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몬스터 시즌 (4)
[이인영, 4년 연속 올스타 출장 확정]
6월 13일, 사무국은 메이저리그 닷컴을 통해 올스타 출장 멤버를 확정했다.
이인영은 4년 연속 올스타에 뽑히며 지난 2003년, 카와지리 모리야츠가 세운 연속 올스타 출전 기록(3년 연속)을 갈아치웠다.
이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도 먹히는 선수, 한 일본 기자는 인터뷰에서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즐거움은 물론 시련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야구를 하면서 힘들거나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전 원래 야구를 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죠. 제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학창 시절 공부를 특출나게 잘했던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재주도 없던 내가 야구가 없었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었겠는가.
이 세상에 야구가 존재하는 건 내겐 축복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은퇴한 뒤에는 따분한 일만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새로운 취미라도 찾아보시는 게 어떤가요?”
“실은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야구보다 재미있는 걸 찾으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한다면 은퇴 후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이때 한 기자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는 선수인데 소식 팀 필라델피아는 올해도 가을야구 진출이 불투명하다.
작년 7월부터 끊이질 않는 트레이드 소문, 선수 본인도 올스타전이 끝나면 다른 팀으로 옮기는 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인영은 유도 질문에 걸려들지 않았다.
“제가 여기서 다른 팀으로 이주하고 싶다. 이런 말을 하길 기대하는 거죠? 그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방심하면 미끼를 던지는 기자들,
스타가 되면 취재요청이 많아지기 때문에 본인도 입조심을 해야겠지만 가십거리를 노리는 기자들의 함정도 잘 피해가야 한다.
인터뷰 하나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입장, 하지만 이것도 스타의 운명이라 이제는 익숙해졌다.
“당신은 저기 끝자리로 가세요. 제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쓸데없는 질문을 한 기자는 바로 유배형, 하지만 웃으면서 한 행동이라 훈훈한 분위기는 유지됐다.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홈런 더비에 참가하게 되셨는데 많은 스타 선수들이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도 출장을 강행하셨는데, 혹시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문제는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홈런 더비에서 안타는 의미가 없다.
당연히 참가자들은 풀스윙을 하게 되고 평소보다 힘을 더 쓰게 되는데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건 둘째 치고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이인영도 지난 3년 동안 홈런 더비에 불참, 그런데 왜 이번 대회는 참여하는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이미 말씀 드렸지만 야구는 제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홈런 더비도 그 중 일부죠. 부상이나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게 두렵다고 불참한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자가 마음 놓고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뿐, 사무국에 예정대로 참여한다는 뜻을 전했다.
[홈런 더비 상위권 선수들 대거 불참]
[대회 이어갈 의미가 있나?]
한편 여론은 스타 선수들의 소극적인 행보를 지적했다.
원래는 사무국의 신청과 선수의 자발적인 참석으로 진행된 홈런 더비, 그러다 2011년부터 양대 리그의 주장이 리그에서 선수를 추첨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나는 나가기 싫어.”
“나도 좀 빼 줘.”
그러다 지난 2013년, 문제가 터졌다.
내셔널리그의 주장 저스틴 버틀러는 신시내티의 거포 제임스 가드너를 홈런 더비 선수로 지목하지 않았다.
제임스 가드너가 넌지시 출전을 거부한 탓, 물론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신시내티 팬들은 저스틴 버틀러를 비난했다.
“가드너가 원하지 않아 뽑지 않은 거다. 그런데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나?”
버틀러가 해명에 나서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신시내티 홈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에서 신시내티 선수가 불참을 표했다니, 이게 말이 되나.
이 사건으로 가드너까지 비난을 받았고, 결국 사무국은 예전대로 홈런 더비 출정 선수를 정했다.
예상했던 대로 스타선수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흥미가 떨어진 축제, 앞으로도 이 대회를 유지할 의미가 있을까.
여론이 뭐라 하건 말건 이인영은 축제를 즐길 준비를 마쳤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2029,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 열리는 토론토 로즈데일 스타디움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김상우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이인영 선수가 홈런 더비에 출전하게 됐는데 자칭 양아버지로서 공이라도 던져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폭소에 휩싸인 중계석, 거기서 자칭은 왜 붙이나. 박한우 위원은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다스렸다.
“친아버지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앞으로 나서겠습니까? 저도 그런 눈치는 있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김상우 위원님은 오늘 홈런 더비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글쎄요. 이인호 위원님이 현역시절 그렇게 송구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약간 걱정도 됩니다.”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홈런 더비 출전 선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시즌 결승에서 18홈런을 쳐내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마빈 코머(시카고)도 그 중 한 명, 매년 15~ 20홈런은 쳐줄 수 있는 파워를 지녔지만 컨택은 그저 그렇다.
하지만 홈런 더비는 치라고 던져주는 게임, 순수 파워로 우승자를 가리는 무대라 올 시즌 29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이인영도 우승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자, 시작에 앞서 간단히 룰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투구 수, 아웃 카운트와 관계없이 3분 동안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가 다음 라운드로 진출, 450피트 이상 홈런을 3개 이상 기록하면 보너스 시간 40초가 주어집니다.”
“작년까지는 4분이었는데 올해부터 3분으로 줄었죠. 체력보다는 순수한 장타력을 발휘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봐야겠죠.”
