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안 되면 되게 하라 (8)
“자, 애틀랜타가 다시 투수를 교체하는 군요. 대니 알버스 선수가 올라옵니다.”
“참 행복한 투입이네요. 선발 자원이 구원으로 올라옵니다.”
시즌 초만 해도 필라델피아에 밀려 2위에 머물렀던 애틀랜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양 팀의 입지는 바뀌었다.
10승 투수만 5명이 있는 선발진, 여기에 잠재적인 선발 자원도 2명이나 있다. 투수진이 넘쳐나다 보니 불펜 포지션이 고정되지 않았는데도 불펜 평균자책점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 감독 입맛에 따라 선발이 불펜, 불펜이 선발로 투입되는 경기가 계속 되고 있다.
투수진이 부족한 필라델피아와는 너무 대조적, 어쨌든 대니 알버스는 땅볼과 삼진 하나를 엮어 팀의 위기를 막아냈다.
‘정말 안 되는 건가.’
필라델피아의 와이즈 감독은 굳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오늘 지면 격차는 4경기로 벌어지는데 9월 중순에 4경기 차를 뒤집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 시리즈에서 최소 2승 1패는 거둬야 승산이 있는 싸움, 하지만 3대 1로 지고 있다.
이인영에게 도루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없었다면 1점이라도 낼 수 있었겠나. 선수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발악하고 있는데 감독이라는 사람이 왜 도루했냐고 따지고 들었으니, 마음이 편지 않았다.
“자, 이제 애틀랜타의 7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타자는 키스 카펜자, 오늘은 안타 없이 볼넷 하나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깔볼 순 없는 선수죠. 지난 피츠버그와의 시리즈에서도 홈런 3개를 추가했고, 최근 감이 좋은 편이에요.”
카펜자는 올 시즌 타율 0.316, 홈런 33개, 89타점을 거두며 MVP 후보에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다.
타율을 제외하면 이인영에게 밀릴 게 없는 성적, 특히 상대 투수가 브레이킹 볼로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지 탐색하고 타격을 하는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타격 성향 때문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어쨌든 본인이 노린 패스트 볼은 놓치지 않고 쳐내는 스타일, 필라델피아 배터리는 바깥쪽 빠른 패스트 볼을 택했다.
나오지 않는 방망이, 카펜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
1루에 자리를 잡은 이인영은 타자의 생각을 분석했다.
3대 1로 뒤지고 있는 필라델피아가 카펜자를 볼넷으로 내보내 무슨 이득이 있을까.
확실하게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공은 빠른 볼, 그런데 카펜자의 초구 상대 타율은 무려 0.411이다. 이런 선수에게 초구부터 빠른 볼을 집어넣을 수 있는 투수가 얼마나 될까.
만약이지만 초구 빠른 볼이 유인구라는 걸 카펜자가 읽었다면?
어쨌든 승부는 첫 단추부터 꼬여버렸고, 다음 공도 바깥쪽으로 유도했지만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2구는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이게 그러니까 답안지를 공개한 시험이나 다름없는 거죠. 카펜자 선수가 바깥쪽에 약점이 있다는 건 모든 선수들이 알고 있거든요. 초구도 그렇고 지금 공도 바깥쪽으로 던졌는데, 카펜자 선수는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거고요.”
“이 타이밍이라면 느린공이 올 수도 있습니다. 카펜자 선수가 변화구에 약점이 있지만, 카운트가 유리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스윙을 하겠죠.”
이인호 위원의 예상대로 느린 커브가 날아왔다. 하지만 낮게 떨어지는 공, 카펜자는 헛스윙을 돌렸다.
역시 선수 출신이라 타자의 심리와 볼 배합을 읽는 능력이 탁월한 건가. 시청자들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경기를 지켜봤다.
‘역시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하는군.’
6구까지 이어지는 승부,
이인영은 지금까지 투수가 던진 공과 코스를 모두 따져 봤다.
