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몬스터 시즌 (9)
“필라델피아의 역사가 되셨는데 앞으로 어떤 기록을 더 세우고 싶으신 가요?”
“글쎄요. 일단 살아남아야 기록도 세우겠죠. 살아남는 게 목표입니다.”
시즌 51호 홈런을 날린 다음 날, 이인영은 필라델피아 지역 여론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필라델피아 프랜차이즈 단일 시즌 49홈런 기록은 1978년, 월터 로아나가 수립한 이후 50년 동안 깨지지 않은 업적, 하지만 로아나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9년을 뛰면서 통산 타/출/장은 각 각 0.256/0.352/0.452, 1978년 기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평균수명이 5년밖에 안 되는 메이저리그에서 9년을 버틴 것도 대단한 거지만 어쨌든 본인에게도 아쉬움이 남았을 커리어, 오래 버티는 자가 대기록을 세우는 거 아니겠나.
500홈런이니 3000안타, 이런 숫자는 버티면 따라오는 기록, 지난 4년을 되돌아 봤다.
“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지 어느덧 4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한 선수에게 많은 홈런을 쳐 본 기억은 없네요.”
“그게 중요한 겁니까?”
“당연하죠. 한국에서는 만났던 선수를 만나고 또 만났습니다. 이런 말 하면 그 분은 불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한국에서 임선우라는 선수에게 홈런 9개를 때려냈습니다.”
“아~ 그 코리안 메이저리거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메이저리그는 그게 아니더군요. 만났던 선수를 또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단기간에 사라지는 투수들이 많다는 거죠. 그때 아~ 메이저리그는 정말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록은 살아남으면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이 인터뷰는 한국의 전설을 소환해 냈다.
메이저리그에서 100승을 거두고 한국의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임선우가 그 주인공,
임선우는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투구를 펼쳤지만 이인영 앞에선 바닥에 내던져진 개구리처럼 뻗어버렸다.
통산 피안타율 0.545, 홈런 9개, 18타점, 출루율 0.642, 피장타율 0.914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임선우는 기자들 앞에서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제가 이인영 선수한테 멀티 홈런을 맞았던 경기로 기억하는데, 그날 저희 팀은 3대 0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 맞은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원 볼에서 직구를 던진 게 맞은 거죠. 그러다 3회인가? 그때도 정면승부 하다가 맞았습니다.”
감독이 승부를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승부를 했다가 맞고 또 맞고 쳐 맞는 날의 반복, 하지만 임선우는 당시 결정을 후회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점수 차가 그렇게 벌어져 있는데 피하는 승부를 하면 팬들이 납득 할 까요? 제가 이인영 선수에게 통산 9개의 홈런을 허용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한 거죠.”
“이유가 뭡니까?”
“입지가 불안정한 유망주는 정면승부 하다 홈런 맞으면 바로 쫒겨납니다. 제가 메이저리그에 있을 때도 그랬고, 한국에서 선수생활 할 때도 그랬으니까요.”
임선우는 냉정한 현실을 밝혔다.
마이너리그에서 이제 막 올라온 선수가 벤치 사인 어기고 홈런 타자에게 정면승부 할 수 있을까?
15년 전, 임선우는 그렇게 행동하다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선수를 봤다. 한국도 마찬가지, 입지가 불안정한 선수가 벤치 사인을 거부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임선우는 당당히 그짓을 했다.
감독이 피하라고 해도 승부를 하다 맞았고, 그 다음에도 또 맞았다.
그런데도 프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입지가 그만큼 탄탄했다는 것 아닌가. 마음껏 정면승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투수에겐 영광, 임선우는 이인영 선수에게 허용한 9홈런은 내겐 훈장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팬들의 박수를 받아냈다.
[그런 거구나. 피홈런 9개가 욕을 먹을 일이 아니었네]
-> 임선우 메이저리그에서도 절대 도망치는 승부 안 했다. 맞아도 다시 던지고 또 던졌지, 그런데도 10년을 버텼다. 그러니까 전설인 거지.
