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너보다는 낫다 (5)
“아웃!!”
테드 반디는 급히 1루로 귀환했지만 아웃 판정이 내려졌다.
간발의 차도 아니라 두 박자는 더 빨랐던 태그, 몸을 털고 일어난 테드 반디는 1루심과 가벼운 언쟁을 주고받았다.
“견제가 아니라 홈으로 던지려는 투구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이스터의 투구 동작을 알고 있다고요. 지금은 왼쪽 어깨가 1루가 아니라 홈으로 향했어요.”
테드 반디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끝내 깨닫지 못했다.
존 이스터는 처음부터 견제를 생각했고, 주자를 속이기 위해 왼쪽 어깨를 홈으로 향했다.
어깨를 홈 쪽으로 움직이는 건 주자를 기만하는 행위라 보크에 해당한다. 그걸 심판진 누구도 못 봤다는 건 심판진의 무능함인가 아니면 13년 차 베테랑의 기술인가.
어쨌든 보크는 비디오판독 대상도 아니고 항의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직 더 배워야겠군.’’
이인영은 멀어지는 테드 반디의 뒷모습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을 법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스포츠도 온갖 반칙과 속임수가 난무한다. 생존 기간이 평균 5~ 6년 밖에 안 되는 메이저리그라면 더욱 그렇겠지, 아직 때가 덜 탄 루키는 이게 주자를 낚기 술책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계속 당하다 보면 깨닫는 날도 있겠지. 어쨌든 이스터는 무실점으로 위기를 넘겼다.
“너 아까 일부러 왼쪽 어깨 홈으로 향한 거지?”
“응”
“그런데 그 자식은 그걸 모르더라. 보크니 뭐니 하던데?”
“아직 덜 익어서 그렇지 뭐”
두 베테랑은 애송이를 두고 험담을 이어갔다.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애송이는 애송이일 뿐, 하지만 이스터는 마지막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조금씩 늙어가는 구나.”
“뭐? 왜 갑자기 악담을 하고 그래?”
“사실이 그렇잖아. 너도 이젠 30이라고”
타자는 28세가 최전성기고 그 다음부터는 내려온다는 말이 있다.
이인영은 이제 서른, 통계 기준으로 전성기 끝자락에 걸쳐 있다.
투수의 동작만 봐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다는 건 경험이 그만큼 쌓였다는 뜻 아니겠나. 문제는 기술이 쌓이는 만큼 신체 능력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것, 노장이 은퇴하는 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기술은 무르익었는데 몸이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것, 이 녀석은 앞으로 얼마나 더 전성기를 끌고 갈 수 있을까.
이스터는 이인영의 열렬한 팬, 그 몰락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너나 잘해 인마, 남 걱정하지 말고”
“하하~ 알았어.”
웃고 떠드는 사이 시작된 필라델피아의 2회 초 공격, 하위 타선이 터져주면서 스코어를 4대 0으로 벌렸다.
“자, 계속되는 필라델피아의 공격, 1사 주자 1 – 3루에서 세스 브런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에서 안타, 7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필라델피아는 1번부터 5번까지 올스타 라인업이거든요. 투수력이 조금 약해서 그렇지 방망이는 포스가 장난 없습니다.”
[따악~!!]
“말씀 드리는 사이!! 외야로 뻗어 나가는 타구!! 좌익수 키를 넘어갑니다!! 3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으로!! 1루 주자도 2루를 지나 3루!! 아~ 여기서 다시 송구가 유격수 머리 위로 지나갑니다!! 1루 주자까지 홈으로!! 스코어는 이제 6대 0입니다!!”
“지금은 연계플레이가 엉망이네요. 필라델피아가 시카고 전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가 대량 실점을 하지 않았습니까. 메이저리그답지 않은 수비가 나왔네요.”
임선우 위원은 메이저리그 수비가 전체적으로 하락했다는 걸 느꼈다.
수비보다 공격을 중시하는 시대, 수비가 엉망이라도 공격이 괜찮으면 외야수로 돌린다.
그래도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런 저질 송구가 난무하는 리그가 된 건지, 다른 건 몰라도 수비 만큼은 퇴보했다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 사이 후속 타자 잉글리시아의 진루타가 이어지며 2사 주자 3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초구를 잘 치는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 올 시즌은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어지간해선 배트가 안 나가요.”
“그건 박한우 위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메이저리그 첫 시즌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공을 때려낸 비율이 19%였거든요. 그런데 올 시즌은 17%로 줄었습니다.”
“2%면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이인영 선수가 작년 시즌 3386번 스윙을 했습니다. 올 시즌은 1522번, 162경기로 환산하면 스윙이 100~ 150개 정도 줄어들었다는 거죠. 박한우 위원님 말씀대로 해를 거듭할수록 깐깐하게 골라 치고 있습니다.”
이인영은 다음 공도 골라냈다.
최대한 많은 안타를 뽑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스윙을 했지만, 작년부터 스윙 빈도가 눈에 띄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투수 입장에선 상대하기 더 까다로워진 것, 공 4개를 지켜보고 1루로 향했다.
‘7대 0과 8대 0은 다르지.’
1루에서 상황을 살피던 이인영은 2루로 뛰어버렸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 루이스 햄이 타석에 들어섰지만, 이번에도 홈런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6대 0에서 도루를 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그딴 식으로 야구를 배운 기억도 없고 아직 경기 초반,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철저한 절망을 주는 것, 이게 내 야구다.’
루이스 햄은 3구를 받아쳐 우중간으로 보냈다.
방망이 끝에 걸리면서 스핀이 먹힌 타구는 오른쪽으로 휘며 추락, 2루수와 중견수 우익수 사이에 떨어졌다.