초구와 2구는 모두 바깥쪽, 3구는 떨어지는 커브, 4구는 다시 바깥쪽 빠른 볼, 5구는 몸 쪽으로, 6구는 바깥쪽으로 들어갔다.
얼핏 보기엔 다양한 코스를 던져주고 있지만, 결국 카펜자의 약점인 바깥쪽을 결정구로 삼고 볼 배합을 섞어주고 있다.
규칙성을 가지고 계산적으로 돌아가는 볼 배합, 이런 볼 배합의 흐름을 읽고 예측을 해야 타격 실력이 는다.
이인영은 타석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지만 결정구가 어디로 날아갈지는 대략 읽어냈다.
‘지금 계속 좌우로 가고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떨어지는 커브 볼을 던질 가능성이 높네.’
아까 타자가 헛스윙을 했던 커브 볼(3구),
포수는 타자가 헛스윙 한 구질과 구역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젠간 또 던지겠지,
4구, 5구, 6구가 모두 좌우로 들어간 건 이 커브를 던지기 위함 아닐까. 문제는 투수가 제대로 떨어 트리냐는 것, 이인영은 시청자가 된 기분으로 동향을 주시했다.
“떨어트립니다!! 삼진!! 이야~ 여기서 커브가 나오네요!!”
“이게 볼 배합의 승리죠!! 왜 산체스 선수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인지!! 이 승부 하나로 증명이 되네요!! 정말 어려운 타자를 넘어섭니다!!”
헛스윙을 돌린 카펜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3구 이후 계속 좌우를 찌르는 빠른 볼, 커브는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다. 이 타이밍에 커브를 던진 산체스의 리드 능력을 칭찬할 뿐, 씁쓸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돌격대장 카펜자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한 풀 꺾인 7회 말, 결국 애틀랜타는 추가점을 내지 못했다.
8회는 양 팀 모두 득점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는 9회 초 마지막 반격에 나섰다.
“자, 애틀랜타는 다시 투수를 교체합니다. 예상대로 칼 마르커스 선수가 올라오는군요. 올 시즌 5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15, 34세이브, 60이닝 동안 볼넷 22개, 탈삼진은 97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 앞에 주자를 쌓아야 됩니다.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요.”
마르커스는 초구부터 99마일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구위가 워낙 좋기 때문에 약간 제구가 어긋나도 타자는 쉽게 배트를 내지 못하는 입장, 프랭크 토마스는 초구를 때렸지만 파울 라인 밖으로 밀렸다.
2구 역시 빠른 볼, 파울이 되면서 토마스는 절벽 끄트머리까지 밀렸다.
딱~!!
“후우~ ”
3구를 때린 토마스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슬라이더를 던질 줄 알고 있었지만 커트도 쉽지 않은 궤적, 슬라이더를 커트해 냈으니 다음은 빠른 볼이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고 자세를 잡았다.
따악~!!
“들어가라!! 들어가!!”
절묘하게 밀어 친 타구, 1루수가 몸을 날렸지만 타구는 라인 안 쪽에 떨어졌다.
전력 질주로 2루에 입성한 토마스는 본진을 향해 손가락 총 세리머니를 난사, 하지만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는 긴장된 얼굴로 타석에 섰다.
3대 1로 뒤지고 있으니 진루타는 큰 의미가 없다.
무조건 출루를 해야 되는 상황, 빠른 볼만 노리고 스윙을 돌렸다.
“높습니다!! 경기가 아주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네요.”
“빠른 볼이 공략 당했기 때문에 지금 배터리도 생각이 많을 거예요.”
잉글리시아는 빠른 볼을 커트해 내며 승부를 5구까지 끌고 갔다.
마르커스 정도 되는 최상급 마무리에겐 자존심이 상하는 전개, 이런 때 도망치는 볼배합을 요구하는 포수는 아무도 없다.
이런 싸움에서 이기려면 타자가 커트해 낸 공을 집요하게, 같은 구질로 승부하는 게 최선, 예상대로 마르커스는 빠른 볼을 택했다.
