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MVP (20)
‘내 입술은 갈 곳이 없구나.’
기쁨도 잠시, 영웅의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다들 가족, 애인과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무안하고 감독 - 코치와 포옹을 나누며 시간을 끌었다.
“내가 틀렸네. 자네는 최고야.”
폴 보먼 코치는 이인영에게 진심이 담긴 사죄를 했다.
수비 문제 때문에 한 때 다퉜던 사이, 이인영은 빠른 전진 스탭으로 타구를 처리하고 추가 진루를 노리는 주자를 잡아내는 적극적인 수비를 선호한다.
하지만 폴 보먼 코치는 이런 수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타구가 뒤로 빠지면 대재앙이 벌어진다는 것, 하지만 이인영은 오늘도 자신의 방식으로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냈다.
그 수비 덕분에 필라델피아가 반격에 성공한 것도 사실, 보먼 코치는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걸 인정했지만 이인영은 대화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대화는 이쯤 하죠.”
“아직도 나한테 서운한 게 있나?”
“그게 아니라 주위를 보세요. 당신하고 대화를 오래하면 제 입장만 비참해져요.”
그제야 보먼 코치는 허허 웃으며 영웅을 놓아줬다.
수비 문제를 두고 싸웠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아느냐하면서 핏대를 세웠던 겁 없는 루키, 얼마나 잘 하나 두고 보자며 악감정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팀 선수인데 못 하길 바라다니, 나는 코치 자격이 있는 걸까.
거기다 보란 듯이 2년 연속 MVP급 활약을 펼친 이인영, 그 활약을 지켜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뻐근했다.
말 한 마디로 사죄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안함을 표하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떠들썩한 뒤풀이가 끝나고 이제는 MVP를 수상할 차례, 오브라이언 커미셔너가 단상에 올라섰다.
“이 봐!! 굳이 시간 끌 필요 없잖아?!!”
“당신이 누굴 지목할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이름이나 말 하고 들어가!!”
극성팬들은 시간 끌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결정된 일인데 뭐 하러 뜸을 들이나, 씩 웃던 커미셔너는 축하 인사는 생략했다.
“The 2027 World Series MVP winner is… Philadelphia's number two, In-young Lee. He batted 0.514 with two home runs and nine RBIs in this series ”
= 2027 월드시리즈 MVP는 필라델피아의 넘버 2, 이인영입니다. 그는 이번 시리즈에서 타율 0.514, 홈런 2개, 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 트로피를 전달받은 이인영은 커미셔너와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뒤따르는 동료들의 축하와 박수, 모든 이들의 관심은 영웅의 입에 집중됐다.
“리, 정말 환상적인 시즌이었습니다. 당신은 패배에 물들어 있던 필라델피아에 승리와 환호성 그리고 기적을 선물했습니다. 최고의 선수가 된 소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솔직히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습니다. 제가 MVP 수상을 받았지만 그 공로는 동료와 팬들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팬들은 약간 기 빠진 반응을 보였다.
언제나 참신한 인터뷰로 팬들을 열광하게 한 선수가 이렇게 평범한 소감을 남기다니,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어느 선수도 오고 싶어 하지 않는 도시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곳 팬들은 쓰레기니까요. 선수들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을 원합니다. 하지만 이곳 팬들은 야유와 쌍욕을 퍼붓죠. 그런데 저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죠. 왜냐하면 저도 쓰레기니까요. 덕분에 제 본색을 마음껏 드러내며 야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석에서 야유와 환호가 뒤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참 일관적이라 마음에 드는 인간들, 내년에도 그 인성 변하지 말라며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쉬운 점이 있군요.”
“뭐죠?”
“다들 우승하면 연인이나 가족과 키스를 나누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입술은 갈 곳을 잃고 남정네들 사이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질 못했어요.”
관중석에서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라도 괜찮다면 키스해도 좋다는 여자들의 아우성, 눈치를 살피던 리포터가 한 술 거들었다.
“저기 저렇게 많은 여성 팬들이 있는데 뭘 그렇게 아쉬워하십니까?”
“이 봐 당신, 인터뷰 그렇게 위험하게 하는 거 아니야. 나 애인 있는 거 알아 몰라?”
다시 뒤집어진 관중석, 그까짓 애인 오늘 하루는 잊으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이인영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쓰레기인 거라며 튕겼다.
역시 자기 캐릭터가 확실한 선수, 인터뷰를 마친 필라델피아의 영웅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한 번 잡아주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이야호~!!”
“오늘은 마시고 죽어!!”
광기 속에서 시작된 샴페인 파티, 이인영은 샴페인을 난사하지 않고 입에 털어 넣었다.
오늘은 정말 마시고 죽을 정도로 기쁜 날, 클럽하우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 기자들도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른 술에 비하면 도수가 낮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수준이 아닌데, 저렇게 들이 부어도 되는 건가.
여기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샴페인 거품까지, 기자들은 술에 절여지는 영웅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인터뷰도 해야 되는데 이러다 무산되는 건 아닌지, 하지만 이인영은 걱정과 달리 또렷한 얼굴로 한국 기자들을 마주했다.
“이인영 선수 메이저리그 진출 첫 우승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필라델피아 팬들 앞에선 꽤 거칠었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분위기, 우리가 알던 그 선수라 기자들은 안심했다.
“말 그대로 세계의 정점에 오르셨는데요. 앞으로도 올해와 같은 활약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정상은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장담은 못하겠지만 지키도록 노력할 겁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입술이 허전하다고 말씀하셨는데, 휴대폰은 확인해 보신 겁니까?”