작년 대회 우승자 마빈 코머는 긴장한 얼굴로 생수를 들이켰다.
작년 대회 결승에서 2분 50초 동안 9홈런에 그쳤지만 나머지 1분 10초에서 9홈런을 추가하며 극적으로 승리를 거뒀다.
타격감이 늦게 올라오는 편이라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도 시간이 긴 편이 좋았는데 약간 불리해진 규정,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배트를 쥐었다.
“와아아~!!”
우렁찬 홈 팬들의 환호와 함께 예선전이 시작됐다.
타석에 들어선 마빈 코머는 힘껏 스윙을 돌렸지만 결과는 드라이브 타구, 다음 타구도 강하게 때렸지만 담장 근처도 가지 못했다.
“어이!! 벌써 1분이나 지났다고!!”
“뭐 하고 있는 거야?!!”
1분이 넘어가는 동안 홈런은 겨우 3개,
마음이 급해진 코머는 더 강하게 스윙을 돌렸지만 2분 40초까지 8홈런에 그쳤다.
450피트 홈런을 3개나 날려야 주어지는 추가 시간, 더 멀리 날리려다 밸런스를 망치고 말았다.
3분 동안 날린 홈런은 겨우 9개, 탈락을 예감한 코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와아아~!!”
다음은 이인영의 타석,
한인 팬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아들에게 공을 던져주게 된 이인호 위원은 긴장한 얼굴로 캡을 눌러썼다.
선수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부자와의 호흡이 필수, 하지만 초구는 얼도당토 않은 곳에 안착했다.
‘좀 침착하세요.’
이인영은 손짓으로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프로 리그도 겪으신 분이 고작 배팅 투구에 이렇게 긴장하실 줄이야.
2구를 때렸지만 아리랑 볼이 생각보다 너무 낮게 떨어지면서 파울이 됐다.
천하의 이인영이 투수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볼 줄이야, 내셔널리그 선수들은 박수를 치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 저 사람 공 좀 봐. 뚝뚝 떨어지는데?”
“나한테도 그 공 좀 가르쳐 줘요!!”
“당신은 최고의 타자도 못 칠 공을 던지고 있어!!”
스타 선수들의 장난까지 날아드는 상황,
영어로 하는 말이라 이인호 위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했다.
‘이거 안 되겠는데, 내가 뭘 해야 하지?’
이인영도 고민을 거듭했다.
처음부터 우승을 위한 것도 아니고, 좋은 추억을 위해 참석한 대회 아닌가. 이런 때일수록 내가 조급해 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계속 가는데요?!! 담장 뒤로!! 계속 날아갑니다!! 29초 만에 첫 홈런이 나옵니다!!”
“서둘러야죠!! 다음!! 얼른!! 뭐하는 겁니까?!!”
박한우 위원은 이인호 위원의 투구를 독려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나갔을 텐데, 한편 감이 잡혔는지 이인호 위원은 치기 좋은 공을 계속 던져줬다.
따아악~!!
2분 30초 만에 홈런 9개 돌파, 여기에 10번 째 홈런이 453피트를 찍으면서 40초 추가 시간이 확보됐다.
절벽 끝에서 겨우 살아온 부자, 여유가 생긴 이인영은 타임을 요청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캡을 벗고 휴식, 이후 31초 동안 홈런 4개를 추가했다.
‘어라?’
여기서 아버지의 아리랑 볼이 다시 빛을 발했다.
급격히 떨어지는 궤적에 헛스윙, 이인영의 헛스윙은 평소 보기 힘든 장면이라 내셔널리그 선수단은 박수를 치며 폭소했다.
놀란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이인호 위원은 다시 투구 자세를 잡았지만 전의를 상실한 아들은 나머지 4초를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
예선전 기록은 홈런 13개, 좌석으로 돌아온 홈런왕은 동료 선수들의 질문에 휩싸였다.
“야, 네 아버지 어떤 투수였냐?”
“너한테 헛스윙을 끌어내다니 보통 투수가 아니었겠지?”
“그럼, 한국에서 200승 정도 하셨지.”
“오~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누구 아버지인데?”
이인영은 능글맞은 얼굴로 조롱을 받아쳤다.
이제는 내가 더 커졌지만 아버지는 한때 넘고자 했던 목표였다. 그런 분이 웃음거리가 돼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평생을 야수로 뛴 분이지만 KBO 200승 투수로 둔갑시켰다.
“다들 뭐라고 하는 거냐?”
“아버지 진짜 존경한데요. 절 헛스윙 시키는 건 메이저리그 투수들도 못 하는 일이라고 하네요.”
“그거 욕이야 이 녀석아.”
이인호는 주변 선수들의 악수 요청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들이 치도록 해야지 헛스윙을 잡아서 뭘 어쩌겠나. 다음에는 잘 던지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홈런 10개, 15개를 기록하면서 이인영은 예선전에서 미끄러졌다.
내셔널리그 홈런 1위의 추락, 하지만 이런 것도 홈런 더비의 재미 아니겠나.
이인영은 인터뷰에서 추억에 남을 대회였다며 소감을 밝혔다.
“우승을 못한 아쉬움은 없으십니까?”
“올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 대회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내년에도 아버지와 호흡을 맞출 생각이십니까?”
“그건 좀 곤란하겠네요.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훈훈하게 마무리된 인터뷰,
오늘도 인생을 즐긴 이인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후반기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