위에 올라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