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몬스터 시즌 (10)
[이인영, 올해의 에브리데이(Every day) 선수 수상 확정]
정규 시즌이 끝난 10월 4일, 이인영은 미국 야구 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에브리데이 선수에 선정됐다.
수상 자격은 성적도 뛰어나야 되지만 시즌 동안 기복이 없는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영광이 주어진다.
이인영은 무려 61%를 쓸어 담으며 경쟁자들을 여유롭게 따돌렸는데, 월 별 성적을 확인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3~ 4월 : WRC+(187) fWAR(1.8)
■ 5월 : WRC+(150) fWAR(1.0)
■ 6월 : WRC+(202) fWAR(1.9)
■ 7월 : WRC+(190) fWAR(1.8)
■ 8월 : WRC+(245) fWAR(2.5)
■ 9월 : WRC+(200) fWAR(2.1)
가장 부진했던 5월도 평균 타자들을 월등히 앞섰던 기록, 12홈런을 퍼부은 8월의 활약은 어지간한 선수의 시즌 전체 WAR와 맞먹었다.
시즌 동안 특별한 부진도 없었고 단일 시즌 fWAR 11.1은 메이저리그 역대 2위 기록, 통계 전문가들도 흠집 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한해였다고 입을 모았다.
[구단이 연장계약을 제시할 가능성은 제로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여론은 압도적인 성적에 절망했다.
잘해도 정도껏 잘해야지, 이런 성적을 찍어버리면 구단에서 계약을 제시할 수 있나. 지금 구단이 연장계약을 제시할 가능성은 제로, 이인영도 현지 인터뷰에서 동의를 표했다.
“제가 구단이라도 지금은 계약 제시 안 할 것 같네요.”
“이것 하나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올해를 기준으로 하면 10년에 5억 달러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계약을 제시할 구단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말이죠.”
인터뷰 진행을 맡은 아론 호프만은 박수로 동의했다.
이젠 메이저리그 공룡 구단도 품을 수 없는 선수가 된 건가. 스스로 가격을 낮추는 수밖에, 이인영은 가능하다면 필라델피아에 남길 바란다는 뜻을 표했다.
“필라델피아 말고도 좋은 팀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문 팀에서 더 많은 우승 반지를 차지할 생각은 없는 겁니까?”
“다른 팀으로 가봤자 저는 굴러들어온 돌일 뿐이죠. 저는 남 밑에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메이저리그는 보수적이라 자기 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를 우대한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받고 명문 팀으로 이적해 봤자 이방인일 뿐, 그런 분위기라면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울 거다.
필라델피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니 어지간하면 여기서 끝을 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방청객에 앉은 필라델피아 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필라델피아에 남고 싶은 이유가 그것 뿐입니까?”
“그것뿐만은 아니죠. 그곳은 미인들이 많아서 야구 할 맛이 납니다.”
진행을 맡은 아론 호프만은 물론 방청객도 뒤집어졌다.
얼마 전 아들을 봤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너무 위험하게 진행되는 인터뷰, 하지만 이인영은 상관없다며 손을 저었다.
“세상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주위에서 계속 예쁘다고 말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예쁜 줄 알고 꾸미니까요. 이건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필라델피아 남자들은 그걸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그곳엔 미인들이 많은 겁니다.”
“그럼 당신도 아내에게 매일 사랑스럽다고 말해줍니까?”
“당연한 걸 왜 물으십니까?”
이인영은 카메라가 있는 쪽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렸다.
아내에게 표하는 애정, 주변 사람들은 민망한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은 열광했다.
“아, 그리고 필라델피아 팬들은 솔직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야구를 못하는 선수는 XX 같다고 욕하거든요. 잘난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겠지만, 야구를 못하면 욕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더 노력을 하니까요. 그런 분위기가 제게 더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필라델피아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다른 선수들은 오기 정말 싫어하는 도시지만 내겐 딱 맞는 환경, 하지만 이제 남은 계약기간은 2년 뿐이다.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시간이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겠지. 남은 2년도 최선의 플레이를 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인터뷰도 끝났겠다 더는 볼 일 없는 미국, 예약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내가 네 아빠다.”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아들, 아직 얼굴에 붉은 빛을 띠는 녀석을 품에 안아 들었다.
말로는 표현 못 할 감정, 지금까지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는데 더 행복한 삶이 있었는지 누가 알았겠나.
일단 아들을 내려놓고 아내에게 집중했다.
“많이 힘들었지?”
“괜찮아. 자기도 힘들었지 뭐”
“그러지 말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뭐 불편한 거 없어?”
“갑자기 또 왜 그래?”
“누구한테 들은 소리가 있어.”
이인영은 아내를 만나기 전,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여자의 관심은 오로지 아기에게 집중된다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걸 챙겨주는 게 남편의 역할인데, 무관심하면 아내는 어떻게 될까.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캐물었다.
“솔직히 애기가 너무 자주 울어서 잠을 잘 못자겠어.”
“그래, 그런 걸 얘기해야지.”
예비 남편과 대화를 할 뿐인데 왜 마음이 안정되는 걸까. 혜진 씨는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지금 힘든 걸 버텨냈을 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더 큰 행복?”
“그래, 애기가 울고 떼 쓰는 건 당연한 거잖아. 칭얼거리고 떼를 쓸수록 우리 애기도 어른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 아닐까?”
