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몬스터 시즌 (7)
“지금 몸 어때?”
[사진 보내 줘?]
“그럼 더 좋고”
8월 26일, 이인영은 한국에 있는 예비신부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벌써 임신 9개월에 접어든 사람, 3~4개월 전까진 그렇게 티도 안 났는데 28주가 넘어가면서 급격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게 보이는데 애를 품고 있는 사람은 어떻겠나. 가끔 전화 통화는 하지만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궁금하고 답답해 미칠 지경,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진 한 장이 날아들었다.
‘어우~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렇게 야한 수영복도 아닌데 가슴과 배가 잔뜩 부풀어 오른 모습, 일단 사진을 확인하고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많이 힘들지?”
[힘든 건 둘 째 치고 나 너무 게을러 진 거 같아]
계속되는 근육통에 잠은 밀려오고 자도 자도 왜 이렇게 졸린 건지,
다행히 손이 아프거나 발이 붓는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체중이 10kg 이상 불어버렸다.
병원 갈 때마다 2~3kg씩 살이 찐 탓에 예비 신부는 지금 울상, 의사 말로는 아기를 위해선 많이 찌는 게 낫다고 하는데, 잔뜩 불어난 몸 때문에 예비남편이 실망하는 건 아닌가.
이인영은 그런 건 상관없다며 다독였다.
“괜찮아. 살은 찌면 다시 빼면 돼.”
[살 쪄도 상관 없다는 말은 안 하네?]
“에이~ 우리 서로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잖아?”
부부면 서로에게 관대해져도 되는 건가.
몸매가 망가져도, 잘못한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넘어가야 하나? 상대가 평생 안 볼 남이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을 거다.
하지만 상대가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라면 관계유지를 위해 더 신경 쓰고 노력을 해야겠지, 서로에게 너무 관대해지면 오히려 틀이 무너지지 않을까?
기왕이면 내 아내가 예쁘고 건강했으면 하는 게 남자의 바람, 그리고 나도 언제나 멋진 남편이 되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 아닌가. 서로 노력해야 유지되는 부부의 애정,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인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야, 내가 보낸 사진 봤어?]
“보냈으니까 당연히 봤지.”
[어때? 혐오스러워?]
“혐오스러운 게 아니라 그게… 부담스럽다고 해야 되나?”
[부담스럽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가슴이 원래 그렇게 부풀어? 내가 아는 그게 아니던데?”
혜진 씨는 예비 남편의 반응에 폭소했다.
본인이 봐도 부담스러운 사진, 이런 모습을 남과 공유할 수 있겠나. 친한 친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사진, 내 사람이니까 보여주는 거 아닌가. 시즌도 이제 막바지, 조만간 만날 날을 기약하며 통화를 마쳤다.
“범법행위도 아닌데 뭐가 문제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런데 이때 한국에서 때 아닌 논란이 일어났다.
국내의 어느 대학 교수가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 범법행위도 아니고 자식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혜택을 주겠다는 건데 그게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이냐는 것
그런데 한 기자가 대책 없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인영의 예비 아내가 원정 출산을 위해 곧 출국한다는 소문, 정말 뜬금 없는 소식이라 이인영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야구를 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지 못해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보낸 세월은 오늘의 영광을 위한 준비과정이었죠.”
이인영은 한국에서 학창생활을 보냈고, 그곳에서 6년동안 프로 생활을 한 한국인이다.
그런데 내가 기회를 못 얻었나?
좋은 인연들을 만난 덕분에 야구 실력을 키울 수 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원정 출산 자체를 비난할 생각도 없지만, 한국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불이익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 기사 낸 분은 저하고 한 판 붙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관용 따윈 베풀지 않을 겁니다.”
이인영은 한국 변호사를 고용해 문제의 기자와 정면 충돌했다.
여권도 안 끊었는데 무슨 근거로 원정출산 기사를 내보낸 건가. 멍청이는 몽둥이가 약, 기자 쪽에서 선처를 요구했지만 예고대로 관용 따윈 베풀지 않았다.
[역시 이인영, 진정한 한국인이다]
->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기회를 못 얻는 건 아니다 - 오늘부터 명언에 추가 된다.
[노력을 안 하는 거지, 무슨 한국에서 태어나면 기회를 못 받아? 너희들에게 기회가 없는 건 무능하고 게을러서다.]
-> 그런데 자식한테 쉬운 길을 제시하는 것도 부모의 능력 아니냐? 솔직히 이인영 자식이 미국에서 태어난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는 것 같은데?
-> 너 나가라. 그렇게 미국 좋으면 미국 가라고,
때 아닌 원정출산 논란으로 더욱 굳건해진 한국 팬심, 어쨌든 이인영은 얼마 남지 않은 시즌에 집중했다.
“야, 너 애는 꼭 한국에서 낳아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미국에서 출산하면 몇 경기 빠질 거 아냐? 네가 지금 애 보러 갈 때냐?”
그런데 어느 날, 이인영은 시답잖은 농담의 희생양이 됐다.
문제의 발언을 한 선수는 로버트 필, 50홈런을 앞둔 선수가 경기를 제끼고 아이를 보러 가는 게 손해보는 짓인가.
너는 아빠가 아니라 그런 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거라며 맞받아 쳤다.
“너는 20승 앞두고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출근할 거냐?”
“어… 그건… ”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말을 한 거야.”
한 방 먹은 로버트 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생각없이 내뱉은 말 때문에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마침 이인영은 너도 고소당하고 싶냐는 말로 동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정말 나까지 고소할 거야?”
“솔직히 고소하고 싶은 건 네 입이 아니라 성적이다.”
필승조라는 자식이 평균자책점은 4.27, 그런데도 7승 2패를 거두고 있다.
