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안 되면 되게 하라 (9)
[형, 저 이번 전국체전 우승했어요]
“그래, 잘 했다. 봐 하면 되잖아.”
[형이 격려해 준 덕분이죠 뭐]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다 네가 노력해서 거둔 결과지”
9월 27일, 이인영은 한국에서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작년 전국체전 10위권에 머물렀던 함진우의 대역전극, 내가 한 건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뿐인데 이런 전화를 받아도 되는 건가.
어쨌든 동생이라도 잘 돼서 다행, 내년에 열리는 올림픽에도 도전해 보라며 격려해줬다.
[형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뭘 포기하지 마 인마, 이미 끝났는데”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애틀랜타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둘 때만해도 분이기가 좋았는데, 이후 필라델피아는 3승 6패를 거두며 목표에서 멀어졌다.
시즌 종료까지 남은 경기는 3게임 뿐, 와일드카드 출전 희망도 사라졌다. 나름대로 노력해봤지만 주전들의 부상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제 중요한 건 시즌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는 것, 착잡한 마음으로 마지막 시리즈를 준비했다.
[머마드 구단 부사장, 에이전트 제프 메츠와 1시간 동안 통화]
이 와중에도 트레이드 루머는 이어졌다.
구단 부사장이 뭣 때문에 에이전트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통화를 나눴겠는가.
제프 메츠는 인터뷰에서 트레이드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구단과 대화를 나눴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트레이드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프 메츠는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장기계약을 맺겠다고 바람을 넣고 이제 와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필라델피아 구단, 사실 구단 입장에선 아쉬울 거 없다.
6년 5000만 달러를 들여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선수를 영입해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했는데, 줄 돈 다 주면서 묶어두려 하겠는가.
이제 남은 계약은 3년 2500만 달러, 대형 구단에 내주고 유망주를 받아오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 큰 문제는 이인영이 5년 차 시즌에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
트레이드 거부권은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이상 뛴 선수가 한 팀에서 5년 이상 뛰어야만 인정되는데, 이건 메이저리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선수에게 적용되는 규정이다.
외국인 드래프트로 메이저리그에서 입성한 선수에겐 다른 규정이 적용되는데, 외국 리그에서 뛴 기간도 합산해주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이인영은 한국에서 6년, 메이저리그에서 3년차 시즌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1년만 더 뛰면 10년 경력을 채우게 되는 거고, 필라델피아에서 2년을 더 채우면 트레이드 거부권이 자동 발동된다.
즉, 필라델피아 구단이 이인영을 트레이드 할 생각이 있다면 2년 안에 해야 한다는 것, 실패하면 다음 해에도 동행하게 되고 이인영은 FA 선수로 풀린다.
그렇게 되면 필라델피아가 얻는 건 제로, 시즌이 끝난 뒤에도 트레이드 논의는 계속되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그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닙니다. 트레이드 된다면 받아들일 뿐이죠.”
“연장계약을 제시하지 않는 구단에 서운한 감정은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구단이 계약을 제시하지 않는 건 이 팀의 미래에 제가 필요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필라델피아는 제가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기회를 준 구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팀에서 제 가치를 증명해 냈습니다. 손해만 본 건 아니니 서운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외부의 잡음은 철저히 배제하고 경기에만 집중, 밀워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무슨 일이십니까?”
[구단에서 계약을 제시했습니다.]
호텔 안에서 에이전트의 전화를 받았다.
필라델피아 구단에서 7년 1억 8천만 달러를 제시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건 2억 달러 이상의 계약이다.
30을 앞둔 선수에겐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대형계약, 한창 주가를 올린 내가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되는 건가.
필라델피아 구단에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졌다고 쳐도 우승으로 갚았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서로 볼 일 없으면 헤어지면 그만 아닌가.
돈 더 달라고 매달리지도 않았다.
* * *
“자, 오늘 밀워키는 버논 빌링스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8경기 등판, 10승 4패 평균자책점 2.11, 108와 2/3이닝 동안 볼넷 39개, 탈삼진은 12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죠. 밀워키가 올 시즌 선발진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혜성처럼 나타나 팀의 앞날을 비추고 있습니다.”