“와아아~!!”
결과는 헛스윙 삼진, 잉글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돌아섰다.
나름 잘 버텼지만 삼진인데 6구까지 승부를 끈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음 타자가 기회를 살려주길 기대할 뿐,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재미있겠군. 이런 긴장감, 마음에 들어’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타자가 계속 커트해도 빠른 볼을 던지는 마르커스, 남자라면 저렇게 승부해야 하지 않겠나.
볼 배합 따윈 치워버리고 힘과 힘의 맞대결을 펼쳤다.
[따악~!!]
“파울입니다!! 101마일!! 마르커스 선수가 힘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죠. 머리 굴리는 스마트한 싸움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그냥 치고 받는 싸움이 더 재미있습니다.”
“하하~ 그런 겁니까?”
“보세요. 관중들 모두 열광하고 있잖아요?”
앉아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관중석, 양 팀 벤치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이인영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1루를 채우고 오스틴 카터를 상대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마르커스의 자존심이 서겠는가.
애틀랜타 선수들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삼진 잡아 삼진!!”
“웃기고 있네!! 홈런 맞고 울 준비나 하라고!!”
발끈한 필라델피아 선수들도 불을 뿜으면서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 하지만 링 위에 올라선 두 선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승부를 이어갔다.
따아악~!!
“간다!! 간다!!”
“넘어가라!!”
2구 타격, 흥분한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더그아웃 보호 펜스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폴 대 밖으로 벗어나는 파울, 애틀랜타 팬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마르커스도 마찬가지, 특유의 창백한 얼굴은 변함없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숨기지 못했다.
던진 공은 12개뿐이지만 100마일을 넘나드는 빠른 볼을 계속 던졌고, 시즌 막바지라 체력적인 부담도 있는 편, 그래도 적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구는 바깥쪽 높게 던졌지만 커트, 마르커스는 캡을 고쳐 쓰며 다음 투구를 준비했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나와라.’
마음속으로 나와라 헛스윙을 외쳤지만 또 커트,
눈치를 살피던 포수는 슬라이더를 요구했지만 볼이 옆으로 튀면서 2루 주자를 3루로 보냈다.
이제는 정신력 싸움,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건가. 두려웠지만 마르커스는 마음을 굳혔다.
따아악~!!
높게 솟아오른 5구, 타자의 손을 떠난 배트는 큰 원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우중간을 훌쩍 넘어가는 동점 투런 홈런, 애틀랜타 현지 해설위원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르커스가 실점을 한 게 얼마 만인지, 그것도 홈런을 맞을 줄이야.
삼진을 연호하던 홈 팬들도 침묵에 빠졌다.
“역시 자네는 최고야!!”
와이즈 감독은 돌아온 영웅을 힘껏 끌어안았다.
도루 사건으로 말싸움을 주고받은 것도 있고, 경기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렇게 팀에 멋진 선물을 안겨주다니, 뒤끝 없는 이인영은 감독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이날 필라델피아는 14회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산체스의 결승 안타로 승리를 쟁취, 1위와의 격차가 2게임으로 좁혀지면서, 클럽하우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이인영 선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5시간이 넘는 혈투를 치르고 응하는 인터뷰, 약간 피곤했지만 이인영은 평소처럼 성실히 인터뷰에 응했다.
“마르커스 선수에게 동점 홈런을 치기 전에 파울 홈런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파울 홈런 다음에는 아웃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대응을 하신 건가요?”
“마르커스 정도 되는 클로저라면 볼 배합보다는 자존심을 앞세우거든요. 파울 홈런이 나왔지만 승부를 피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슬라이더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저 선수가 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구나 … 거기서 승부는 끝난 겁니다.”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물고 뜯는 세계, 이인영은 뒷걸음질 치는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뿐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그리고 다음 날, 필라델피아는 다음날 경기에서도 승리하며 격차를 1경기로 좁혔다.
이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남은 힘을 짜내 총공세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