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너보다는 낫다 (6)
“자, 이제 9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도 투수를 교체하는 군요. 리차드 하퍼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17경기 등판, 3승 3패 평균자책점 2.95, 24와 1/3이닝 동안 볼넷 9개, 탈삼진은 30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균 97마일의 속구에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던지는데요. 체인지업 완성도가 올라오면서 피안타율이 작년에 비해 1푼 정도 줄어들었습니다. 다만, 마무리치고 평균자책점이 조금 높은 게 흠이죠.”
“결국 문제는 볼넷이죠. 이닝 당 투구수도 16.7로 꽤 높은 편입니다.”
올스타에 2번이나 선정된 리차드 하퍼가 마운드를 밟았다.
막을 때는 확실하게 막지만 가끔 볼넷으로 주자를 쌓아놓고 한 방을 맞는 게 문제, 특히 필라델피아는 빠른 공에 강점이 있고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들이 널려 있다.
무브먼트를 믿고 정면승부를 하는 하퍼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약간 찜찜한 교체, 세인트루이스의 데이비드 셰퍼 감독은 팔짱을 낀 채 하퍼의 투구를 지켜봤다.
‘브런들이라면 가능성이 있지.’
한편, 필라델피아의 와이즈 감독은 이번 이닝에 기대를 걸었다.
선두 타자는 아웃 됐지만 다음 타자가 세스 브런들,
브런들은 배팅 스피드가 빠른 편은 아니다. 대신 스윙 거리를 최소화하고 들어올리는 궤적으로 타구를 띄우는 유형, 낮은 공에 약점이 있지만 높은 빠른 공은 용서 없다.
하퍼의 체인지업만 조심하면 승산이 있는 승부, 브런들도 본인이 뭘 해야하는지 인지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더 밖으로 휘는데’
초구를 때린(파울) 브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퍼의 빠른 볼은 싱커성을 띤다고 알고 있는데 오늘은 옆으로 휘어나가는 느낌이랄까.
원래 싱커와 투심은 종이 한 장 차이,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이거 불안한데’
달 에이커 포수는 보호 마스크를 고쳐 쓰며 밖으로 빠져 앉았다.
공이 옆으로 빠지면 곤란하다. 하퍼가 볼 질을 할 때와 비슷한 패턴, 스트라이크 존으로 넣도록 유도했지만 공은 계속 옆으로 빠져나갔다.
카운트를 잡아야 체인지업을 던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브런들은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슬라이더를 골라내는 선구안을 발휘했다.
“바깥쪽!! 다시 볼입니다!! 브런들 선수가 볼넷으로 나가면서 1사 주자 1루!! 필라델피아가 득점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제 잉글리시아 – 이인영 – 루이스로 이어지거든요. 이 첩첩산중을 어떻게 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더그아웃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타석에는 메이저리그 수위타자 잉글리시아, 경기 후반에 더 무서운 선수라 볼배합에 신중을 기했다.
‘역시 바깥쪽이군.’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동료의 자세를 유심히 지켜봤다.
메이저리그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스윙을 하는 타자가 누굴까? 그건 바로 잉글리시아,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은 거의 비슷하다.
다리를 많이 사용하되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폼, 저렇게 하면 공을 좀 더 보고 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경기 초반에는 1루 쪽으로 밀어치고, 이닝 후반으로 갈수록 히팅 포인트를 앞으로 옮기는데, 경기 후반에 스윙을 좀 더 길게 하면서 타구를 센터 쪽으로 보내는 것까지 똑같다.
타자의 타격 성향을 보면 볼 배합을 예상하는 것도 가능, 배터리는 그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바깥쪽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잉글리시아 선수 타격이 정말 많이 늘었습니다. 작년에도 타율 0.293, 홈런 15개, 2루수 치고 굉장히 좋은 타격을 보여줬거든요. 그런데 올 시즌은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시즌 중반을 조금 넘었는데 홈런이 벌써 14개에요.”
[따악~!!]
“말씀 드리는 사이!! 낮은 공을 걷어 올립니다!!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1루 주자는 일단 2루에서 멈춰 섭니다!! 이제 1사 주자 1 – 2루!! 필라델피아가 역전에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지금은 체인지업인데, 발은 빠른 볼 타이밍에 나갔거든요. 타이밍을 뺏겨도 안타를 쳐내고 있습니다.”
믿었던 체인지업까지 공략 당하자 리차드 하퍼는 혼란에 빠졌다.
거기다 다음 타자는 이인영, 마운드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이인영을 걸러도 다음 타자가 루이스 햄, 병살 작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단 승부를 해보고 여차하면 거르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도대체 왜 이러냐?’
초구를 던진 하퍼는 포수가 던진 공을 신경질적으로 낚아 챘다.
계속 옆으로 휘는 공, 14개를 던지는 동안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낸 건 2개 뿐이다.
타자가 건드려 준 공을 제외하면 볼 질만 하고 있는 꼴, 달 에이커 포수는 정면 승부를 유도했다.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에 걸치는 공, 이인영은 바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급한 쪽은 제구가 안 되는 투수, 3구에 드디어 배트가 나왔다.
[따악~!!]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도 바깥쪽으로 들어왔는데 배트 끝에 걸렸거든요. 아~ 이건 좀 뼈 아프네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제일 애매합니다. 제가 많이 겪어봐서 알죠.”
임선우 위원은 불리한 쪽은 배터리 쪽이라고 못 박았다.
지금은 1사 주자 1 – 2루, 하퍼의 체인지업은 피안타율을 억제하는 체인지업, 컨택이 되면 곤란하다.
