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몬스터 시즌 (3)
“오늘은 자네가 중견수로 나가 줄 수 있나?”
“그러죠”
5월 27일, 프랭크 토마스는 와이즈 감독의 부탁을 받았다.
문제는 루이스 햄의 수비, 루이스는 메이저리그 승격 이후 우익수로 출전하고 있다.
아마추어 시절 포수로 활동한 덕분에 어깨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수비, 처음부터 외야로 뛰던 선수가 아니라 타구 판단 능력이나 스텝을 밟는 것도 어색하다.
그렇다고 수비 범위도 넓은 편이 아니라 중견수가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데, 이걸 누가 할 수 있겠나.
멀티 플레이어 프랭크 토마스의 몫,
하지만 이 결정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자!! 높게 뜬 타구!! 중견수!! 우익수가!! 아~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군요!! 타구가 뒤로 빠진 사이 주자들은 모두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필라델피아가 여기서 대량 실점을 하고 마는 군요.”
“그것보다 부상이 염려되는데요. 작년의 악몽이 또 되살아나는 겁니까?”
중견수 토마스와 우익수 루이스의 충돌, 이 사건으로 루이스는 왼쪽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홈런 7개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향해 순항하던 선수의 이탈, 여기에 토마스도 10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필라델피아는 주축 선수 2명을 잃고 말았다.
작년에도 부상 때문에 상승세가 꺾였는데 똑같은 패턴이라니,
우승을 위해 연봉까지 깎아가며 필라델피아에 입성한 존 이스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운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잖아.’
이스터는 3점대 초중반을 오르내리는 안정적인 투구로 높은 평가를 받은 투수, 하지만 작년 시즌은 10승 11패, 평균자책점 3.89로 기대에 약간 못 미쳤다.
그런데 올 시즌은 3승 3패에 평균자책점 4.43, 이게 내 본 모습인가.
딱 평균에 수렴하는 실력, 이 정도 실력으로 운이 있고 없고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중심을 잡아줘야 팀도 반등할 수 있겠지. 다음 등판에 집중했다.
“아~ 이 타구는 다시 내야를 빠져 나가는군요. 이스터 선수가 다시 안타를 허용합니다.”
“작년 시즌도 192이닝 동안 203피안타 허용했고, 올 시즌도 많은 피안타를 기록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원래 이스터 선수가 삼진을 많이 잡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내야수비가 받쳐준다면 괜찮을 텐데, 필라델피아는 그게 아닙니다. 잘못된 만남이라고 해야겠죠.”
필라델피아 수비진은 총체적 난국,
2루수 조시 빌라는 골드 글러브를 2번이나 받았지만 이젠 나이도 있고 뭣보다 2년 전 당한 부상이 수비 범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
그렇다고 유격수와 3루 수비가 튼튼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수비 구멍을 채워주던 프랭크 토마스까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밑천이 드러난 수비, 맞지 않으려는 피칭을 하다 보니 볼이 많아지고 투구 수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날도 이스터는 5이닝을 겨우 넘기고 강판, 자비 없는 팬들의 야유가 쏟아 졌다.
‘난 너희들이 싫다.’
이인영은 위축된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결과를 떠나 적어도 이기겠다는 투쟁심은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더는 지켜볼 수 없는 팀의 추락,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의 동의를 받아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본론부터 말할 게, 내가 너희들 싫어하는 건 알지?”
아무 답이 없는 선수들, 농담이나 하겠다고 이런 자리를 마련했겠는가. 본론은 지금부터, 다들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거 아냐? 난 너희들이 못해서 팀이 지는 게 더 싫어.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는다.”
결국 다 잘 함께 잘 해서 이겨보자는 뜻 아닌가.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심기를 다잡고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우리가 싫다고?’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나온 세스 브런들은 동료의 말을 되새기며 연습 배팅을 돌렸다. 현재 브런들의 성적은 타율 0.246, 홈런 4개에 그치고 있다.
2년 전 대박을 터뜨리며 1억 달러가 넘는 대형 계약을 따냈지만 작년 시즌은 부상으로 거의 전 시즌을 날려 먹고 올 시즌도 이렇다 할 활약이 없다.
나도 내가 혐오스러운데 다른 사람들 눈엔 어떻겠는가, 너희들이 싫다는 발언도 이해는 됐다.
‘내가 싫다고? 그래, 사랑하게 만들어 줄게.’
브런들은 평소 가벼운 언행으로 분위기 메이커를 주도했지만 이 날은 웃음기 빠진 얼굴로 타석에 섰다.
[딱~!!]
“파울입니다. 브런들 선수가 이걸 놓치는군요.”
“브런들 선수가 작년과 비교해 스탠스가 좀 더 넓어졌거든요. 이건 체중을 미리 장전해 놓고 치겠다는 뜻이라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그럼 이인호 위원께서는 뭐가 문제라고 보십니까?”
“지금 보시면 상체가 클로즈 될 정도로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거든요. 이게 타이밍에 뭔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타격은 어렵습니다. 브런들 선수가 2년 전에 3할 29홈런을 쳤고, 작년에도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좋은 타격을 보여줬는데 올해 이렇게 추락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브런들은 3구를 때렸지만 타이밍이 밀리면서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시즌, 와이즈 감독은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브런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2달 동안 계속되고 있는 브런들의 부진, 1억 달러를 넘게 주고 잡은 선수라 벤치에 앉힐 수도 없다.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은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건가.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까지 땅볼로 물러나면서 와이즈 감독의 근심은 깊어졌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타율 0.339, 홈런 15개, 38타점,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작년 시즌 강한 타구 비율이 39%였는데, 올 시즌 48%까지 올랐거든요. 참고로 작년 시즌 15홈런을 날린 게 6월 17일이었습니다. 지금이 5월 28일이니까 훨씬 빠른 페이스죠.”
