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200화 (200/309)

200화. 안 되면 되게 하라 (5)

‘이건 아닌데’

6월 2일, 잠자리에서 일어난 이인영은 첫발을 내딛었다.

발꿈치 안쪽의 통증,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움직일 때 통증은 뚜렷해졌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지만 팀 닥터에게 진단을 받았다.

“수술은 필요 없지만 치료에서 회복까지 6개월은 걸릴 겁니다.”

“별 문제 없다는 뜻이군요?”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죠.”

“괜찮아요. 시즌을 치르다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진단명은 족저근막염,

베이스는 생각보다 딱딱한데다 가장 자리를 밟는 경우가 많아 발바닥 부상을 입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이번 부상도 그런 경우,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라 바로 클럽하우스로 복귀했다.

“의사가 뭐라고 하나?”

“수술은 필요 없다고 하네요.”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에게 오늘 하루는 쉬라는 지시를 내렸다.

땅볼을 쳐도 전력 질주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런 열정도 반복되면 몸에 무리가 오는 법, 이인영은 조건을 걸었다.

“그럼 제가 부상 입었다는 건 기자들에게 비밀로 해주세요.”

부상이 자랑거리도 아니고 내가 다쳤다는 걸 적에게 알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상대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선수, 와이즈 감독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 오늘 필라델피아의 라인업을 살펴보시죠. 어? 이인영 선수가 명단에 없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 단순히 쉬어가는 거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부상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 날 중계카메라는 틈이 날 때 마다 벤치에 앉은 이인영을 조명했다.

7회까지 팀이 7대 4로 지고 있는데 대타로 투입할 순 없는 건가. 하지만 와이즈 감독은 투수 타석에 대타 팀 베드로시안을 투입, 베드로시안은 초구를 통타 해 좌중간에 떨어지는 2루타를 날렸다.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7대 5, 이인영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홈런 치라고!! 뛰다 다리에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까!!”

타석에 들어선 조시 빌라는 동료의 조롱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 시즌, 주루 플레이를 하다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조시 빌라, 마이너리그에서 컨디션을 조절하고 복귀할 때까지 넉 달이 걸렸다.

부상 경력도 있고 나이도 나이라 전력질주는 무리, 좌중간을 노리고 스윙을 돌렸다.

“바깥쪽,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빌라 선수가 역시 바깥쪽 공에는 배트가 안 나가네요. 쳐 봤자 좋은 타구 안 나온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거니까요.”

조시 빌라는 바깥쪽 흘러나가는 공에 스윙을 돌렸다.

거듭된 부상과 나이 때문에 파워가 떨어졌으니 최대한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쳐야 장타가 나오는데, 이 탓에 공을 오래 보지 못하고 선구안까지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박한우 위원은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이것 보세요. 배트를 잡은 손 중 윗손이 먼저 움직이죠? 이러면 스윙궤적이 흔들릴 수밖에 없죠.”

“그럼 박한우 위원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스윙은 뭡니까?”

“배트 노브가 먼저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배트가 처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윙이 돌아가는데, 지금 빌라 선수는 강하게 쳐야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조시 빌라는 윗 손을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 치는 스윙이 되면서 땅볼, 1루가 비어있던 상황이라 병살은 되지 않았지만 홈 팬들은 아쉬운 반응을 쏟아냈다.

“홈런 치라니까 왜 땅볼을 때려?”

“몰라, 나도 이젠 예전 같지가 않아.”

“넌 원래 그랬어. 지금만 못 친 척 하지 마.”

뼈를 때리는 발언에 조시 빌라는 쓴 웃음을 지었다.

문제가 뭔지는 본인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장타를 포기하고 짧은 안타를 택하는 게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뿐, 작년에도 부상 때문에 많은 경기는 뛰지 못했지만 타율 0.289로 나름 선전했다.

하지만 타율을 택하면서 급격히 하락한 장타력, 주력도 떨어졌는데 짧은 안타를 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솔직히 이제 상위 타선은 무리, 감독과 상의를 거쳐 하위 타선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따악~!!

“좋았어!!”

이어지는 세스 브런들의 타석, 초구를 통타한 브런들은 중견수가 주춤거리는 사이 2루로 뛰었다.

그 사이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7대 6,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악재가 터졌다.

절뚝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브런들, 와이즈 감독은 트레이너를 대동하고 2루로 향했다.

“지금 이 장면이거든요. 1루에서 2루로 가면서 몸에 부담이 온 것 같습니다.”

“이건 좋지 않은데요. 브런들 선수가 누굽니까. 이 선수가 이탈하면 치명적이에요.”

브런들은 오늘 경기 전까지 타율 0.324, 홈런 9개, 27타점을 올렸다.

29홈런, 87타점, 210안타 페이스를 달리던 선수가 부상이라니, 1점 차 경기가 됐지만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으며 퇴장하는 브런들의 뒷모습은 흥을 깨버렸다.

어쨌든 이날 필라델피아는 9회 말에 터진 잉글리시아의 끝내기 안타로 시즌 30승을 수확,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1위 자리를 지켰지만 기자들 앞에 선 와이즈 감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브런들 선수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뭐… 자세한 건 의사의 견해를 들어봐야겠지만 무릎에 무리가 온 것 같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결장했는데 혹시 부상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휴식 차원에서 한 경기 쉬게 한 것뿐입니다.”

약속한대로 와이즈 감독은 거짓말을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스트러프는 수술대에 오르면서 시즌 아웃, 로버트 필도 이번 시즌 복귀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세스 브런들까지 무릎이 뒤틀리는 부상을 당하다니, 그렇게 심하진 않지만 이인영도 부상 중이다. 주전선수만 4명이 부상이라니, 울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나는 아프면 안 된다. 절대로’

다음 날, 이인영은 예정대로 출장을 강행했다.

