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몬스터 시즌 (8)
“어차피 모든 경기를 이길 순 없다. 팬들을 위한 서비스 제공에 충실하겠다.”
시즌 종료를 일주일 앞두고 필라델피아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스마일 컴퍼니는 시즌 포기를 선언했다.
필라델피아는 현재 81승 76패,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2위를 달리고 있다.
1위 애틀랜타와는 무려 7경기 차이, 와일드카드 경쟁도 희망이 흐릇하다. 어차피 못 나가는 포스트 시즌, 기자들을 초청해 내년부터 구장에서 판매할 신메뉴를 선보였다.
밀고 있는 메뉴는 한국 음식, 이인영이 워낙 좋은 활약을 하면서 필라델피아 팬들은 한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이인영은 경영진이 시즌 포기를 선언했다는 걸 불쾌하게 여겼다.
“어차피 모든 경기를 이길 순 없다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은 뭐가 됩니까? 우리도 포기하면 되는 건가요?”
어느 야구 팬이 먹기 위해 야구장에 오나.
물론 그게 목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야구를 하니까 사람들이 오는 거 아닌가. 포스트 시즌 진출 희망도 없으니 구단 수익 창출을 위한 홍보 대사 역할이나 하면 되는 건가?
이인영은 그렇게는 못한다며 선을 그었다.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 건지, TNT 파크 입점을 노리는 한국 기업 관계자는 선수를 설득하고 나섰다.
“저기, 죄송한 말씀인데 솔직히 맛도 없습니다. 어설픈 현지화를 할 바엔 차라리 한국에서 파는 음식 그대로 내세요.”
이인영은 이 자리에서도 할 말은 했다.
떡볶이 한 그릇에 17달러?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일단 맛이 없다. 어설픈 현지화를 하다 음식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린 것,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건가?
동료들에게도 먹여봤지만 돌아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이거 아직 안 파는 거지?”
“응”
“다행이네. 비극을 막을 기회는 있다는 거잖아?”
정말 현지 조사를 하긴 한 건가.
한탕 치고 빠져나갈 생각을 한 건 아닌지, 필라델피아에서 한국 음식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인들도 있다.
그런데 한국 기업이 이딴 식으로 장사를 하고 나가면 필라델피아 현지 팬들이 한국 음식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현지 한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짓, 이인영은 당신들 장사에 홍보 못 한다며 벽을 쳤다.
“절 홍보 모델로 쓰고 싶으면 현지인들한테 먹힐 수 있는 음식을 가져오세요. 그렇게 할 거 아니면 구단하고 마음대로 하시던가요.”
생각보다 완강한 태도, 결국 기업은 정책을 재검토 해야 했다.
“모든 경기를 이길 순 없겠죠.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입으로 포기한다는 말은 못 합니다.”
구단 관계자들에게도 대포를 쏘아올렸다.
투자를 하고 구단을 운영하는 건 당신들 뜻이지만 선수단의 사기를 꺾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경고, 팬들도 여기에 동조했다.
어려워진 포스트 시즌 진출,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승리보다는 구단 매출에 집중하겠다니,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팬들도 다음 시즌을 기대할 거 아닌가.
한 기자는 이러니까 통산 승률이 5할도 못 되는 구단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라며 일침을 놨다.
마케팅을 앞세웠다가 오히려 반발을 본 구단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9월 19일, 필라델피아는 세인트루이스를 홈으로 불러들였고, 이인영은 피어 와이즈 감독과 포지션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다.
“루이스를 우익수로 내보낼 생각인데, 자네는 어디로 갈 건가?”
“1루나 중견수로 들어가면 되겠네요.”
시즌 초, 신인왕 페이스를 달리던 루이스 햄은 부상으로 시즌을 망쳤다.
수비가 워낙 좋지 않아 우익수로 돌렸는데, 중견수로 프랭크 토마스의 수비 구역을 침범했다가 충돌, 무릎 근육이 망가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을 보이며 복귀를 선언, 그래 봤자 수비가 나빠 우익수 외엔 답이 없다.
평소 우익수를 보는 이인영이 자리를 양보해줘야 하는 상황,
대기록에 도전하는 선수에게 실례되는 제안이 아닐까. 하지만 이인영은 흔쾌히 자리를 양보했다.
루이스는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30경기에서 홈런 7개를 때려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솔직히 우익수로 출장하는 게 편하고 기록 달성에도 유리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루이스가 성장을 해야 팀도 좋은 거 아닌가.
고집이 센 편이지만 이런 것 가지고는 쩨쩨하게 굴지 않았다. 그렇게 루이스는 우익수로 출전, 이인영은 1루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돌아왔다.’
경기를 앞두고 루이스는 몸을 풀며 전의를 다졌다.
정말 잘 할 자신이 있었는데 허무하게 망친 데뷔 시즌, 남은 7게임이라도 수습해야 하지 않겠나.
처음부터 수비는 도움이 못 되는 실력, 타격에 모든 걸 걸었다.
“자, 1회 말 필라델피아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타석에는 루이스 햄, 4개월 하고도 22일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합니다.”
“필라델피아가 작년도 그렇고 올 시즌도 부상 선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거기다 주전 선수들이 초반에 부진했던 것들도 있고, 그 모든 게 루이스 선수의 부상에서 시작됐거든요. 5월만 버텨줬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지나간 5월을 두고 한탄했다.
5월에 6승 16패를 기록한 필라델피아, 그 때를 제외하면 나머지 달은 그럭저럭 버텨줬다.
부상 선수 속출과 주전의 부진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일어난 일, 하지만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루이스는 파워 부문 80점 만점을 받은 유망주, 내년에도 필라델피아의 주축이 될 선수라 기대를 걸었다.
