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안 되면 되게 하라 (2)
[올해는 연장계약 논의 없을 듯]
해가 넘어갔지만 이인영과 필라델피아의 연장계약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4년 3200만 달러 계약이 남았고 급할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팬들은 구단의 소극적인 행보에 불만을 표했고, 구단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입장을 드러냈다.
“투자란 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투자가 실패했을 때 팬들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인영은 지난 2년 동안 뛰어난 활약으로 팀 내 최고 스타에 올랐다.
연장 계약을 맺는다면 한두 푼이 걸린 계약이 아닌데, 그게 실패로 돌아갔을 때 구단이 감수할 위험이 너무 크다.
작년 8월 즈음부터 연장 계약 맺을 거라며 바람을 넣더니 이제 와서 딴 소리 하는 건가.
물건 산다고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결국 안 사는 행위와 뭐가 다른가, 흥분한 필라델피아 여론과 달리 이인영은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구단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투자는 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손해가 일어났을 때 누구에게도 손을 벌릴 수 없습니다. 야구가 무슨 국가사업도 아니고 불경기에 정부에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계약 실패의 책임은 구단이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연장계약 제시를 못 받았다는 건 구단에 그만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이해합니다.”
2년 동안 좋은 활약을 했지만 앞으로 이게 계속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선수는 자신의 실력을 팔아야 하는 입장, 내 실력을 고객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계약을 끌어내고 말고는 내가 하기 나름, 성적을 내는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시 서운한 게 맞네.’
선수가 이렇게 나오자 구단 관계자들의 입장만 무안해졌다.
요약하면 좋은 성적내서 더 좋은 계약 끌어내겠다 이거 아닌가. 선수 측은 7년 2억 1천만 달러 밑으로는 내려갈 생각이 없다는 입장, 이렇게 큰 계약을 흔쾌히 추진할 구단이 몇 팀이나 있겠나.
오프 시즌 동안 브런들 - 이스터와 대형 계약을 맺은 필라델피아는 자금적 여유가 부족했고 이 문제를 내년으로 미뤘다.
[며칠 동안 취재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월 2일, 필라델피아 지역기자 샘 해슬먼은 한국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이인영에게 취재 요청을 했다.
동양인이 리그 MVP를 수상한 건 역대 처음, 혹시 그 선수에겐 특별한 훈련 법이 있는 걸까.
사흘 동안 지켜봤지만 이렇다 할 특징은 없었다.
‘정말 이게 전부야?’
이인영의 개인 훈련 시간은 하루에 약 2시간 정도,
일주일 동안 4일은 근육 운동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타격, 기본적인 수비 동작, 타구를 쫓기 위한 풋 워크를 점검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이런 기초적인 것들만 반복하다니, 정말 이것만으로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 수 있는 건가?
뭔가 다른 비결이 있는 건 아닐지,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에겐 특별한 비결이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비결 따윈 없어요. 비결이란 요령의 다른 말이죠.”
“요령이라고요?”
“네, 사람은 언제나 편한 것을 추구하죠. 그리고 어느새 요령을 피우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려요. 성공에 비결은 없습니다. 비결은 요령의 다른 말일 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비결이나 지름길을 찾을 때 성공한 사람들은 기본적인 것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게 전부죠.”
샘 해슬먼은 뭔가를 깨달았다.
모든 전문가들이 2년 차 징크스를 염려했지만 이인영은 오히려 2년 차 시즌에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런 선수가 3년 차 시즌에는 무너질까?
4일 동안 뒤를 따라다니며 취재에 나섰지만 해슬먼은 이인영이 요령을 피우는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실패한다면 세상이 부조리한 거 아닌가.
연장계약을 두고 실패를 염려한 필라델피아 구단, 해슬먼 기자는 그건 엄청난 착각이었다고 못 박았다.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나는 지난 4일 동안 취재를 하면서 이 선수가 성공한 비결이 아니라 실패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냈다. 이런 선수를 두고 실패를 염려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투자를 할 것인가? 이거 하나만 말하겠다. 훗날 이 선수를 놓친다면 그건 전적으로 구단의 책임이다.]
연장계약에 뜸을 들인 구단을 비난하는 기사,
팬들도 이 흐름에 올라탔지만 답이 없는 구단 관계자들, 하지만 이인영은 이런 소란과 거리를 두고 묵묵히 훈련에만 집중했다.
“올해는 내가 이길 거다.”
그런데 이때, LA에서 도전장이 날아왔다.
진원지는 작년 시즌 MVP 투표 2위에 머무른 마이클 헤인스, 헤인스는 지난 NLCS에서 홈런 4방 포함 나름대로 제 몫을 다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거기다 리그 MVP 수상까지 이인영에게 헌납, 2인자의 서러움이 이런 것인가.
이번 시즌은 다를 거라는 각오를 드러냈다.
“개가 먹던 밥도 안 먹을 소리하고 있네.”
그 소식을 듣고 이인영은 코웃음을 쳤다.
본인이 1등하겠다고 하면 하는 건가.
그걸 내가 가만히 지켜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헤인스의 도발 덕분에 더욱 더 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월 17일, 이인영은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플로리다에 입성했다.
