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96화 (196/309)

196화. 안 되면 되게 하라 (1)

“잘 있었냐?”

“네에~ ”

귀국 후, 이인영은 공식 행보에 나섰다.

벌써 6년 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들, 코흘리개들이 이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니 흘러간 세월을 실감했다.

“오빠 저 이번에 1등 했어요.”

“그래?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 아냐?”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꿈 많은 녀석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도 중요한 일, 세계 정상에 올라선 지금이라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장밋빛 미래에 물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형, 저는 재능이 없나 봐요.”

“왜? 무슨 일 있었어?”

“그게요… ”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함진우라는 녀석은 고민을 털어놨다.

최소 전국 사격대회에서 8위 안에는 들어야 안정적으로 대학진학이 가능하다.

성적이 약간 떨어지면 공부로 만회를 해야 되는데, 함진우는 지난 전국체전에서 안타깝게 10위에 안착했다.

전국대회 훈련에 매진하느라 수업도 많이 못 들었고, 성적도 나쁜데 이래서야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 거기다 얼마 전에는 감독에게 이런 말까지 들었다.

“너는 재능 없으니까 지금부터 공부라도 열심히 해라.”

그렇게 노력했는데 충격적인 진단, 동생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던 이인영은 버럭 했다.

“재능이 있고 없고는 네가 증명하는 거야. 왜 남의 말에 끌려 다녀?”

“그런 건가요?”

“그래, 형도 메이저리그에서 코치하고 대판 싸웠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냐고”

수비 스타일 때문에 코치와 한판 붙었던 사건, 그리고 전국 대회 10위권이면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무슨 생각으로 제자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건지, 이인영은 정신 바짝 차리라며 동생의 어깨를 붙잡았다.

“형이 다른 말 안 할 게.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네가 포기해 버리면 진짜 지는 거야. 재능이 있고 없고는 남이 아니라 내가 증명하는 거라고, 그것만 명심해. 아직 기회 있으니까, 알았지?”

“네… ”

“그래 하면 돼, 죽기 살기로 해 봐.”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는 녀석에게 내가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그저 용기를 잃지 말라고 응원해 줄 뿐, 그렇게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재능이 없어? 그럼 그동안 훈련은 왜 시킨 거야?’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불만은 반복됐다.

특유의 마이너스 파워로 주변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뭐든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런 사람 밑에서 선수가 제대로 성장을 하겠나. 재능이 있어도 인연을 잘 만나야 꽃을 피우는 법,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건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왜 그것 밖에 안 먹어?”

“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야.”

“그거 먹고 어떻게 살아?”

그러던 어느 날, 이인영은 애인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본인 말로는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데 냉정한 남친은 그건 다 헛소리라며 칼같이 끊었다.

“그거 운동 안 해서 그런 거야.”

“운동?”

“그래, 몸에 근육이 있어야 에너지를 저장하잖아. 근력 떨어지는 사람은 살도 잘 쪄. 내일부터 나랑 같이 운동하자.”

근육량이 늘면 몸매가 망가진다?

운동하기 싫은 여자들이 하는 핑계에 불과할 뿐, 여자가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도 우락부락한 체형은 안 된다.

오히려 탄탄하고 멋진 몸을 가질 수 있는데 안 먹으면 살이 빠질 거라는 생각은 금물, 먹는 양이 원상태로 돌아가면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정말 살을 빼겠다면 근력운동을 하는 게 최선, 근력 운동에 도가 튼 이인영은 애인을 엄격히 지도했다.

“후우~ 자기야, 나 힘들어. 그만 하면 안 돼?”

“안 돼.”

“아잉~ 좀~ ”

“애교 부려도 안 돼.”

밥도 같이 맛있게 먹어야 연인이지, 한 놈은 먹고 한 사람은 굶으면 그게 무슨 맛인가.

결국 혜진 씨는 남친을 따라 운동에 전념했다.

이 힘들고 귀찮은 걸 매년 몇 달 동안 반복한다니, 이런 질문 한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자기야, 운동하는 거 안 힘들어?”

“힘들지, 솔직히 야구장에서 야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진짜?”

“어, 그런데 몸을 안 만들어 두면 실전에서 몸이 안 따라줘.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야.”

오프 시즌뿐만 아니라 시즌 중에도 꾸준히 해야 하는 게 웨이트 트레이닝, 그게 귀찮고 힘드니까 도중에 포기해버리는 선수들도 있다.

게으름은 늘 우리 곁에 있고 빈틈을 보이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준다. 그게 이 세상의 법칙, 이인영은 그걸 일찍 깨달은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성공할 수 있었던 거다.

내가 뭐가 잘났다고 남들 위에 군림하겠는가.

노력도 재능, 내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바로 그게 아닐까.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그것 뿐, 게으름 앞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열심히 해 봐야겠다.’

혜진 씨는 마음을 다잡고 운동에 매진했다.

학창시절은 그렇게 치열하게 보냈는데, 25살에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선생님이 되면서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의욕이 없으니 아이들에게도 소홀해진 게 사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마침 방학기간이라 여유도 있고, 이것도 데이트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견딜만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2월 4일, 이인영은 광고주의 연락을 받았다.

속옷모델 광고라 처음엔 조금 난처했지만 이것도 나름 신선한 경험이 되지 않겠나.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여성분 모델도 결정하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직… ]

“그럼 제가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이인영은 당당하게 애인을 추천했다.