“어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닭살 돋게”
혜진 씨는 온 몸이 배배 꼬이는 감정을 느꼈다.
아기의 울음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이인영은 무리하게 멋진 말을 한 건 아니다.
올 시즌 역사에 남을 기록을 세웠지만 그래봤자 범타로 물러난 타석이 더 많다. 5월에는 갑자기 부진에 빠져 고생한 적도 있고, 그래도 끈질기게 버티며 어떻게든 버텨나갔다.
그러다 6~ 7월 들어 급격히 올라간 페이스, 5월에 잠깐 야구가 안 풀렸다고 짜증을 내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버텨낼 수 있었을까.
무려 10년 동안 프로 생활을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좋은 일만 있었겠나.
아기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겠지, 칭얼거리고 시끄럽고 가끔은 짜증도 나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좋아서 낳은 아이 아닌가.
그런 고난도 극복하고 성장한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본다면 우리 가슴도 뿌듯해지겠지, 혜진 씨는 그제야 진지하게 남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럼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가 힘 내야겠네?”
“그래야겠지. 나도 최대한 도와줄테니까 힘 내 보자.”
“으응~ ”
귀국 후, 이인영은 당분간 육아에 전력을 다했다.
몬스터 시즌을 보낸 덕분에 방송국 취재 열기가 뜨겁지만, 지금 내가 방송국에서 히히덕거릴 때인가.
친분 있는 사람들의 술자리 유혹도 이어졌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자기야, 전화 오는데?”
“안 나간다고 전해 줘.”
“아니, 이거 외국에서 온 전화야.”
그러던 어느 날,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전화를 받았다.
리그 MVP - 골드 글러브 - 실버 슬러거 수상자를 통보할 때가 된 것, 그런데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것 아니었나?
시즌 기록은 타율 0.343, 홈런 54개, 124타점, 이런 선수가 MVP를 못 받으면 누가 받겠나.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건성으로 답했다.
[생애 2번 째 MVP를 수상하셨는데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을 받았을 뿐입니다. 다른 말이 필요하신가요?”
[그래도 기사에 낼 수 있도록 조금 더 살을 붙여주시죠.]
“어 … 올해는 정말 완벽한 시즌이었습니다. 야구도 잘 됐고 뭣보다 제게 소중한 아들이 생겼으니까요. 당분간은 여론과 접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게 아드님이 귀여우습니까?]
“솔직히 미울 때도 있지만 귀엽다고 해줘야죠.”
30분마다 빽빽 울어대니 나도 미칠 지경, 안사람은 이걸 어떻게 견뎌낸 걸까.
직접 해보니 장난이 아닌 육아, 그래도 이 어려움을 넘기면 언젠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겠나.
인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성격, 묵묵히 싸움을 이어갔다.
“자기야, 애기 웃는다.”
“정말?”
“응, 여기 와서 봐”
그러던 어느 날 이인영은 아들의 미소와 마주했다.
매일 울기만 하던 녀석이 이젠 방긋 웃을 줄도 알다니, 그동안의 노고가 거짓말처럼 씻겨나갔다. 가끔씩 터져나오는 홈런에 힘을 얻는 것처럼, 육아도 이럴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 아니겠나.
소파에 눕힌 녀석을 두고 대화를 시도했다.
“다 좋은데 30분 마다 우는 건 어떻게 안 되겠니?”
“자기는 왜 딴 소리해. 애기가 우는 건 당연한 거라며?”
“어휴~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 ”
이인영은 자기 입에 주리를 틀었다.
이 녀석이 자주 우는 건 말이 많은 아빠를 닮은 탓일까. 실제로 어머니에게 넌 아기 때 어지간히 울어댔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날 쏙 빼닮아 보면 볼수록 귀여운 녀석,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겼다.
* * *
“우리의 경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시간은 흘러 12월 24일, 미국에서 제법 자극적인 기사가 날아왔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LA 머린스의 마이클 헤인스,
지난 2028년, 마이클 헤인스는 이인영을 누르고 리그 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뒤집힌 입장, 헤인스는 올 시즌은 내가 MVP를 차지할 거라며 경쟁을 선포했다.
“당신은 리(Lee)를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까?”
“당연합니다. 지금 그 선수의 독주를 막을 선수가 누가 있습니까?”
제멋대로 정한 라이벌 의식, 하지만 이인영은 인터뷰에서 헤인스는 눈에 안들어 온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 당신은 누굴 라이벌로 여기고 있습니까?”
“라이벌은 없습니다.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는 제 자신이니까요.”
“그래도 당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선수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몇 선수만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죠.”
오늘 따라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자들, 이인영은 고심 끝에 후보 몇 명을 제시했다.
“일단 필라델피아의 루이스 햄 선수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담장을 넘길 수 있는 파워를 갖추고 있죠. 작년 시즌도 부상 때문에 42경기 밖에 뛰질 못했지만 홈런은 11개를 때려냈습니다. 풀 타임을 치른다면 40홈런 이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선수는 누굽니까?”
“세인트루이스의 테드 반디 선수를 지목하고 싶습니다.”
테드 반디는 루키 시즌에 홈런 36개를 때려버린 초신성, 전문가들도 스윙은 이미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인영의 자리를 위협할 후보 중 한 명, 하지만 이인영은 그래봤자 1등은 내가 될 거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