메이저리그의 얼굴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존재감은 확실한 선수, 기자들은 새로운 시즌을 앞둔 각오를 물었다.
“이인영 선수, 작년 시즌은 133경기만 뛰고도 38홈런 130타점을 넘기셨는데 올해는 50홈런 150타점 가능할까요?”
“뭐 … 글쎄요. 성적은 제가 노력한 만큼 따라오겠죠.”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속마음, 다른 기자가 유도 질문을 던졌다.
“2002년 이후, 25년 동안 월드시리즈 2년 연속 우승 팀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있는 필라델피아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타자는 언제나 불가능한 일을 해내죠.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152km짜리 공이 타자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겨우 0.375초, 쳐서 날려 보내려면 시간은 더욱 촉박하다.
그런데도 160km 공을 담장 너머로 날려 보내는 타자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뭔가.
이미 나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을 하고 있는데, 월드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이 어려운 일이라고 포기할 거라 생각했나?
어리석은 질문, 자신의 입지를 깨달은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협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스프링캠프 3일 째 되는 날, 미국 IT 기업 관계자가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를 찾았다.
불이 붙은 인공지능 - 로봇 개발 경쟁, 최근 미국의 한 기업은 인간의 운동능력을 재현한 로봇을 개발해 냈다.
투수의 와인드업 동작은 물론 타자의 준비 자세까지 완벽 탑재한 신형 로봇, ‘토미’라 불리는 이 로봇은 필라델피아에 오기 전 이미 수많은 메이저리그 스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야구선수가 아니라 로봇이 야구를 하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닌지, 토미의 활약을 연일 대서특필되며 여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역시 인간은 로봇을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세스 브런들은 그까짓 공 내가 쳐보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상상을 초월하는 구속에 브런들은 할 말을 잃었다.
최고 110마일까지 던질 수 있는 신형 로봇, 토미의 파트너를 자처한 산체스 포수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공을 잡기는커녕 잘못하다간 손을 다칠 정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능가하는 로봇을 개발해낸 연구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해보죠.”
“얼마든지요.”
이번엔 이인영이 도전장을 던졌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타자가 토미의 공을 타격할 확률은 0.009%, 건드리는 것도 기적이라 필라델피아 선수단도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110마일은 무리야.’
개발자도 마음속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저 정도 구속이면 인간의 귀가 찢겨나갈 정도, 말이 공이지 총알이나 다름없다.
일반인이라면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겠지만 그나마 프로 선수라 타석에서 버티고 있는 것 뿐, 작년 시즌 MVP를 수상한 이인영이라도 토미 앞에선 어쩔 수 없을 거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110마일? 그게 가능한가?’
이인영도 반신반의 한 얼굴로 로봇을 마주했다.
110마일은 어떤 타이밍에 쳐야 맞아나갈까.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타이밍도 감으로 잡아야 하는 상황, 일단 손잡이를 내려 빠른 볼에 신속히 대응하기로 했다.
‘어?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빗맞았지만 확실히 반응한 방망이, 선수단은 물론 로봇개발자, 이 광경을 지켜보는 기자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따악~!!
“오~!!”
“맞췄어!! 맞췄다고!!”
4구만에 드디어 제대로 된 타구가 나왔다.
지금까지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개발자 로버트 애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이게 말이 돼?!!”
“저 자식은 사람이 아니야!!”
외야로 날아간 공은 실밥이 다 터져 나가고 형체마저 일그러진 채 돌아왔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힘으로 때려낸 건지, 110마일을 던지는 로봇보다 이걸 쳐내는 타자가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10번 타격 중 안타 성 타구는 3번, 이 광경을 지켜본 피터 와이즈 감독은 박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자네는 로봇이랑 야구를 해도 3할을 치는 건가?”
“변화구도 섞어 던졌다면 어려웠겠죠. 빠른 볼만 던지니까 어느 정도는 대응이 되던데요?”
“그렇게 말하면 다른 선수들은 뭐가 되나?”
정말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안타 하나 당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한 개발자 로버트 애쉬는 기자들 앞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한계는 예상보다 더 대단했군요. 패배를 인정합니다.”
“10번 중 3번 진 것뿐인데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야구에선 3할만 쳐도 타자의 승리입니다. 이건 토미의 패배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로버트 애쉬는 이인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년에 더 뛰어난 로봇을 개발해 올 테니 승부해 달라는 것, 하지만 이인영은 엄살을 부렸다.
“그때는 야구공이 아니라 총알 치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당신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저도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요.”
“죄송하지만 저는 사람하고 대결하고 싶습니다.”
말이 110마일이지,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다.
안전장비를 착용했다고 해도 너무 위험한 실험이었던 게 사실,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선수의 안전을 위해 오늘을 마지막으로 실험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공을 쳐낸 저 선수는 뭔가.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앞 다퉈 기사를 냈다.
[로봇의 시대가 와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은퇴해도 리(Lee)는 인류의 희망이자 자존심으로 남을 것이다.]
[110마일을 때려낸 유일무이한 선수로 역사에 기록될 듯]
심지어 이날 승부는 기네스북에 남게 됐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로봇과의 승부에서 승리를 거둔 선수, 이날부터 여론은 이인영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된 신인류, 일본 여론은 아예 초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