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MVP (18)
결승타가 된 일격, 경기 후 이인영은 그라운드에서 인터뷰에 나섰다.
아직도 MVP를 연호하고 있는 홈팬들, 기세가 조금 잦아들자 리포터는 마이크를 입에 댔다.
“리(Lee), 오늘은 중반까지 누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브라이언트의 슬라이더를 받아쳤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글쎄요. 생각이고 자시고 제 눈에는 붉은 색 밖에 안 보이더군요.”
달아나는 적시타를 쳤을 때, 이인영은 홈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를 표했다.
오늘도 붉게 물든 관중석, 하지만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건 보스턴 선수단도 마찬가지다.
그 붉은 색이 침통에 빠진 보스턴 더그아웃을 뜻하는지 아니면 열기에 휩싸인 관중석을 뜻하는지, 리포터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보스턴 선수단의 유니폼도 붉은 색 아닙니까?
“보스턴의 붉은 색은 보호색일 뿐입니다. 그들의 존재감은 제 활약에 묻혀버렸으니까요. 오늘 필라델피아 팬들의 눈에는 제 활약만 보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와아아~!!”
홈팬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같은 붉은 색이라도 등급이 있는 법, 오늘 이인영의 활약은 슈퍼스타들이 넘쳐나는 보스턴의 존재감을 지워버렸다.
다시 한 번 보스턴의 자존심을 뭉개버린 발언, 질문을 던진 리포터도 허허 웃고 말았다.
“당신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정말 놀라운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월드시리즈에서 4할 4푼 4리에 홈런 2개, 득점권에서는 6할이 넘는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도 가끔은 제 자신이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그 어느 전문가들도 제가 이 정도 할 거란 예상은 못했죠. 솔직히 저도 그랬습니다.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낮게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자신 있고 당당하게 야구를 하고 있는가,
자신의 재능을 한정짓고 있는 건 부족한 자신감이 아닌지, 이인영은 2년 차 시즌은 고전할지도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세상의 편견은 내가 깨는 것, 주위 사람들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건 너무 소극적이다.
동양인 타자는 30, 40홈런을 못 친다고? 메이저리그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누가 그런 법을 세웠나.
그 까짓 편견 내가 깨버리면 그만, 지금 팬들은 날 뭐라고 부르고 있는가. MVP라는 세 글자로 압축된 이번 시즌의 활약, 어쨌든 이날 인터뷰는 보스턴 구단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겼다.
[보스턴의 빨간 색은 보호색!!]
[이제부터 빨간 색은 필라델피아가 독점한다.]
필라델피아 여론은 일시에 보스턴을 맹폭했다.
구단 역사를 따져 봤을 때 필라델피아는 보스턴에 비교가 안 된다. 구단 역대 승률만 따져 봐도 보스턴은 0.540, 필라델피아는 0.481, 우승 횟수도 2대 7로 확연하다.
그런 팀에게 보스턴의 붉은 색은 보호색이라는 조롱을 당하다니, 보스턴 여론도 무기력한 경기력에 불만을 표했다.
[유니폼을 피로 물들일 각오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이게 지금 야구 경기에 동원된 선전 문구인가.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이인영의 도발덕분에 월드시리즈 관심도는 더욱 올라갔다.
[이인영 관련 제품 판매량, 작년에 비해 700% 늘었다]
인기는 곧 판매량으로 이어지는 법,
필라델피아 현지 기자는 업체 관계자를 통해 이 정도면 미국 52개 어느 주에서든 이인영의 유니폼을 입은 팬을 볼 수 있을 정도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는 전국적인 스타라고 봐도 좋을 입지, 필라델피아 구단 관계자들은 쓴 웃음을 지었다.
2억 달러 언저리의 계약을 생각했는데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주가가 폭등하면서 가치가 우주로 가 버린 선수,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 시즌이 끝나도 이인영은 필라델피아와 4년 계약이 남아 있다.
단물만 빨아먹고 버려도 상관없지만 필라델피아 팬들은 이미 그 선수의 매력에 물들었다. 어설픈 계약을 제시해 괜히 화를 돋우거나 논란을 일으키면 역풍을 받는 건 구단, 반면 아쉬울 게 없는 이인영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인기 있는 물건은 할인 행사를 하지 않는다.”
월드시리즈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구단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날린 것,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면 분위기에 휩쓸려 염가 계약에 도장을 찍는 선수들이 있다.
하지만 이인영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연봉 협상은 철저하게 한 편, 에이전트도 위대한 선수와 함께하고 싶다면 그만큼 성의를 보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성과가 있으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 이렇게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월드시리즈 5차전의 막이 올랐다.