헛스윙을 이끌어 내겠다면 슬라이더를 던져야 되는데 하퍼는 우투수, 이인영은 좌타자다. 얼마나 효과를 볼지는 미지수, 카운트는 유리해졌지만 생각이 복잡한 쪽은 배터리다.
빠른 볼인가 체인지업인가.
데이비드 셰퍼 감독은 빠른 볼을 지시, 배터리도 마음을 정했다.
딱~!!
다시 파울, 빠른 볼은 계속 컨택 되고 체인지업은 던지기 망설여지고, 리차드 하퍼는 평소 스타일대로 빠른 볼을 윽박질렀다.
따아악~!!
센터 쪽으로 보낸 타구, 손을 떠난 배트는 1루 라인 밖에 떨어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홈런을 확신한 이인영은 천천히 1루로 향했다.
“That's my partner!! That's my partner!!”
3루 근처를 돌던 세스 브런들은 폴짝폴짝 뛰며 홈에 입성했다.
저게 볼 카운트가 불리해졌다고 쉽게 죽을 놈인가. 처음부터 믿고 있었지만 설마 했던 역전 홈런, 브런들의 뒤를 이은 잉글리시아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시간 33분 동안 이어진 3대 3 승부가 공 하나로 결정되다니,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고개를 떨궜다.
결국 이날 경기는 6대 3 필라델피아의 승리로 종료, 패장 데이비스 셰퍼 감독은 무거운 얼굴로 기자들 앞에 섰다.
“리차드 하퍼는 유리한 카운트에서 계속 빠른 볼을 던졌습니다. 그건 하퍼의 고집입니까 아니면 벤치의 지시입니까?”
“고집이라니요.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
셰퍼 감독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상황에서 체인지업을 던져야 했다는 건가? 야구도 모르는 것들이 볼 배합에 간섭을 하다니, 빠른 볼은 옳은 선택이었고 타자가 잘 친 것 뿐이라며 기자와 눈싸움을 주고 받았다.
“그럼 내일 경기에서 비슷한 상황이 되도 빠른 볼을 지시하겠다는 겁니까?”
“그건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야. 멍청한 자식 … 뭘 안다고 떠드는 거야?”
셰퍼 감독은 일방적으로 인터뷰를 끝내버렸다.
선수가 받을 비난을 내가 짊어지는 게 셰퍼 감독의 스타일, 역전 홈런을 허용한 리차드 하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감독의 배려에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제대로 던졌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내셔널리그 최고 승률 자리는 변함없지만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굴욕적인 패배에 울분을 삼켰다.
‘내가 기회를 살리지 못했어.’
테드 반디도 치욕을 곱씹었다.
내 시대가 시작됐다고 생각했는데 그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산, 내일은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복수를 다짐하며 자리를 비웠다.
“이인영 선수, 오늘 활약과 팀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한편, 이인영은 클럽하우스 앞에서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테드 반디의 시대가 왔다는 여론을 박살낸 역전 쓰리 런 홈런, 지금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이인영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떻긴요. 겁나게 좋죠.”
간단하지만 솔직 담백한 반응, 다른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올 시즌 MVP 경쟁은 이인영 선수와 테드 반디 선수의 2파전이 될 텐데요. 마지막에 웃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2파전이라는 말은 조금 잘못된 것 같네요.”
이인영은 잉글리시아도 MVP 후보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추켜세웠다.
지금 페이스라면 246안타, 28홈런으로 시즌을 마무리하는데 유격수 이 정도 공격력이면 엄청난 거 아닌가.
잉글리시아는 원래 2루를 봤지만 프랭크 토마스가 2루로 들어가면서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어깨는 강하지 않아도 넓은 수비범위와 안정적인 송구가 인상적,
이인영은 나도 그렇고 테드 반디도 시즌 마지막까지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정말 내가 MVP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건 당연히 내 꺼야.”
물론 클럽하우스에선 어림도 없는 일, 립 서비스에 마음이 흔들렸던 잉글리시아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너 내가 MVP 수상하면 어떻게 할래?”
“내가 못 받는데 네가 받는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너 내 타격폼 모방해서 잘하고 있는 거잖아?”
“내가 널 따라하고 있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라. 너도 양심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10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타격 폼,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 팀 동료가 따라 할 줄이야.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신경이 쓰이는데 내 기술을 카피하다니, 솔직히 약간 충격을 받았다.
“저작권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 누가 MVP 수상하나.”
내 기술은 내가 더 잘 소화하는 법, 모방해 봤자 나보다 잘하겠나.
이인영은 최후의 승자는 나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 * *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세스 브런들, 올 시즌 타율 0.304 - 홈런 14개 - 4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멀티 출루, 특히 9회에 볼넷을 얻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브런들 선수의 출루율은 매년 꾸준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타율은 2할 7푼대에 머물렀지만 출루율은 3할 4푼을 넘겼거든요. 올해는 0.370로 더 좋아졌습니다.”
이어지는 2차전 경기, 브런들은 낮은 공을 골라내며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다른 팀이라면 3번을 치고도 남을 선수,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첫 타자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따악~!!
“그렇지!!”
외야로 타구를 보낸 브런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볼을 골라낼 줄 알게 되면서 훨씬 좋아진 타구 질,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도 신중히 볼을 골라냈다.
따악~!!
결과는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세인트루이스의 선발 팀 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어치기로 안타를 생산하는 필라델피아 타선, 시대의 이단아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나.
다음 타자 이인영도 밀어치기로 타이밍을 잡는 선수, 상대는 좌타자지만 수비진은 좌측으로 쏠렸다.
‘메롱~ ’
얄밉게도 잡아당긴 타구는 우중간을 꿰뚫었다.
2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혀를 비쭉 내밀며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을 도발, 이렇게 전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