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94화 (194/309)

194화. MVP (19)

‘하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이곳은 콜로라도의 한 저택, 월드시리즈 경기를 관람하던 에드먼드 이스터는 나지막한 한숨을 뱉어냈다.

이스터는 올해 메이저리그 경력 12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

통산 성적은 158승 81패, 평균자책점 3.28, 성적만 보면 메이저리그 정상급이지만 포스트시즌 경력은 1경기도 없다.

5년 전, 콜로라도와 필라델피아를 두고 저울질을 하다 콜로라도를 택했는데 설마 필라델피아가 월드시리즈에 나갈 줄 누가 알았겠나.

그때 필라델피아를 택했다면 저 자리에 내가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TV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아빠, 무슨 생각해요?”

“아빠가 선택을 잘 했으면 저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해서… ”

“에효~ 아빠는 언제나 그렇잖아요.”

올해 8살 된 딸은 아빠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

만테냐 어워드 2위 두 차례, 정규시즌 19승 두 차례, 언제나 최고의 자리 앞에서 미끄러진 아빠, 야심차게 선택한 콜로라도도 포스트시즌 진출을 선물하지 못했다.

왜 우리 아빠는 늘 차선의 선택만 하는 걸까. 다음 FA 계약은 좀 잘해보라며 참견에 나섰다.

“얘야, 그래도 아빠 정도면 찾는 구단은 많아.”

“1등을 해야죠. 1등, 아빠 별명이 미스터 Almost 잖아요.”

딸의 투정에 아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올 시즌도 14승 8패, 평균자책점 3.43을 기록하며 제 몫을 다 했지만 34살이 된 나이가 문제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옵트 아웃을 실행할 권리가 있는데, 그냥 콜로라도에서 남은 3년을 버텨보는 게 낫지 않을까.

원래는 캔자스시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얄궂게도 내가 떠난 뒤 캔자스시티가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팀 성적은 안 좋아도 좋은 유망주가 많은 콜로라도, 하지만 그건 필라델피아도 마찬가지다.

내가 연봉을 조금만 양보하면 필라델피아에서 대권에 도전할 기회를 잡지 않을까. 4년 전, 거들떠도 안 보던 필라델피아에 구미가 당겼다.

따악~!!

“와아아아~!!”

한편, 필라델피아는 4회 말에 잡은 기회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산체스가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하며 2사에 주자는 1 - 2루, 여기서 잉글리시아가 우중간에 떨어지는 적시타를 날리면서 2대 2 동점이 됐다.

보스턴은 5회 초 공격에서 희생플라이로 다시 앞서나갔지만 필라델피아는 5회 말, 하위 타선의 연속 출루와 대타의 진루타로 1사 주자 2 - 3루 기회를 잡았다.

“여기서 보스턴이 투수를 교체하는 군요. 브라이언트 선수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죠. 삼진 능력이 떨어지는 로빈슨 선수는 이 위기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로빈슨은 감독의 오른 손을 외면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이 인정을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고집도 잠시, 대의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왔다.

반면, 어제 경기에서 이인영에게 결승타를 맞은 브라이언트는 자존심 회복을 앞세웠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 모두 압도적인 피칭을 펼친 내가 결승타를 허용하다니, 2스트라이크를 잡고 던진 슬라이더가 통타당한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팀의 승리와 자존심이 걸린 이닝, 조시 빌라를 첫 제물로 삼았다.

[따악~!!]

“초구 타격!! 2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 옵니다!!!! 조시 빌라가 이 경기의 테이블을 돌려놓습니다!!”

“결국 터질 게 터진 건가요. 보스턴이 브라이언트 선수를 투입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이 실투는 치명적이네요.”

브라이언트의 주무기는 슬라이더

고교 시절부터 슬라이더가 뛰어나 주목을 받았고 본인도 빠른 볼 구속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다.

한 눈에 봐도 타자가 맞추기 어려운 궤적, 그 결과 9이닝 당 13개가 넘는 탈삼진을 잡아낼 수 있었지만, 슬라이더를 너무 많이 던진다는 지적도 받았다.

심지어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기도 하는데, 커터로 분류된 공까지 포함하면 슬라이더 비율은 무려 33%에 이른다.

조시 빌라에게 던진 초구는 84마일, 평소처럼 우타자 몸 쪽으로 파고들어갔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한 가운데로 몰렸다.

노림수에 걸려든 한 방, 철벽을 다시 한 번 무너뜨린 필라델피아 벤치는 환호에 휩싸였다.

“안타는 의미 없으니까 홈런 칠 게요.”

한편, 타석으로 향하던 세스 브런들은 와이즈 감독에게 농담을 던졌다.

2 - 3루 주자는 조시 빌라가 먹어치웠는데, 여기서 내가 안타를 쳐 봤자 무슨 존재감을 발휘하겠나.

목표는 큼지막한 한 방, 좌중간을 노리고 스윙을 돌렸다.

“스윙!! 헛칩니다.”

“역시 빠른 볼을 던져야 돼요. 브라이언트 선수가 올 시즌 빠른 볼 헛스윙률이 8.8%나 되는데, 도대체 왜 슬라이더를 던진 겁니까.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올 시즌 브라이언트 선수의 Zone%가 43.7%에 머물렀거든요. 전체 공의 43%만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는 뜻인데, 그런데도 많은 삼진을 잡아낸 건, 역시 슬라이더와 유인구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빌라 선수에게 던진 초구는…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네요.”

겉모습은 태연했지만 브라이언트는 후회를 곱씹었다.

미끼로 재미를 많이 본 시즌, 지난 경기에서도 이인영에게 빠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공략 당했다.

