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몬스터 시즌 (5)
마음 가는 대로 살고 무모한 짓을 해도~
강하기만 한 사람은 언젠간 쓸쓸해질 뿐이야~
7월 23일, 이인영은 산호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 노래를 들었다.
강하기만 한 사람은 쓸쓸해진다니, 작곡가는 뭘 말 하고 싶었던 걸까.
가사에 자신의 인생을 대입해 봤다.
'그래 나는 그동안 내 마음대로 살았지. 무모한 짓도 많이 했고'
세상에 나만큼 자유로운 영혼이 또 있을까.
감독이 시키지도 않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코치진이 기를 쓰고 말린 전진 수비도 척척 해냈다.
거기다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부러 강한 척도 했는데 정말 이런 인생은 쓸쓸함을 남길 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공항에 발을 들였다.
[도착했어?]
“응 지금 호텔이야. 우리 애기 잘 있어?”
[훗~ 뱃속에 있으니까 잘 있겠지.]
짐을 풀자마자 예비신부와 전화통화를 나눴다.
다른 놈들한텐 강한 척 하고 나중에 따돌림 당해도 상관 없지만 가족에게 그런 대우를 받으면 정말 서럽지 않을까.
한껏 애정을 드러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평소 사랑한다는 말 안 하는 줄 알겠다.”
[그게 아니라 수상해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응 그런 일이 있었지.”
예비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혜진 씨는 폭소했다.
겨우 노래가사에 울컥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니,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닌가. 빈볼에 욱해서 주먹을 날리고 그라운드에서 누구보다 강하게 행동하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 너무 안 어울렸다.
[자기는 누구한테 미움 받는 거 싫어?]
“아니, 소중한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게 싫은 것 뿐이야. 나머지는 욕을 하든 말든 상관없어.”
[나는 평생 사랑해줄 테니까 걱정하지마.]
“응, 알았으면 됐어”
만족한 답을 들은 이인영은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 오늘 산호세는 행크 그림슬리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올 시즌 4경기 등판, 1승 1패, 평균자책점 3.73, 21과 2/3이닝 동안 볼넷 9개 삼진 1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중순에 복귀를 했죠. 다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림슬리는 작년 10월 폭력 혐의로 8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술에 취해 자고 있는데 깨웠다는 이유로 애인의 코를 부러뜨린 사건, 경찰조사 결과 이전에도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메이저리거의 품격을 털어트린 죄로 중징계를 받고 현장에 복귀 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솔직히 나도 싫어’
산호세의 커트 벤자민 포수는 뚱한 얼굴로 보호 마스크를 뒤집어 썼다.
투수를 편하게 해주는 게 포수의 역할이지만 저 자식은 사람 자체가 불쾌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 더는 중얼거리지 않았다.
‘젠장’
선두타자 브런들에게 안타를 허용한 글림스키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분노를 조절 못하는 게 문제,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까 볼넷으로 내보내며 위기에 몰렸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타율 0.335 홈런 30개, 71타점 올스타 전 이후 약간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슬럼프가 길지 않은 선수죠. 지켜보면 올라 올 겁니다.”
[따악!!]
“말씀드리는 사이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냅니다!!”
“지금은 오랜만에 밀어치는 타격에 나왔네요. 역시 이인영 선수는 이렇게 안타를 치면서 페이스를 유지하는 스타일입니다.”
우완 투수는 좌타를 상대할 때 어떤 공을 던질까.몸쪽으로 붙이면 공이 옆으로 휘는 움직임을 살려줄 수 있지만 몰리면 위험, 그렇다고 바깥쪽으로 붙이면 옆으로 휘는 움직임이 죽어버린다.
주심이 그날 따라 바깥쪽에 후하다면 모를까 수준급 우완 투수도 좌타를 상대할 땐 어려움을 겪는 게 일반적, 그림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설상가상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도 좌타, 그림슬리는 포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몸쪽으로 가겠다는 뜻, 벤치 사인은 바깥쪽이지만 벤자민 포수는 고집쟁이 입맛에 맞춰줬다.
“맞았어요. 1루로 가도 되죠?”
오스틴 카터는 가슴을 치며 주심과 시선을 마주했다.
유니폼을 스치고 지나간 공, 주심도 이에 동의했지만 그림슬리의 생각은 달랐다.
“까불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
맞지도 않았으면서 연극을 하다니, 하지만 주심도 그렇다고 하지 않나.
오스틴 카터는 네 말엔 설득력이 없다며 무시했다.
1회 부터 평정심을 읺은 그림슬리는 3안타를 맞고 2실점, 더그아웃의 누구도 그림슬리를 위로하지 않았다.
따아악!!
“오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경기는 어느덧 3회 초 필라델피아 벤치는 경악했다.
선두타자 존 이스터의 벼락같은 솔로 홈런, 통산 413타석에서 홈런이 하나도 없는 선수라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면 그림슬리는 뭐 씹은 표정, 포수가 던진 공을 거칠게 낚아챘다.
“내가 홈런을 쳤다니 믿기질 않아!!”
이스터는 펄쩍펄쩍 뛰며 더그아웃을 누볐다.메이저리그 첫승을 거뒀을 때에 버금가는 환희, 하지만 이인영은 하이파이브만 해주고 돌아섰다.
“이봐 그러지 말고 좀 더 기뻐해 주라고”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야”
하이파이브 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너무 냉정한 거 아니냐는 동료의 투정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웃을 때가 아니었군.'
이때 사건이 터졌다.
그림슬리의 초구가 브런들의 무릎을 강타한 것, 작년 시즌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접은 브런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저 자식 도대체 왜 저러냐.’
