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98화 (198/309)

198화. 안 되면 되게 하라 (3)

“여러분 MVP를 박수로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의 홈구장 TNT 파크, 개막전을 앞두고 필라델피아 구단은 작은 행사를 열었다.

필라델피아 선수가 리그 MVP를 수상한 건 32년 만의 일, 4만여 관중은 영웅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리(Lee), 당신은 한국에서도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상만 해도 열 개 이상은 될 텐데, 그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 됐군요. 너무 많아서 트로피를 전시할 자리가 부족한 거 아닙니까?”

마이크를 잡은 리포터의 질문, 하지만 이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제가 많은 상을 수상한 건 사실이지만 집이 좁아질 정도의 활약은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말대로 집이 좁다고 느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9년 차에 접어든 프로 생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넘쳐나는 트로피 때문에 집을 옮기는 일이 일어날까. 그렇다면 정말 기쁜 일,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각오를 다졌다.

‘올 해는 좀 더 적극적으로 쳐도 좋을 것 같은데’

경기를 앞두고 이인영은 연습 배팅으로 타격감을 조율했다.

작년 시즌 때려낸 38홈런 중 24개가 우측, 5개가 센터, 10개가 좌측으로 날아갔다.

전체 홈런의 24%가 밀어 쳐서 나온 것, 이건 히팅 포인트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다.

히팅 포인트가 일정하지 않으면 타격감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지만, 지난 2년 동안 이인영은 밀어치는 타구를 꾸준히 생산해 냈다.

지난 2년 동안 잘 해왔는데 올해라고 갑자기 부진에 빠질까. 쓸데없는 걱정, 하던 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라며 뛰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올해는 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겠지.’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가슴이 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엄마 손에 끌려 유치원에 갔을 때의 충격이란… 엄마가 사라진 것뿐인데 젖을 겨우 뗀 꼬맹이는 구석에서 울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날 뿐, 유치원 생활에 익숙해지자 엄마보다 친구들과 노는 일에 더 큰 재미를 느꼈다.

어른이 된 지금이라고 다르겠는가.

메이저리그에 경력도 이제 3년 차, 불안에 떨기 보다는 친구들과 씩씩하게 어울려 노는 길을 택했다.

“우우~ 우~ ”

“와아아~!!”

시간은 흘러 3월 27일, 필라델피아는 홈구장에서 2028시즌 첫 경기를 맞이했다.

이스터를 향한 필라델피아 팬들의 시선은 여전히 냉대, 하지만 각오했던 일이라 이스터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자, 에드먼드 이스터 선수가 필라델피아의 개막전 선발로 나섭니다. 작년 시즌 27경기 등판, 14승 8패, 평균자책점 3.43 역시 좋은 투구를 보여줬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50승을 넘게 거둔 선수죠. 이 선수가 개막전 선발로 나선 배경도 흥미롭습니다.”

오랫동안 필라델피아의 에이스 노릇을 한 휴 스트러프, 오늘도 마운드에 섰다면 6년 연속 개막전 선발을 책임졌을 거다.

하지만 스트러프는 그 영광을 이스터에게 양보했다.

우승을 위해 연봉까지 삭감하고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은 이스터, 에이스라는 자리는 투수에겐 무한한 영광이지만 그만큼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나이도 있고 이제는 나와 책임을 공유할 동반자가 필요했는데 이스터가 그 역할을 해준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딱~!

“초구는 파울입니다. 93마일이 나오는군요.”

“이스터 선수가 올해 35살에 접어든 노장이지만 필요하면 95마일 이상을 던질 수 있는 선수죠. 파워와 제구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리그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역시 구속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거죠. 본인도 전성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모험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겠죠.”

이스터는 한 때 최고 구속 102마일을 던졌다.

그러나 31세 시즌을 기준으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평균 구속, 아무리 제구가 좋아도 구속이 안 따주면 의미가 없다.

제구 된 공도 넘겨버릴 수 있는 게 메이저리그 타자들, 그걸 알고 있는 이스터는 변화구는 커브 하나만 던진다.

나머지는 커터 - 투심 - 빠른 볼, 구속 하락을 다양한 변화구 개발로 이겨낸 휴 스트러프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빠른 볼이 버텨주기 때문에 지금도 수준급 투수로 군림할 수 있는 것, 대부분의 파워 피처는 32~ 33세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맞이한다.

이스터는 그 지점을 넘긴 상황,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 내 구위가 버텨줄 수 있을까. 뒤돌아볼 여유도 없는 입장, 이스터는 공 하나 하나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따아악~!!

“앗!! 안 돼!!”

하지만 첫 타자부터 홈런, 언제나 2등만 하는 아빠를 응원하러 온 도로시 이스터는 속상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유유히 베이스를 도는 타자와 이를 애써 외면하는 아빠, 도로시는 박수를 치며 응원을 이어갔지만 그 목소리는 아빠 귀에 닿지 않았다.

“아~ 볼이군요. 이스터 선수가 홈런에 이어 볼넷까지 내줍니다.”

“좋지 않네요. 이스터 선수는 빠른 볼이 주무기라 도망칠 피칭을 할 선수는 아니거든요. 이 볼넷은 홈런보다 징조가 좋지 않네요.”

이스터는 다음 타자 캠벨을 상대로도 힘든 투구를 이어갔다.

아웃 카운트 하나 잡지 못했는데 투구 수는 벌써 11개, 우리는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투수를 영입한 건가.

와이즈 감독은 물론 현장에 나와 있는 필라델피아 관계자들은 초조한 눈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이 정도야 뭐.’