분명 헛스윙이 됐어야 하는 공인데 예상과는 정반대의 전개, 그런데 빌라에게 던진 공은 명백한 실투였다.

볼 배합이 아닌 제구의 문제, 슬라이더를 너무 남용한 것도 있고, 일단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나갔다.

‘괜찮아. 평소대로 하면 돼.’

이제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수도 없이 던졌던 공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믿었던 슬라이더를 공략 당한 탓인지, 브라이언트는 평소보다 더 멀리 도망쳤다.

브라이언트가 던지는 슬라이더는 두 가지,

지금 던진 백 풋 슬라이더는 홈 플레이트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릴리스가 됐어야 했는데, 릴리스 포인트를 너무 앞으로 끌고 나오면서 타자에게 간파 됐다.

‘변한 게 없군. 그리고 이제는 눈에 익었어.’

대기 타석에서 서 있던 이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4차전에서 결승타를 때려낸 비결은 브라이언트의 릴리스 포인트를 읽어낸 덕분이다.

본인은 그걸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눈썰미가 좋은 타자라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브런들도 그걸 알고 있을까. 표정 없는 얼굴로 승부의 향방을 점쳤다.

‘이건 안 속지’

2구를 지켜본 세스 브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확실히 보이는 궤적, 슬라이더는 이제 두려울 게 없고 빠른 볼에 타이밍을 맞춰두고 기다렸다.

[따악~!!]

“타격!!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세스 브런들의 안타!! 보스턴의 위기는 계속 됩니다!!”

“지금 타자들이 공을 받쳐 놓고 때리거든요. 보스턴 입장에선 이건 아닙니다. 뭔가 조치를 해야겠어요.”

믿었던 불펜의 붕괴, 보스턴 벤치는 패닉에 빠졌다.

일단 한 자리에 모인 내야진, 존 라이어 포수는 슬라이더 포인트를 읽힌 것 같다는 주장에 브라이언트는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정규시즌에선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내 슬라이더가 읽혔다니, 그건 네 착각이라고 일갈했다.

“정말 그럴까? 지금 타자들이 대놓고 치고 있잖아?”

“우연이라고 우연!!”

“계속 맞으면 문제가 있는 거지 뭐가 우연이야?”

존 라이어는 사실 예전부터 브라이언트의 누구에 의문을 표했다.

좌우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던지는 건 좋은데, 포수가 봐도 가끔 눈에 띈다. 이게 단기전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벌써 5차전까지 와 버린 시리즈,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맞았으면 본인도 변해야 할 것 아닌가.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고집하더니 결국 역전타 맞고 다시 위기,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인데 어떻게 할 건가.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보스턴은 브라이언트를 끌고 갔다.

“MVP!! MVP!!"

"MVP!! MVP!!"

점 점 높아지는 관중의 목소리, 타석에 선 이인영은 빠른 볼에 포인트를 맞췄다.

슬라이더는 눈으로 보고 쳐도 될 정도, 투수의 급소를 잡았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바깥쪽 빠지는 빠른 볼을 골라냈다.

“2구도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가 특유의 선구안을 발휘합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데요. 브라이언트 선수가 정규시즌에 이렇게 고전했던 적이 있었나요?”

“없으니까 당황하는 거겠죠. 느낌이지만 이건 승부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중계진은 급박히 돌아가는 보스턴 불펜을 비췄다.

보스턴에 닥친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 조시 해밀턴 감독도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따악~!!

“와아아아~!!”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 스타트를 끊은 조시 빌라는 3루를 지나 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스코어는 5대 2, 승리를 확신한 팬들은 옆사람을 끌어안고 기쁨을 표했다.

그건 필라델피아 벤치도 마찬가지, 이번 시리즈에서 득점권 타율 0.750 기록하고 있는 위대한 선수에게 경의를 표했다.

결국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하고 강판된 보스턴의 필승카드, 2경기 연속 난타를 당한 브라이언트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간파 당했다고?’

그제야 브라이언트는 파트너의 충고가 옳았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후회, 동료들이 뒷수습에 나섰지만 필라델피아는 이번 이닝에 4점을 추가하며 승기를 잡았다.

“준비는 다 됐나?”

“예, 영웅들만 맞이하면 됩니다.”

그 시각,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샴페인, 구단 직원들은 승전보가 날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전에 주문한 물건이 배송 중이라는 문자를 받은 기분이랄까, 2008년 이후 무려 19년 동안 소식이 없던 월드시리즈 우승, 빨리 오라는 조급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좋았어!!”

그렇게 경기는 흘러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켈빈 버나드는 첫 타자 프랭클린을 땅볼 처리했다.

출루만 되지 않는다면 하위타선으로 끝날 이닝, 버나드는 다음 타자 팻 버만까지 땅볼 처리했다.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뿐, 팬들의 승리의 함성을 부르짖는 동안 이인영은 캡을 깊숙이 눌러썼다.

한국에서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봤지만 부상을 당한 탓에 병원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봤다.

이제는 그 아쉬움을 풀 때,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따악~!!]

“높게 뜬 타구!! 우익수가 그 자리에서~ 잡아냅니다!!!! 2027 시즌 종료!!!! 영광의 왕관은 필라델피아의 몫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MVP 수상은 당연하죠!! 부상에 이런 저런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어이!! 기어이!!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축하합니다. 오늘만은 제 아들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들입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이인영은 쏜살처럼 마운드로 돌진했다.

꿈속에서도 갈망했던 월드시리즈 우승, 동료들 사이에 뒤엉켜 정상에 선 기쁨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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