-> 정면승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특권이었구나. 이제야 볼질 하는 투수들 마음도 이해는 된다. 욕하면 안 되겠네
하루 아침에 뒤바뀐 평판, 그리고 이인영은 메이저리그에서 4년 연속 30홈런을 쳐낸 선수다.
이런 선수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고 욕을 먹는다면, 볼넷으로 도망친 투수들은 뭐가 되나.
어쨌든 이 인터뷰로 다시 한 번 명성을 얻은 임선우는 이인호 위원을 대신해 메이저리그 중계를 맡게 됐다.
메이저리그 경력도 많고 해설에 활력을 불어줄 수 있는 인재, 그렇게 임선우는 해설경력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인호 위원님은 뭐 하신데요? 저 때문에 괜히 밀리신 거 아닙니까?”
“밀리긴 뭘 밀려? 감독 제의 들어왔다던데”
“오~ 정말이요?”
임선우는 박한우 위원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접했다.
한동안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인호 위원은 한진 타이거스 감독 제의를 받고 마이크를 내려놨다.
아들이 메이저리거 스타가 됐는데 아버지는 한국 프로야구팀 감독이라니, 집안이 너무 잘 나가는 거 아닌가.
하지만 박한우 위원은 감독이라는 말에 치를 떨었다.
감독, 스트레스를 얼마나 많이 받는 자리인가. 그냥 말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 해설위원이 100배는 나은 자리, 이인호 위원의 외도도 얼마 못 갈 거라며 선을 그었다.
* * *
“자, LA와 필라델피아의 경기를 시청자 여러분의 안방으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1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 세스 브런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시즌 타율 0.271 - 홈런 27개 – 77타점, 훌륭한 장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런들 선수가 올 시즌 리드오프 홈런이 7개나 있거든요. 장타력이 있는 선수라 킨사이드 선수도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LA는 에이스 킨사이드를 마운드에 올렸다.
시즌 막바지라 컨디션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지구 라이벌 산호세와의 격차는 겨우 1게임, 여기서 지면 포스트 시즌 진출 여부도 위태롭다.
물러설 곳이 없는 진검승부, 타석에 들어선 브런들은 바깥쪽 빠른 볼을 기다렸다.
올 시즌 킨사이드는 패스트볼을 바깥쪽 약간 높은 곳으로 던져 스윙을 이끌어 내는데, 이게 잘 먹히면 슬라이더와 커브를 떨어트리는 쪽으로 볼 배합을 정한다.
킨사이드의 슬라이더와 커브는 공략하기 어렵기로 정평이 난 구질, 브런들이 초구를 노린 건 당연했다.
‘이건 아니지.’
바깥쪽으로 너무 벗어나는 공, 킨사이드는 다시 몸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몸에 맞는 공을 내줬다.
다음 타자는 루이스 햄, 역시 빠른 볼을 던지다 안타를 허용했다. 순식간에 무사 주자 1 – 3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다시 보니 반갑군.’
타석에 서기 전, 이인영은 킨사이드와 눈빛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어제의 메이저리거가 내일의 마이너리거가 되는 세계, 그래도 킨사이드는 팀의 1선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게 통산 홈런 4개를 허용한 밥줄, 이인영은 앞으로도 킨사이드가 무강하길 기원했다.
“다시 바깥쪽, 킨사이드 선수가 쉽게 들어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 상대로 안 좋은 기억이 많거든요. 2년 전 포스트 시즌에서도 그랬고, 어쨌든 껄끄러운 상대일 겁니다.”
이인영은 철저히 빠른 볼만 노렸다.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고 떨어지는 브레이킹 볼로 유인한다, 얼핏 보면 킨사이드는 정석대로 하고 있지만 타자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특히 필라델피아엔 빠른 볼에 상당한 공격성을 보이는 선수들이 많다.