커트 벤자민 포수는 브런들을 진정시켰다.
지금은 동료인 내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투구, 충돌을 막기 위해 벽을 쳤다.
브런들은 겉 인상은 강해 보여도 싸움을 거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자주 쓰레기들의 희생양이 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 이인영은 친구의 복수를 다짐했다.
배트 투척, 강습타구, 그것도 아니면 홈런 한 방?
처분을 정하는 동안 잉글리시아는 좌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첫 타석에 팀의 선취점을 올리는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림슬리 선수 정도의 구위라면 큰 거 한 방 기대해 봐도 좋겠죠. 좋은 결과 기대해보겠습니다.”
초구는 바깥쪽 빠른 볼, 브런들은 맞춰놓고 나는 피하는 건가.만만한 사람 앞에서만 강해지는 못난 놈, 폭력을 행사할 가치도 못 느꼈다.
따아악!!
3구 타격, 장타를 직감한 이인영은 손에서 배트를 떠나보냈다.이어지는 타구 감상, 그림슬리는 격분했지만 이인영은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동료들한테 외면받고 애인까지 떠나간 녀석이 짖어봤자 서글픈 쪽은 누구인가.
무슨 말을 지껄여 봤자 서글프게 들렸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뭐야?!!”
한편, 더그아웃에 입성한 브런들은 그림슬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나면 달려들어서 주먹을 날릴 것이지, 안전한 본진에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도 이인영은 친구를 다독였다.
“그만 화 풀어. 너에겐 아리따운 애인이 있지만 저 자식은 아니잖아. 그 뿐이겠어? 애인 두들겨 팬다고 소문났으니 저 멍청이는 앞으로 연애도 못 할 거야.”
“음 ··· 그건 그렇지”
화가 풀린 브런들은 친구 옆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다독여 주면 화를 푸는 단순한 녀석, 하지만 이런 성격이 상대하기 편한 것도 사실 아닌가.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도 다 받아줬다.
“역시 넌 나를 좋아하는 구나. 앞으로 계속 같이 야구하자.”
“네 말은 두 군데가 틀렸어. 첫째, 난 널 싫어해. 그리고 나는 언제 트레이드 될지 모르는 몸이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에이~ 또 이상한 소리한다. 너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무슨 말을 해도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는 녀석, 그리고 브런들을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 이인영도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 * *
[운명의 시간 지나갔다.]
[이인영, 올 시즌도 필라델피아 선수로 남는다.]
8월 1일, 필라델파 여론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작년부터 풍기는 트레이드 소문, 올해도 많은 팀들이 이인영에게 입질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7월, 필라델피아는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면서 협상이 틀어졌다.
이제 내년 시즌이 끝나면 트레이드 거부권을 얻는 이인영, 필라델피아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정말 7년 2억 4천만 달러를 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내년에 다시 트레이드를 노릴 것인가.
어쨌든 필라델피아 홈 팬들은 트레이드 전선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을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시즌 타율 0.340 - 홈런 34개 - 81타점 최근 7경기에서 타율 0.357, 홈런 3개, 6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인영 선수는 평생 여기 남아야 됩니다. 퇴로가 막혔어요.”
2년 전, 이인영은 필라델피아 구단 역대 승률을 5할로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지켜지지 않은 약속, 팬들 가슴에 불을 지피고 떠나면 어떻게 하나.
홈 팬들은 당신은 평생 이곳에서 뛰어야 하며 퇴로를 끊었다.
아무리 좋은 활약을 해도 애정을 주지 않는 필라델피아 극성팬들이 이 정도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어디가도 사랑 받을 선수, 하지만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공을 강타했다.
[따아악~!!]
“타격!! 팬들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리(Lee)의 올 시즌 35호 홈런!! TNT 파크 가장 깊숙한 곳으로 타구를 날려 보냅니다!!”
“지금 몇 피트죠? 제가 봤을 땐 500피트 정도 날아간 것 같은데요.”
현지 중계진은 파울 폴대 위를 지나 사라진 타구의 행방을 쫒았다.
홈런을 맞은 워싱턴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구했지만 뒤집히지 않은 판정, 중계카메라도 정확한 낙하 지점을 포착하지 못했다.
장외로 날아가 버린 타구는 트랙맨도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 일단 474피트라는 결과를 내놨지만 현지 중계진은 이 수치를 믿지 않았다.
3층 덱 위를 넘어 사라진 타구가 겨우 그 정도라니, 팀 자일스 위원은 멍청한 기계는 믿을 수가 없다며 불만을 뿜어냈다.
“공은 찾았습니까?”
“아직 찾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한편, 기록원도 필라델피아 구단 직원과 정보를 주고 받았다.
사소한 것도 모두 기록하는 메이저리그, 시즌이 끝나면 통계를 토대로 가장 멀리 날아간 홈런 TOP 15를 선정한다.
1위는 몰라도 상위권에 들어갈 만했던 엄청났던 비거리, 하지만 끝내 타구는 찾지 못했다. 누군가가 주워갔는지 알 길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상황, 결국 474피트가 공식 기록으로 남았다.
필라델피아 여론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 하지만 이인영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400피트를 날아가든 500피트를 날아가든 홈런은 홈런, 그런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았다.
더 아쉬운 건 첫 타석 홈런 이후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 다음 경기에서도 힘차게 스윙을 돌렸다.
스탠스를 좁히면서 상체 회전이 좀 더 부드러워진 느낌, 지금이 내 베스트일까.
수많은 변화를 거쳐 진화한 타격 폼, 좋은 결과를 내고 있지만 이게 내 한계일까.
만족해버리면 성장은 거기서 끝, 열혈야구 청년의 노력은 계속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