내 사람이라 추천하는 게 아니라 그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 최근 운동도 열심히 했고 광고주도 마음에 들 거라고 확신했다.

[하하~ 글쎄요.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속옷모델은 몸매가 많이 중요한데… ]

“그럼 일단 보고 연락주시죠. 대신 모델료는 안 받겠습니다.”

애인에게 줄 계약금은 내가 받는 계약금 안에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광고주 입장에선 딱히 손해 볼 것 없는 조건, 일단 만나 보기로 했다.

“자기는 왜 그런 약속을 했어?!!”

“그냥 한 번 만나 봐. 까짓 거 못할 것도 없잖아?”

이 소식을 접한 혜진 씨는 펄쩍 뛰었다.

애인에게 넌 어지간한 모델보다 낫다는 말을 들은 건 기쁜데, 내 모습이 TV 광고에 나온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애인의 부추김에 슬쩍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면접에 나섰다.

‘오호~ 생각보다 제법?’

광고주는 혜진 씨를 보자마자 마음속으로 OK 사인을 내렸다.

거기다 두 사람은 실제 연인 관계, 약간 어색한 장면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 계약이 됐고 이틀 뒤 촬영이 시작됐다.

정말 무안한 건 헐벗은 몸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뜨거운 시선, 혜진 씨는 못하겠다며 얼굴을 가렸지만 애인의 손목에 끌려다녔다.

“괜찮아. 우리 둘만 있다고 생각하면 돼.”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해?”

“그럼 내 얼굴만 봐. 우리 평소 분위기 잡을 때 있잖아.”

드디어 시작된 촬영, 이인영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딱 붙은 몸, 혜진 씨는 당황했지만 이인영은 스태프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마음껏 즐겼다.

이런 멋진 사람이 내 애인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그 마음이 전염된 건지 혜진 씨도 어색함을 털어냈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광고를 찍어보겠나.

그동안 보낸 뜨거운 시간을 온 몸으로 표현하듯, 두 사람은 얼굴 붉어지는 장면을 연출해 냈다.

“잠깐 쉬고 갈게요~ ”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쉬는 시간, 촬영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평소에도 몸 관리를 하시는 편인가요?”

“아니요. 솔직히 운동 시작한 건 최근이에요.”

기자들은 혜진 씨의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조금만 운동해도 멋진 몸매를 갖길 원하는 건 모두의 소망 아닌가. 원래 우월한 유전자라 조금만 운동해도 라인이 살아나는 건 아닌지, 하지만 혜진 씨는 그런 건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저 두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운동했거든요. 인영 씨가 권하지 않았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광고 때문에 몸 관리를 시작하신 겁니까?”

“아니요. 저는 아무 것도 몰랐는데 갑자기 광고 찍으러 가자고 그러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는 애인을 지켜봤다.

말은 저렇게 해도 혜진 씨는 광고 계약이 성사되자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했다. 사람은 뭔가 목표가 있어야 노력하고 달라지는 법, 지금 저 사람의 얼굴엔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치고 있다.

그게 내가 원했던 것, 내 욕을 하든 말든 그냥 지켜봤다.

“이인영 선수의 매력은 뭔가요? 어떤 점에 끌려서 연애를 시작하신 겁니까?”

“어… 솔직히 만나기 전부터 팬이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더라고요.”

“몸매에 얼굴도 되고 거기다 연봉도 많이 벌고, 당연히 그렇겠죠?”

짓궂은 질문에 혜진 씨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그렇고, 그래도 그것 뿐만은 아니라며 수습에 나섰다.

“인영 씨는 정말 존경할만한 사람이에요. 본인만 노력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해야 할까요. 겉보다는 내면이 훨씬 더 멋진 사람이에요.”

“그냥 칭찬 더 해도 돼. 뭘 자꾸 겸손을 떨어.”

타이밍 좋게 날아드는 독촉,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고 촬영이 재개됐다.

한 번 해 봐서 그런지 더욱 대담해진 표정과 자세, 입술이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 스태프들의 가슴은 뛰었다.

지금만큼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질투하는 느낌이랄까.

내친 김에 좀 더 자극적인 자세도 잡고 싶었지만 이게 영화 촬영은 아니지 않은가. 적당한 경계선에서 쳐내는 절제미도 굿,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던 촬영에 현장 감독은 박수를 보냈다.

“혜진 씨, 혹시 전직하실 생각 없습니까?”

“네?”

“스타일도 좋고 표정도 좋으신데, 이번 기회에 모델로 활동해 보시죠.”

이때 광고주는 혜진 씨에게 이번 기회에 전직할 생각은 없냐는 권유를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 하지만 이인영은 격하게 반대했다.

“안 됩니다.”

“아니, 왜 안 됩니까?”

“전 이 사람이 다른 남자하고 끈적거리는 꼴 못 봅니다. 앞으로 저 부르실 일 있으면 그때 부르세요.”

혜진 씨의 입장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 살을 맞대도 어색할 게 없는 사이라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온 것 뿐, 다른 모델과 촬영을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까.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추억으로 만족했다.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지?”

“응”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촬영 중 몇 번이나 불꽃이 튀었지만 남들 앞이라 차마 하지 못했던 행동, 멋진 인생이라는 게 뭐 있겠나.

지금 우리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야말로 멋진 인생,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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