그 사이 주자들은 모두 홈 인, 스코어는 8대 0으로 벌어졌다.
“최강이 뭐 이래? 시시하게”
더그아웃에 들어선 이인영은 카메라가 있는 구석에서 목소리를 흘렸다.
내셔널리그 최고 승률을 달리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려도 되는 건가. 카메라 맨 옆에 있던 기자들은 귀에 걸린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적었다.
[딱~!]
“이 타구는 배트 끝에 걸리면서 2루수 정면, 테드 반디의 세 번째 타석은 땅볼입니다.”
“지금은 타이밍을 뺏겼는데 배트에 걸렸거든요. 차라리 헛스윙이 된 게 나았을 텐데 말이죠.”
한편, 테드 반디는 내야 안타 이후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운도 안 따라주면서 계속 범타, 의식 안 하려고 했는데 공수주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이인영의 모습에 약간 자극을 받았다.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의욕이 앞서면서 페이스가 흐트러진 건 아닌지, 흐트러진 마음을 재정비 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경기, 경기는 필라델피아의 13대 2 완승으로 끝났다.
오늘의 수훈 선수는 세인트루이스 타선을 6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백전 노장, 이스터는 덤덤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했다.
“초반에 판정 논란이 있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본인은 그게 보크였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지만, 분명한 건 심판은 아웃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어린 선수를 낚기 위해 반칙을 했다고 설명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테드 반디의 경험 부족을 조롱해야 하는 건가, 기자들은 프로가 아니라 그런 배경은 고려하지 않고 질문을 한다.
그래서 가끔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것, 질문을 던진 기자는 이스터가 보크를 정당한 플레이로 둔갑시킨 걸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속는 게 바보, 수준 낮은 기사에 달려든 팬들이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 자식은 왜 쓸데없는 말을 … ’
한편, 상처를 받은 이인영은 호텔에서 이스터가 던진 말을 곱씹었다.
데뷔 이후 벌써 10년, 한국 나이로 30이다. 한국에서 슈퍼 루키, 괴물 신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내가 벌써 30이라니, 시간 정말 빠르지 않나.
나도 언젠간 세월의 역풍을 정면으로 맞는 건가, 그래도 20대 선수들에게 밀릴 나이는 아니겠지.
다음 경기에서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시즌 타율 0.372 - 홈런 23개 – 77타점, 최근 5경기 5할 3푼 6리, 경이로운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메이저리그에서 3할 7푼을 치는 타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홈런이 적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따악~!!]
“말씀드리는 사이 깊은 타구!! 2루수가 잡아 1루로 던집니다!! 세이프!! 이인영 선수가 내야 안타로 출루합니다!!”
“빠르네요. 정말 빠릅니다. 사실 어지간한 리드오프보다 훨씬 빠르죠.”
땅볼도 안타로 만들어 버리는 주력, 100kg이 넘는 선수가 축구선수보다 빠르다고 하면 믿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능력에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어지는 2루 도루, 눈 뜨고 코 베인 투수는 2루를 지켜보다 말없이 돌아섰다.
경험치는 이미 베테랑인데 신체 능력은 20대, 메이저리그도 그 능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지만 테드 반디도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양 팀은 8회 말까지 3대 3, 치열한 승부를 이어갔다.
“자 8회 말, 세인트루이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필라델피아는 로버트 필로 투수를 교체하는 군요.”
“테드 반디 선수의 약점은 바깥쪽 하이 패트스 볼 아닙니까. 와이즈 감독이 제때 교체를 하네요.”
로버트 필은 평균 구속이 98마일이 넘는 투수, 강속구 투수를 마주하면 타자는 어떻게 전략을 짤까.
일단 스트라이크 존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 높은 공을 치고 싶겠지만 방망이가 닿기 어려운 곳이다.
평균 구속이 140km 정도 되는 리그라면 높은 공은 치기 좋은 실투겠지만 이곳은 메이저리그, 높다고 막 휘두르면 곤란하다.
스트라이크 존을 낮게 설정하고 높은 공은 버리거나, 손 높이를 낮추고 짧게 돌리며 걷어 올리는 스윙하는 것도 방법, 테드 반디는 높은 공은 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95마일 이상 되는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는 건 불펜 뿐, 강속구 투수에 약점이 있다고 해도 시즌 전체를 망칠 약점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테드 반디가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 것, 하지만 클러치 상황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경기 후반에 나오는 투수들은 거의 다 강속구 투수들인데, 결정적인 상황에 못 쳐주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테드 반디는 차분하게 낮은 공을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99마일 높은 빠른 볼, 칠 볼이 아니라 건드리지 않았다.
“자, 이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군요. 볼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반디 선수가 불만이 많네요. 본인이 원하는 공이 안 들어오는데 카운트는 올라가고, 지금 답답하거든요.”
“이인영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 타자인지 여기서 다시 증명이 되네요. 이인영 선수는 95마일 이상 높은 빠른 볼 타율이 4할이거든요. 테드 반디 선수는 58타수 12안타입니다. 홈런은 1개 밖에 없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드 반디는 높은 공을 타격했다.
방망이 윗부분에 맞으면서 땅볼, 잉글리시아의 송구를 받아낸 이인영은 1루에서 발을 뗐다.
‘정규시즌 전용이군.’
포스트 시즌에는 95마일 강속구를 던지는 불펜이 경기 초반부터 등판한다.
세인트루이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고 해도, 테드 반디가 정규시즌만큼 활약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보면 부정적, 실력은 확실하지만 갈 길이 먼 선수라는 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