“정말 메이저리그는 인재가 끊이질 않는 것 같습니다. 팬들이 어느 한 스타의 얼굴에 익숙해 질만하면 다른 스타가 나타나거든요. 이런 무대에서 20년을 뛰고 명예의 전당까지 오르는 선수는 정말 대단한 겁니다.”
경기를 앞두고 밀워키 팬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빌링스가 삼진을 잡을 때마다 거행하는 의식,
지난 9월 17일 워싱턴과의 홈경기에서 빌링스는 7이닝 동안 삼진 14개를 잡아내는 위력투를 펼쳤다.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을 결정짓는 승리라 더욱 임팩트가 컸던 경기, 몇 몇 전문가들은 이닝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신인왕 수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지만 2점대 평균자책점과 압도적인 투구 덕분에 유력 수상자로 급부상 했다.
이에 맞서는 경쟁자는 필라델피아의 선발 제프 야쿠보우스키, 첫 등판에서 7이닝 무실점 승리를 거둔 야쿠보우스키는 현재 10승 6패, 평균자책점 3.06을 기록하고 있다.
세부 성적은 150이닝, 볼넷 59개, 172탈삼진, 108이닝 밖에 던지지 못한 빌링스에 비하면 누적 성적에서 확실히 앞서 있다.
많은 전문가들도 야구보우스키의 신인왕 수상에 표를 던지고 있지만 적어도 밀워키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여주라고!!”
“올 시즌 신인왕은 네 몫이야!!”
빌링스는 홈 팬들의 응원에 어깨를 들썩였다.
여기서 경쟁자를 꺾으면 전문가들의 생각도 달라지겠지, 여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의욕을 불살랐다.
‘이걸 잡았다고?’
1회 초 필라델피아의 공격, 초구를 강타한 프랭크 토마스는 벙찐 얼굴로 투수를 노려봤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점핑 캐치, 토마스는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자, 이제 산체스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타율 0.261, 홈런 29개, 78타점, 최근 5경기에서 홈런 3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비도 대단하지만 공격력도 수준급이죠. 최근 감이 좋기 때문에 빌링스 선수도 성급한 승부는 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빌링스는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최고 98마일까지 나오는 빠른 볼과 86마일을 넘나드는 슬러브, 전형적인 투 피치 투수지만 세컨드 피치인 슬러브의 위력은 말 그대로 타자를 얼려버릴 정도다.
좌타자에게 약점이 있지만 아직 피칭이 완성되지 않은 21살 청년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할 순 없지 않은가.
지금도 충분히 뛰어난 활약, 블레이크 포수도 자신감을 살려주는 리드를 택했다.
“와아아~!!”
초구와 2구 모두 빠른 볼, 산체스의 방망이는 연신 허공을 갈랐다.
우타자 입장에서 바깥쪽으로 멀어지기 때문에 골라내기도 치기도 어려운 궤적, 빌링스는 타자 가슴 높이에서 무릎으로 떨어지는 슬러브로 산체스를 돌려세웠다.
어김없이 하늘로 향하는 손가락,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산체스는 빌링스에게 욕설을 날렸다.
“좋냐? 코찔찔이 XX야.”
빌링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요즘은 타자도 홈런 치고 배트 플립 하는 시대인데, 삼진 잡은 투수가 세리머니하면 안 되나.
블레이크 포수는 타석에 들어서는 이인영에게 불만을 중얼거렸다.
“너는 삼진 당하고 저 자식처럼 양아치처럼 굴지 말라고‘
이인영은 반응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심기가 상한 산체스가 필요 이상의 반응을 한 건 사실, 어린애 상대로 발끈해 봤자 어른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
3구를 때렸지만 결과는 우익수 플라이 아웃, 이후에도 필라델피아 타선은 5회까지 단 한 명도 출루하지 못하는 대굴욕을 당했다.
저 어린놈에게 우리가 이런 능욕을 당해야 하나.
포스트 시즌 진출도 실패했는데 여기서 노 히트 노런이나 퍼펙트를 허용한다면 역사에 남을 치욕, 하지만 이인영은 별 말없이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었다.
“넌 올해 실패했어!!”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니까!!”