저 자식의 방화로 날려 먹은 선발진의 승리가 몇 개인가.
그런데도 후속 타자들의 선전으로 승리 투수가 된 녀석, 고소해서 승리를 다 반납시켜야 한다며 면박을 줬다.
“이거 왜 이래? 나도 할 만큼 하고 있잖아?”
“솔직히 7승이나 할 활약은 아니잖아?”
자존심이 상한 로버트 필은 뚱한 얼굴로 구석에 틀어박혔다.
따지고 보면 나도 할 만큼 하지 않았나.
62경기에서 70이닝을 던지며 투수진의 허리를 지탱했는데 겨우 이 정도 대우를 받다니, 지은 죄가 있어 반박도 하지 못했다.
* * *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46, 홈런 47개, 109타점, 악마와 같은 8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8월에만 타율 0.370, 홈런 10개, 19타점이거든요. 시즌 종료까지 20경기가 남아 있는데, 이러다 정말 60홈런 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8월 들어 이인영은 고감도 타격을 선보였다.
출루율 0.454 - 장타율 0.749, OPS가 1.2가 넘는 정신 나간 기록, 어느 투수가 정면 승부를 걸 수 있을까.
최근 경기만 따지면 볼넷으로 걸어나가는 게 일상, 첫 타석도 볼 4개 보고 1루를 차지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인영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웃이 되더라도 타자는 공을 쳐야 하는 입장, 볼넷으로 타석을 허비하길 바라는 선수가 있을까.
다음 타석에는 포수와 대놓고 밀담을 나눴다.
“승부 좀 해.”
“안 돼. 몸 쪽 던지면 너 홈런 칠 거잖아?”
“나라고 맨날 홈런 치냐? 너희들이 괜히 겁을 먹은 거라고”
“그런 말엔 안 속아.”
콜로라도의 포수 빌 뢰르는 바깥쪽 빠지는 빠른 볼을 요구했다.
타자들마다 타격 자세는 다르겠지만 일류 타자들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뒷다리가 마지막까지 돌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 홈런을 뻥뻥 치는 타자들도 하체와 상체의 협업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고난 파워가 워낙 좋아 상체만 회전시켜도 홈런이 나오는 축복 받은 재능, 하지만 타격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상체를 주로 활용하는 타자들은 하체가 상체를 받쳐주질 못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뺏겨 버리면 대응이 안 된다.
몸이 먼저 돌아가 버렸는데, 하체가 어떻게 상체에 브레이크를 거나. 이런 타자들은 유리한 카운트에서 느린 공을 던져주면 된다.
하지만 이인영은 그게 아니다.
뒷다리가 마지막까지 돌아가지 않고 버티기 때문에 빠른 볼 타이밍에 변화구가 들어와도 밀어내는 게 가능하다.
이런 타자들에게 초구부터 변화구를 던지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승부를 할 자신이 없다면 확실하게 빼는 공을 던지는 게 답, 최근 급격히 늘어난 볼넷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으음~또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출루율이 0.434, 타율에 비해 거의 1할 가까이 높거든요. 그렇다고 공을 많이 보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반응을 하는데 지금은 동물원에 누워 있는 호랑이 같네요.”
“하하~무슨 표현을 그렇게 아십니까?”
“아니, 한눈에 봐도 의욕이 없어요. 칠 공을 던져줘야 앞발이라도 들 거 아닙니까?”
박한우 위원은 2번 째 타석도 볼넷으로 출루하는 양아들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볼과 스트라이크의 경계가 명확하다면 제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투수가 타자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메이저리그에서 확실히 인정받는 타자, 그렇다고 볼넷이 많아지는 건 원치 않았다.
“지금 병원 갔다고 연락 왔네.”
“그래요?”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말,
이인영은 구단 마케팅 직원이자 통역을 맞고 있는 팀 레이븐을 통해 다급한 소식을 접했다.
9개월 밖에 안 됐는데 벌써 태어나려고 하는 녀석, 엄마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조금 일찍 나오려는 건가.
별일 없겠거니 했지만 신경이 쓰여 경기에 집중하질 못했다.
‘어이쿠, 이게 아닌데’
평소라면 화끈하게 날려 버릴 공도 평범한 외야 플라이,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잠시 발을 풀어봅니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글쎄요. 수비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건가요? 평소 이런 행동을 하는 선수가 아닌데 말이죠.”
이명한 캐스터와 박한우 위원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인호 위원는 입을 다물었다.
3회 말이 끝난 클리닝 타임 때 접한 다급한 소식, 이걸 중계석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
손주의 탄생이 눈 앞이라 할아버지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 그런데 아들녀석은 어떻겠나.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7회 말 종료, 이인호 위원은 쉬는 시간을 틈 타 미처 받지 못한 전화를 받았다.
“태어났어?!!”
[그래요. 우리도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네요.]
“어휴~다행이네 다행이야.”
이인호 위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니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중계석으로 돌아왔다.
“위원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 가족이 한 명 더 늘어나서요.”
중계석에서도 전달된 경사, 자칭 양아버지 박한우 위원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이거 팬들한테도 알려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 그런 건 기자들이 알아서 하겠죠.”
“그놈들은 헛소리해서 안 돼. 우리가 하는 게 낫지.”
박한우 위원은 기어이 사고를 쳤다.
기자들도 아직 접하지 못한 소식을 정규방송에서 폭로, 대한의 아들이 태어났다며 박수까지 쳤다.
“여러분 축하해주십시요!! 원정출산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한의 아들입니다!!”
이인호 위원은 선배의 쓸데없는 친절에 얼굴을 붉혔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그래도 할아버지가 됐다는 기쁨 때문인지 마음 한편은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