다시 외야로 날아가는 타구, 제 자리에서 몇 걸음 옮긴 이인영은 타구를 잡아냈다.

내가 누구인가. 작년 시즌 골든 글러브 수상자, 담장만 넘어가지 않으면 다 처리해 주겠다며 마운드를 향해 손가락 사인을 날렸다.

이스터는 후속 타자를 병살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고,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 조시 빌라는 2구만에 좌익수 플라이 아웃, 다음 타자 세스 브런들도 초구를 타격했지만 잘 맞은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갔다.

생각보다 싱겁게 전개되는 공격, 그래도 홈 팬들은 MVP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자!! 이인영 선수가 2028시즌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작년 시즌 기록은 타율 0.363, 홈런 38개, 137타점!!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시즌을 기록했습니다!!”

“역사에 남을 시즌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게, 이인영 선수가 작년 시즌 OPS+ 150을 기록했습니다. 이건 2년 차 시즌을 기준으로 봤을 때 역대 2위 기록이에요. WAR를 기준으로 따지면 역대 1위고요.”

이것 외에도 2년 차 시즌에 통산 70홈런, 150장타를 달성한 역대 3번 째 선수,

단일 시즌에 타율 3할 6푼, 35홈런, 130타점, 100득점, 20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것도 역대 2명밖에 없는 기록이다.

말 그대로 기록의 사나이, 평범한 타자가 아니라 콜로라도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역시 금방 금방 수정이 되네.’

초구를 지켜본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시즌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대략 7%대에서 노는 비율,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좋은 공을 골라 치는 것도 기술이지만 지금처럼 주자가 없는 상황에선 적극적인 타격이 필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냐는 영웅심리를 앞세웠다.

[따악~!!]

“타격!! 밀어냈습니다!! 3루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팀의 첫 번째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초구는 몸 쪽이었는데 지금은 바깥쪽으로 들어갔거든요. 역시 히팅 포인트를 다양하게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타격이 가능한 거죠. 다른 선수라면 이렇게 타격 못 합니다.”

“박한우 위원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올 시즌 이인영 선수가 부상 없이 풀타임을 치르면 50홈런 가능할까요?”

“그것보다 저는 안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선수의 진정한 가치는 컨택 능력이에요.”

박한우 위원은 240안타를 예고했다.

다들 이 선수를 홈런 타자로 오해하는데, 박한우 위원은 국내에 있을 때부터 이인영의 컨택 능력에 주목했다.

홈런을 많이 치는 것도 어렵지만 진짜 어려운 건 다양한 방향으로 타구를 날리는 기술,

이게 가능하다면 투수 입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거다.

어느 코스로 던져도 안타를 칠 수 있는 타자가 있다면 투수에겐 얼마나 큰 부담인가.

부상만 없다면 30~ 40홈런은 쳐 줄 수 있는 선수, 박한우 위원은 양아들의 능력이라면 240안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따악~!!

“와아아~!!”

이인영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 타석은 밀어 쳐서 안타를 만들어 냈지만 두 번째 타석은 잡아당겨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다.

어디로 던져도 배트가 나오다니, 콜로라도 배터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이건 못 치겠지.’

경기는 어느덧 6회 말, 1사 주자 1루 위기에 몰린 짐 모어랜드는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았다.

초구 사인은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빠지는 유인구, 마침 투수를 바꿀 때가 됐고, 3대 1로 앞서나가는 상황이라 승부를 걸지 않았다.

[따악~!!]

“밀어 낸 타구가!! 3루수 키를 넘어갑니다!! 계속 달리는 주자!! 3루를 지나 홈으로!! 홈으로!!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타!! 개막전부터 3안타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공이었거든요. 이걸 때려내면 도대체 뭘 던지라는 겁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MVP 콜,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보호대를 코치에게 넘겼다.

앞으로 보여줄 게 많은 게 이 정도로 놀라면 어쩌나.

집안이 트로피로 가득 차 이사를 하는 게 인생의 목표, 네 번째 타석에서도 적극적인 타격을 선보였다.

‘아~ 이건 좀 무리였나?’

방망이 끝에 걸리면서 3루수 정면으로 굴러가는 타구, 1루를 밟은 이인영은 헬멧을 내팽개쳤다.

3안타를 쳐도 만족을 못하는 욕심꾸러기, 그것보다 팀의 4대 3패배를 막지 못한 게 더 분했다.

“미안하다. 약속을 못 지켜서.”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못 던진 건데요 뭐”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꼬마 아가씨에게 사죄를 표했다.

아버지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고 약속했는데 겨우 3안타 밖에 못 치다니, 다음 경기는 3홈런을 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왜?”

“우리 아빠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3홈런을 쳐줘야 이길 만큼 몰락하진 않았거든요. 오늘은 조금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당돌한 아가씨의 선언에 이인영은 폭소했다.

패전 투수가 된 아버지는 그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 이인영은 바로 이스터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때? 딸이 이런 말까지 하는데 다음 경기는 이겨야 하지 않겠어?”

“나도 알고 있어. 다음 경기는 이길 거니까 두고 보라고”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봐. 아직 안 늙었다는 걸 보여주라고”

“늙었다는 말은 안 하면 안 되냐?”

이스터는 발끈했다.

여론에서 틈만 나면 나이를 운운하는데 이젠 동료들까지, 딸의 말대로 누구에게 기댈 만큼 몰락하진 않았다.

그걸 증명하는 건 내 몫, 차분하게 다음 등판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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