짓궂은 질문에 영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확인하지 못한 휴대폰, 그런 건 여러분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며 벽을 쳤다.
그래도 내심 신경 쓰이는 축하문자, 인터뷰가 끝나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문자만 212개가 날아들었다.
전 소속 구단이었던 라이온즈 선수들의 축하 인사부터 각종 업계 관계자들까지,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중 술기운이 몰려왔다.
‘아, 몰라 내일 해’
포기하고 내일로 미룬 답장, 그렇게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벨소리에 눈을 떴다.
그 분의 전화번호,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왜 그래?]
“자다가 일어났어.”
그리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전 세계 야구팬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쑥스럽겠지, 하지만 우승을 차지한 그라운드에서 애인과 키스를 하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다 좋은데 마무리가 안 된 월드시리즈, 이인영은 언젠간 반드시 현실로 이뤄내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냥 우리끼리 조용히 하면 되잖아?]
“난 그런 거 별로야. 이 사람이 내꺼다 라고 선전할 수가 없잖아.”
[어휴~ 정말… ]
“그래서 싫어? 요즘 나처럼 표현해 주는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소소한 애정을 표했다.
귀에 달라붙는 쪽~ 소리, 기분이 좋아진 영웅은 앵콜을 연발했다.
그걸 또 받아주는 그녀, 그렇게 이인영은 사정없는 애정공세에 키득거리며 밤을 지새웠다.
* * *
[이인영, 오늘 오전 11시 귀국]
[에드먼드 이스터, 필라델피아와 계약]
[우승을 위해 연봉도 포기했다]
시간은 흘러 11월 2일, 대한민국의 아들은 대구 국제공항에 발을 들였다.
사방에서 몰려든 기자와 환영 인파, 넉살 좋은 미소를 띤 영웅은 취재 열기를 피하지 않았다.
“이인영 선수, 에드먼드 이스터가 필라델피아 구단과 접촉했다는 소식 들으셨나요?”
“아… 그 선수 별명이 간발의 차였죠?”
시작부터 뻥 터트리는 영웅, 아무리 그래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하지만 이인영은 사실은 사실이라며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스터 선수가 합류하면 내년에도 우승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뭐… 확실히 선발진은 강해지겠죠.”
작년 시즌, 이스터는 연봉만 2380만 달러를 받았다.
콜로라도 구단 사정을 따져보면 거의 최고 수준의 대우를 해준 것, 하지만 이스터와 콜로라도의 동행은 어색했다.
올해가 아니면 우승을 못한다는 생각에 무리한 지출을 감행한 콜로라도, 하지만 그 기대는 포스트 시즌 탈락으로 돌아왔다.
트레이드를 시도해 봤지만 워낙 큰 덩치 때문에 그것도 무산, 그렇게 4년 동안 어색한 동거를 마치고 이스터는 콜로라도와 이별했다.
4년 동안 56승 - 평균자책점 3.36을 기록했으니 딱히 빚진 것도 없는 관계, 30세 중반에 접어든 이스터는 연봉을 포기하고 우승을 택했다.
“스트러프가 당신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데 자존심이 상하진 않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우승뿐입니다.”
이스터는 필라델피아와 계약하면서 연봉을 1700만 달러로 깎았다(4년 계약).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이런 계약을 하다니, 그 정도로 우승에 대한 열망이 강한 건가.
이어지는 질문에 이스터는 연봉을 깎은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필라델피아에는 실력 있고 젊은 선수들이 많습니다. 구단이 그들을 모두 품고 가려면 제가 양보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올해 FA로 풀리는 세스 브런들 그리고 로버트 필, 필라델피아는 전력 보강보다 내부 단속에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다.
내가 고자세를 유지하면 필라델피아가 계약을 제시하겠나.
먼저 구단에 계약을 제시할 정도로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고, 2년 연속 우승에 일조하겠다는 일념이 구단 관계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 동행이 반드시 우승으로 이어진다고 보장할 수 있나.
뭣보다 필라델피아 팬들의 반응은 부정적,
최고 자리 앞에서 번번이 미끄러진 탓에 간발의 차라는 조롱 아닌 조롱으로 불리고 있는 이스터가 2년 연속 우승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불길하다, 구단이 괜한 짓을 했다며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인영은 연봉까지 깎아가며 우승을 찾아온 노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이스터는 분명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발투수입니다. 다만 최고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요?”
“네, 이번 시즌 저는 누구보다 많은 득점권 기회를 얻었습니다. 다른 팀에서 뛰었다면 3관왕을 차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인영은 올 시즌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경우가 57%나 됐다.
3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으로 따지면 전체 2위, 4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로 따지면 전체 1위 기록이다.
이렇게 많은 밥상을 차려줬는데 타점 왕을 못하면 그건 본인 책임 아닌가. 하지만 이스터는 지금까지 특급 수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도 이렇다 할 타이틀 하나 못 차지했다.
위대한 선수는 위대한 팀과 함께 할 때 빛을 발하는 법,
필라델피아와 함께 한다면 간발의 차라는 오명은 지워낼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고맙네 파트너, 우리 앞으로 잘 해보자고]
이스터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득점권 악마라 불리는 이인영의 지원 사격이 있다면 20승 그까짓 거 못할 것도 아니다.
올해는 20승을 하겠다며 큰소리를 쳤고, 답장을 받은 이인영은 내년은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는 각오를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