보조기를 찬 덕분에 통증은 거의 없지만 우익수를 보기엔 무리, 오늘은 1루수로 출장했다. 한국에서도 1루수로 자주 출장했고 메이저리그에 입성해서도 가끔 1루로 출전하지 않았나.

눈에 불을 켠 기자들도 특별한 의심은 하지 않았다.

오늘 필라델피아의 선발은 이스터, 개막전 경기에서 패배를 당했지만 이후 8경기에서 4승 2패, 평균자책점 3.20을 거두며 선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투심을 적극 활용하면서 땅볼 비율을 높인 덕분이라고 하는데, 발바닥 부상을 안고 있는 이인영은 어지간하면 삼진을 잡아주길 희망했다.

‘내가 잡을 거야.’

하지만 첫 타자부터 땅볼, 이스터는 적극적으로 수입에 개입했다.

동료의 몸 상태를 알고 있으니 내가 뛰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인영은 쓸데없는 배려는 원치 않았다.

타구를 잡아 베이스를 터치, 이스터는 무리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인영은 다음 타구에 집중했다.

1회 초, 원정팀 워싱턴의 공격은 소득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따악~!!]

“밀어낸 타구가 2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프랭크 토마스의 안타!! 출발이 좋은 필라델피아의 공격입니다.”

“빌라 선수가 부진에 빠졌고, 브런들 선수도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거든요. 다행히 토마스 선수가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다음 타자 잉글리시아는 2구를 때렸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향했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홈 팬들은 하루 만에 돌아온 팀의 기둥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자, 이인영 선수의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올 시즌 타율 0.349, 홈런 10개, 3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32홈런 페이스인데, 작년에 비하면 장타 페이스가 떨어지긴 했거든요. 하지만 이건 바깥쪽 공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공략한 탓입니다. 생산력은 작년과 다를 게 없어요.”

워싱턴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작년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는 이인영의 방망이, 전체 안타의 24%가 좌측으로 향할 정도다.

이젠 바깥쪽 유인구도 마음대로 못 던지는 타자, 밀어치는 타격이 시프트를 무력화시키자 워싱턴의 댄 밀러 감독도 손을 놔버렸다.

‘이건 볼이지.’

주심은 초구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인영은 다른 선수에 비해 스트라이크 존 이득을 많이 보는 편, 작년 시즌도 미스 콜이 3.3%밖에 되지 않았다.

워싱턴의 주포 칼 라일리가 7%라는 걸 고려하면 그럭저럭 특혜를 받고 있는 것, 이런 배경을 알고 있는 미구엘 라미레스 포수는 불만을 쏟아냈다.

“이거 라일리였다면 잡아줬을 거야. 틀림없지.”

하지만 반응 없는 주심, 이인영도 별 말 없이 투수를 노려봤다. 2구도 볼, 라미레스의 혼잣말은 반복됐다.

“이것도 잡아줘야 하는 공이라고, 이건 불공평 해, 이런 식이라면 나도 3할 5푼치지.”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 잠시 타임을 요청한 이인영도 혼잣말 공격에 나섰다.

“95년에 태어난 주제에 말도 많네.”

라미레스는 프로필 상으로는 2000년생이다.

사실이라면 올해 미국 나이로 28세, 그런데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동료에게 한 말이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너만 알고 있어. 사실 나는 95년생이야.”

“정말?”

“그래, 너만 알고 있어. 알았지?”

남미 선수들이 좋은 계약을 얻어내기 위해 나이를 속이는 건 흔한 일 아닌가.

18살이라고 하기엔 너무 체격조건이 좋았던 라미레스, 그래도 워싱턴은 라미레스의 가능성을 보고 계약을 제시했다. 구단이 알고도 속아준 것, 그럼 조용히 있을 것이지 입은 왜 놀리고 다니는 건가.

라미레스는 나는 2000년생이라며 발끈했다.

“알았어, 95년에 태어난 자식아”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방 먹여주는 진짜 2000년 출생, 나는 너처럼 사기는 안 치고 다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따악~!!]

“3구 타격!! 우중간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 1루 주자는 그 사이 2루를 지나 3루까지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안타!! 필라델피아가 득점기회를 맞이합니다!!”

“볼 카운트가 몰렸기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밖에 없었죠. 그렇다고 해도 이 공을 놓치지 않은 건 칭찬해줘야 합니다.”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코치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쳤다.

부상 때문에 홈런을 치고 유유히 베이스를 돌 생각이었는데 땀 좀 흘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의 장타에 스타트를 끊었다.

‘부탁인데 너무 열심히 뛰진 말라고’

와이즈 감독은 3루를 파고든 이인영의 주루 플레이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선수까지 다치면 우리는 정말 끝장, 하지만 이인영은 다음 타석에서 땅볼을 치고 전력 질주하는 모습으로 팬들을 안심시켰다.

뛰다보니 그럭저럭 참을 만한 통증, 3번 째 타석에서도 태연하게 자세를 잡았다.

따아악~!!

“와아아아~!!!!”

좌중간을 향해 날아가는 타구, 배트를 집어던진 이인영은 런웨이를 시작했다.

좌익수가 날아올랐지만 어림도 없는 높이, 베이스를 돌아 홈을 찍었다.

홈런이 너무 부족하다는 지역 기자들의 불만을 잠재운 한 방, 이후에도 변함없는 플레이로 팬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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