“확실히 장타가 늘어났죠. 초구에 대한 공격성도 더 높아졌고 한 층 더 위험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인영은 브런들과 약간 다른 모습으로 타이밍을 잡았다.
좁은 스탠스에서 발을 뻗으며 힘을 실어주는 타격, 작년만 해도 스탠스를 이렇게 좁혀 놓진 않았다.
일반적으로 스탠스가 넓은 선수는 몸을 더 회전 시켜 파워를 내는데, 스탠스가 너무 넓으면 테이크 백을 할 때 몸이 충분히 회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걸 예방하려면 스탠스를 약간 좁히고 앞발을 치고 나가면서 스윙을 하는 게 좋은데, 물론 너무 스탠스를 넓게 잡으면 팔로 스윙을 리드하면서 스윙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어떤 스탠스가 최적의 결과를 낼지는 선수에 따라 다른 법, 이인영도 이 짓을 10년 동안 하고 있지만 완벽한 답을 찾아내질 못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해왔는데 더 잘 하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무너지는 건 아닌지, 변화를 택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나.
두려움보다 자신감을 앞세웠다.
[딱~!!]
“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팀의 첫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역시 작년에 비해 상체를 더 활용하는 스윙을 하고 있죠. 지금은 단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네요.”
피츠버그의 선발 애런 카터는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유독 존재감이 뚜렷한 한 선수, 짧은 안타면 그럭저럭 선방한 거 아닌가. 다행으로 여기고 투구를 이어갔다.
이인영이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아시아에서 넘어온 젊은이가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다니, 이곳에 잔뼈가 굵은 선수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길 정도, 메이저리그 경력 4년 차에 접어들면서 상대 투수들이 이인영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 달라졌다
초원의 짐승들이 물가에 나타난 사자를 보고 알아서 자리를 피하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맹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1루에서 멀어졌다.
‘허무하군.’
후속타자 오스틴 카터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이닝 종료, 더그아웃으로 물러난 오스틴 카터는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안 되는 걸 어떠나. 다음 타석에서도 차분하게 볼을 고르는 친구를 지켜봤다.
“아저씨는 저 선수의 절반도 못 되요!!”
이때, 한 어린 팬이 오스틴 카터를 비난 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시비를 걸어오다니, 하지만 너그러운 카터는 허허 웃으며 받아줬다.
“저 자식의 절반 정도만 해도 잘하는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그런데 아저씨는 절반도 못하잖아요.”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거야.”
카터는 지금까지 타율 0.255, 홈런 7개, 17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어찌 어찌 절반은 따라가고 있는 상황, 마침 친구가 볼넷으로 걸어 나갔고 1사 주자 1 - 3루 찬스를 이어 받았다.
[따아악~ ]
“어~!!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담장 너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스틴 카터의 쓰리 런 홈런!! 필라델피아가 단숨에 경기를 뒤집습니다!! 스코어 3대 1!! 무려 32이닝 만에 리드를 잡습니다!!”
“이 한 방이 부진 탈출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2주 만에 홈런 맛을 본 카터는 먼저 홈을 밟은 동료들과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넌 반푼이도 못 된다는 꼬맹이에게도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고, 필라오스틴 카터는 이날 혼자 2홈런 5타점을 쏟아 부으며 팀의 4연패를 끊어냈다.
기자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받은 게 며칠 만인가.
오스틴 카터는 기자들에게 그동안 당신들의 관심이 절실했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생애 두 번째 멀티 홈런 게임이었는데, 오늘 감이 좋았던 겁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은 정말 이겨야겠다는 집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집념이라고요?”
“네, 어제 경기가 끝나고 리(Lee)가 저희들을 앞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난 너희들이 정말 싫다, 그런데 너희들이 부진하고 팀이 패배하는 건 더 싫다고 말이죠.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름대로 자극이 된 것 같습니다.”
카터는 여기에 꼬맹이에게 당한 조롱도 털어놨다.
이인영의 반도 못되는 선수라니, 웃어넘겼지만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말 아닌가.
작년 시즌 성적은 0.241, 홈런 18개, 73타점, 나쁘진 않았지만 이 정도 선수는 언제든지 대체 할 수 있다. 30홈런은 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언제까지 만년 유망주로 남을 건가.
적어도 반푼이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금 이인영 선수가 50홈런 페이스를 달리고 있는데, 그 절반이라면 당신은 25홈런을 쳐야하지 않겠습니까?”
“30홈런입니다. 올해는 반드시 30홈런 칠겁니다.”
“똑같은 말 6년 째 듣고 있는 우리 입장도 생각해주십쇼.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기자들은 또 무례한 장난을 쳤다.
매년 30홈런 친다고 말만 하면 뭐하나.
기자와 팬들이 원하는 건 결과, 카터는 30홈런 못 치면 이 팀을 떠나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올해가 풀타임 6년 차라 어차피 FA로 풀리는 몸, 남느냐 떠나느냐는 내 몫이라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