이런 타선을 상대할 때는 브레이킹 볼로 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킨사이드의 슬라이더와 커브는 카운트를 잡을 때와 유인구로 써먹을 때의 격차가 제법 있다.
카운트를 잡을 때는 한가운데 - 유인구로 쓸 때는 완전히 볼, 즉 킨사이드가 카운트를 잡는 변화구는 타이밍 뺏기 용 밖에 안 된다.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으니 빠른 볼이나 커터를 바깥쪽 걸치는 곳으로 던져 카운트를 잡는 것, 하지만 오늘 필라델피아 타선은 욕심부리지 않고 가볍게 밀어치는 타격으로 킨사이드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도 땅볼 하나면 병살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상황, 킨사이드는 고집스럽게 바깥쪽을 공략했다.
[따악~!!]
“밀어낸 타구를 좌익수가 잡아냅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태그 업!! 이인영 선수의 희생플라이로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냅니다!!”
“지금 구종은 체인지업, 땅볼을 노리고 던진 공이거든요. 이건 타자의 승리죠.”
이인영은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꼭 안타를 쳐야 투타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는 건 아니다. 상대의 의도를 무산시킨 것도 엄연한 승리, 킨사이드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따아악~!!
설상가상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에겐 우중간을 넘어가는 투 런 홈런(시즌 26호)을 허용, 에이스가 1회부터 대량실점을 하자 LA 벤치는 충격에 휩싸였다.
필라델피아만 만나면 힘을 못 쓰는 에이스, 오늘은 다를까 했지만 그 기대는 또 무너졌다.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경기는 계속됐고 필라델피아는 3회 초 2사 주자 1루 기회를 맞이했다.
타석에는 이인영, LA의 신임 감독 잭 콜튼이 사인을 냈다.
킨사이드 정도 되는 투수면 감독도 건드리지 못하는 게 사실, 그래도 지금은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긍지 높은 에이스는 도주를 택하지 않았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계속 날아가는데요?!! 묻고 따질 것도 없는 한 방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53호 홈런!! 필라델피아가 다시 한번 강력한 펀치를 박아 넣습니다!! 스코어 5대 0!! 킨사이드는 오늘도 필라델피아 징크스를 끊어내질 못합니다!!”
“그래도 저는 킨사이드 선수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선수들은 저렇게 못 던지거든요.”
동병상련이라고 임선우 위원은 킨사이드의 투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 LA 벤치는 침묵, 잭 콜튼 감독은 이닝을 마치고 내려온 킨사이드에게 고집 좀 그만 부릴 수 없냐며 폭발했다.
“팀 입장도 생각하라고!! 자네 명예만 중요한가?!!”
“당신은 신입이라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킨사이드는 올해 LA에서 7년 차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제 막 감독 생활을 시작한 잭 콜튼은 여기서 을(乙)일 뿐, 하지만 팀을 중시하는 잭 콜튼 감독은 킨사이드의 고집이 못마땅했다.
감독과 선수의 알력싸움이 시작됐는데 팀 성적이 좋을 수 있겠나.
어쨌든 올 시즌 14승 10패, 평균자책점 2.93을 기록 중인 킨사이드는 대체 불가능한 에이스, 감독은 바꾸면 그만 아닌가.
현장에 있던 구단 관계자도 킨사이드의 편을 들면서, 잭 콜튼은 감독 자리에 환멸을 느꼈다.
어차피 포스트 시즌 탈락하면 잘리겠지만 내 손으로 털고 나가는 게 낫겠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에이스의 폭주를 방관했다.
‘고맙다. 다섯 번째 홈런’
6회 초, 이인영은 초구를 받아쳐 우측 담장을 넘겼다.
시즌 54번 째 홈런, 나한테 이렇게 정면 승부 걸어주는 투수가 얼마나 있나. 마음 같아선 킨사이드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지만 싸우자는 짓이라 그만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