홈팬들은 조롱과 도발을 계속했다.
올 시즌 이인영은 타율 0.347, 홈런 36개, 108타점 나름대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MVP 수상은 LA 머린스의 마이클 헤인스가 유력,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도 실패했다.
패배자에게 변명은 필요 없는 법, 다음 타석에만 집중했다.
‘여기가 최대 고비다.’
승부를 앞두고 빌링스는 흐트러진 윗옷을 가다듬었다.
지금 상황은 6회 초 2아웃, 단 한 명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누구나 유년 시절 메이저리그에서 퍼펙트나 노히트를 거두는 꿈을 꾸지 않나, 지금 그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거대한 산 하나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앞 선 두 타석은 모두 범타 처리했지만 이번에도 잘 될까.
일단 블레이크 포수의 요구대로 바깥쪽 빠른 볼을 집어넣었다.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저희가 이인영 선수를 응원하는 건 당연하지만, 지금 투구는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실투가 거의 없습니다.”
“이 선수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가치가 있네요.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메이저리그 역사를 쓸 수도 있겠습니다.”
빌링스는 2구를 초구와 비슷한 곳으로 던져 파울을 유도했다.
이인영이 이렇게 고전하는 건 보기 드문 일, 필라델피아 벤치가 침묵에 빠진 사이 흥이 난 밀워키 팬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너한테 뺏는 삼진은 각별하지. 저 녀석의 성장에 좋은 양분이 될 거야.”
블레이크 포수도 도발에 합류, 하지만 이인영은 별 말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따악~!!
“앗!! 안 돼!! 맙소사!!”
타격이 되는 순간, 빌링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완벽하게 구사한 내 슬러브를 걷어낼 줄이야, 2루수가 뛰어 올랐지만 타구가 외야에 떨어지면서 노히트와 퍼펙트 모두 무산됐다.
잔칫집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는 안타, 이렇게 빌링스는 17타자 연속 범타 처리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이날 9이닝 1피안타 무실점, 14탈삼진 역투를 펼치며 시즌 11승을 수확, 기자들 앞에서 신인왕 수상에 가까워진 소감을 밝혔다.
“뭐 … 글쎄요. 솔직히 기쁘긴 하지만 퍼펙트게임을 눈앞에서 놓친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네요.”
“뭐가 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엔 완전 빠지는 공이었는데요. 리(Lee)가 그 공을 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말한 대로 저는 완벽한 유인구를 던졌습니다. 홈 플레이트에서 대략 2/3 정도 빠진 공이었죠. 그런데 그의 스윙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다른 타자들은 구석으로 몰아붙이면 방망이가 따라 나왔는데, 이인영은 그렇지 않았다.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어떻게든 공을 타격하는 집요함, 인상적인 타격이었다며 상대의 실력을 인정했다.
“이인영 선수, 퍼펙트를 저지하는 안타를 기록하셨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그 시각, 이인영도 한국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았다.
별 다른 활약은 없었지만 팀의 자존심을 살려낸 안타, 하지만 이인영은 거드름보다 상대의 실력을 칭찬했다.
“퍼펙트게임은 투수에겐 평생 남을 기억이자 추억이 되겠죠.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빌링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게 뭔가요?”
“그 친구는 지금 아쉬움을 곱씹고 있겠죠. 하지만 급하게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선수에겐 아직도 많은 시즌과 기회가 남아있죠. 그 정도 실력이면 언젠가는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겁니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요.”
“하하~ 상대 선수를 격려해주시는 건가요?”
“네, 저도 이제 30이 다 됐으니까요. 언제까지 트래시 토크로 상대를 자극하고 싶진 않네요.”
그렇게 마무리 된 인터뷰, 밀워키 여론은 이인영의 타격 실력에 경의를 표했다.
아쉽지만 어쨌든 멋진 승부였고 적장도 빌링스가 언젠가는 밀워키 역대 첫 퍼펙트게임 달성자가 될 거라고 격려해주지 않았나.
산체스의 도발이 있긴 했지만 훈훈하게 끝난 마무리, 하지만 인터뷰와 달리 이인영은 마음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올해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다를 거라는 독기를 품고 시즌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