[따악~!!]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이 선수의 타격을 보세요. 다른 거포들은 타격 할 때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어퍼 스윙이 되는데, 루이스 선수는 상체가 앞으로 나가 있죠? 보통 저렇게 상체가 앞으로 쏠리면 힘이 빠지면서 땅볼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도 강한 타구잖아요. 하여간 상식을 벗어난 타격을 하고 있습니다.”
[따아악~!!]
“자!! 말씀 드리는 사이!! 센터 쪽으로 멀어지는 타구!! 중견수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루이스 햄의 올 시즌 8호 홈런!! 복귀 전 첫 타석부터 홈런을 쏘아 올립니다!!”
“바로 이거죠!! 가볍게 컨택을 하는데도 밀어서 홈런을 칠 수 있는, 잠재력만 터진다면 매년 30홈런 이상은 일도 아닙니다.”
홈런을 날린 루이스 햄은 홈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돌았다.
별로 감격스러운 장면도 아닌데 아쉬움 때문에 붉어진 눈시울,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에도 웃음기 뺀 얼굴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타율 0.341 - 홈런 49개 - 119타점, 필라델피아 역사상 첫 50홈런 타자 등장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부상 없이 풀 타임을 치른 건 올해가 처음이거든요. 건강하다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 시즌입니다.”
“아들도 태어났고 이제 대형계약만 맺으면 되거든요. 49홈런보다는 50홈런, 119타점보다는 120타점이 낫지 않습니까? 여기서 다 채웠으면 좋겠네요.”
루이스 햄은 이인영을 유심히 지켜봤다.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나와 달리 뒷발에 중심이 남아 있는 자세, 타격에 정답은 없지만 많은 선수들이 저렇게 타격을 한다.
나는 원래 힘이 좋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확실히 자세의 안정성이나 선구안이 따라가질 못한다.
이대로 가야 하나 아니면 변화를 택해야 하나, 고심은 계속 됐다.
‘몸쪽 승부는 의미가 없다.’
한편,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 받았다.
잠깐이지만 이인영은 2년 차 시즌 때 몸쪽 공에 약점을 드러낸 적이 있다.
몸쪽 공을 때릴 때 상체가 먼저 뒤로 빠지며 타이밍이 뒤로 밀려버린 것, 한때 밀어치는 타격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밀어친 게 아니라 타이밍이 뒤로 밀린 것뿐이다.
그러다 올 시즌, 하체가 회전을 하기 전에 몸과 배트가 거의 동시에 도는 스윙으로 타이밍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가 49홈런, 메이저리그 배터리도 이제 이인영 상대로 몸쪽 승부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다.
2할 8푼만 쳐도 고타율이라는 소리를 듣는 메이저리그에서 3할 4푼에 50홈런을 앞 두고 있는 건 신의 영역,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할 상황이지만 감히 들어가질 못했다.
‘또 바깥쪽이네.’
2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발을 풀었다.
본인이 만족하지 못할 뿐, 이인영은 밀어쳐도 담장을 넘길 수 있는 파워와 기술을 갖췄다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올 시즌 밀어쳐서 담장을 넘긴 홈런은 7개 뿐, 물론 이것도 메이저리그 평균(15%)에 근접한 수치다.
복잡한 기술을 동반해야 하는 밀어치기보다 가운데로 몰린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일단 3구를 기다렸다.
‘또 바깥쪽’
지긋지긋한 코스 놀이, 정확성을 포기하고 힘껏 잡아당겼다.
[따아악~!!]
“좌측!! 멀리 가는 타구!! 계속 날아가 담장 위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시즌 50호 홈런!! 드디어 터질 게 터졌습니다!! 필라델피아 역사상 단일 시즌 첫 50홈런 타자!! 이인영 선수가 해냅니다!!”
“지금은 미처 잡아당기지 못한 타구를 어퍼컷 스윙으로 걷어 올렸습니다!! 배트가 자석이네요!! 공이 그냥 쩍쩍 붙습니다!!”
이인영은 씩 웃으며 베이스를 돌았다.
분명 잡아당기겠다고 마음을 정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에 반응해 버린 몸, 타석에 들어서는 오스틴 카터와 세리머니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MVP!!”
“MVP!!”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 보호 펜스 밖으로 나간 이인영은 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팀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개인 성적은 최고를 찍은 시즌, 웃어야 하나? 사방에서 날아드는 동료들의 축하 때문에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따아악~!!
“와아아~!!”
이인영은 이날 6회 말, 3번 째 타석에서도 우중간을 넘어가는 대형 홈런을 뿜어냈다.
시즌 51호, 피터 와이즈 감독은 멀어지는 타구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밀고 당기고 자유자재, 당겨치는 스윙을 하는 시대에서 이렇게 타격을 할 수 있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되겠나.
약간 흥분한 와이즈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다소 도발적인 말을 쏟아냈다.
“올 시즌 MVP는 리(Lee)의 몫입니다. 그는 다른 팀의 30홈런 타자보다 3배는 더 뛰어난 선수니까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기록을 보세요. 그 친구는 올 시즌 fWAR 10.4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의 절반이라도 해내는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됩니까?”
30홈런 치는 타자라고 WAR가 높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오늘 경기에서 시즌 32홈런을 친 세인트 루이스의 젊은 거포 테드 반디는 WAR 2.7에 그치고 있다.
결국 테드 반디는 이인영에 비하면 반푼이도 못 된다는 건가. 세인트루이스 여론은 발끈했지만 구체적인 반박은 하지 못했다.
어지간한 홈런 타자의 2배 이상을 해내고 있는 이인영,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무슨 말을 덧붙이나.
억울하면 실력으로 보여줘야 하는 무대, 테드 반디도 이렇다 할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