“보호색이라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이 자식들은 어디로 도망친 거야?!! 우리 선수들 밖에 안 보인다고!!”
필라델피아 팬들은 보스턴 선수단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야구팬들에겐 큰 웃음을 선사한 사건이지만 보스턴 선수 개개인의 인생을 따져보면 굉장한 굴욕, 거기다 3대 1로 뒤지고 있으니 유니폼을 피로 물들여서라도 설욕에 나서야 했다.
“몸 쪽! 볼입니다. 지금은 미동도 하지 않네요.”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겠죠. 이인영 선수의 도발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필라델피아의 선발 휴 스트러프는 정교한 제구와 체인지업을 앞세웠다.
이게 원래 스트러프의 스타일, 하지만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질 수 있는 장기 레이스다.
단기전에선 단조로운 피칭이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포스트 시즌에선 눈에 띌 위험이 큰 편, 보스턴 타선은 몸 쪽 공은 건드리지 않았다.
몸 쪽은 미끼일 뿐,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바깥쪽 공을 밀어 쳐 안타를 만들어 냈다.
큰 스윙을 하던 선수들이 짧게 치는 전략으로 나오자 필라델피아 배터리는 당황, 뭔가 잘못 됐다는 걸 깨달은 피터 와이즈 감독은 2회 초에 선발을 내렸다.
‘오늘로 끝이다. 내일은 없다.’
3승 1패로 앞서나가고 있는데 뭐 하러 6차전을 생각하나.
선발진을 포함해 불펜진도 출장 대기 상태, 마운드를 넘겨받은 로버트 필은 강속구로 보스턴의 반격을 잠재웠다.
그래도 아직은 보스턴이 2대 0으로 앞서나가는 경기, 필라델피아 타선은 서둘러 추격에 나섰다.
‘여전히 성가신 놈이군.’
문제는 오늘 공략할 투수가 허만 로빈슨이라는 것
로빈슨은 1차전에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8이닝 1실점 호투를 펼쳤다. 빠른 볼, 투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모두 실전에 활용하는 투수, 스트러프처럼 단조로운 투구를 할 일도 없었다.
“뭐가 보호색이냐?!!”
3회를 깔끔하게 막아낸 로빈슨은 필라델피아 진영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보자보자 하니 끝도 없는 도발의 연속,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로빈슨도 이날만큼은 참지 않았다.
그 잘난 척 떨던 이인영도 첫 타석에선 3루 땅볼, 오늘 경기 잡고 시리즈를 6차전까지 끌고 가면 역전도 가능하다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따악~!!]
“아~ 이 타구는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군요. 보스턴이 무사 주자 1 - 2루 기회를 잡습니다.”
“확실히 보스턴 선수들이 독이 올랐네요. 여기서 추가점 내주면 필라델피아는 어려워집니다.”
4회 초에 찾아온 위기, 보스턴의 공세에 야유를 퍼붓던 홈팬들의 기세도 잦아졌다.
‘예정대로 진행’
피터 와이즈 감독은 야수진에 지시를 내렸다.
타석에는 좌타 조시 프랭클린, 시즌 타율은 0.246에 불과하지만 17홈런을 기록한 일발 장타력은 무시할 수 없다.
철저한 시프트로 숨통을 조이는 게 최선, 2회에도 이 작전으로 프랭클린을 돌려세워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무사 주자 1 - 2루, 시프트보단 삼진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산체스 포수는 일단 삼진 위주의 볼배합을 택했다.
딱~!
빠른 볼에 밀리는 배트, 움찔한 내야진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 이인영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긴장을 풀었다.
“넌 입만 산 놈이야!!”
“보호색이 웃기다고 생각해?!! 개그 센스도 없는 자식!!”
이때 몇 몇 보스턴 팬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도 보스턴의 승리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벌인 일, 돌아온 답의 수위도 만만치 않았다.
“앵앵 거리지마 이 돼지 XX들아!! X까!!”
태연하게 들어 올린 가운데 손가락, 이 장면은 그대로 방송을 탔고 현지 중계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차피 오늘 경기로 끝날 시리즈, 이인영은 출장정지 따윈 두려워하지 않았다.
[따악~!!]
“우측으로 멀리 가는 타구!! 우익수가 잡았고!! 2루 주자는 3루로 태그~ 으!! 아웃입니다!! 아웃!!!! 이인영 선수가 엄청난 송구를 보여줍니다!! 이제 투 아웃 1루!! 보스턴의 득점권 기회가 이렇게 날아갑니다!!”
“지금은 무리였죠.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어시스트가 9개나 있는 선수인데, 이건 총잡이 앞에서 등을 돌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격에 성공한 이인영은 문제의 팬을 향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열광에 빠진 홈 팬들과 달리 침묵에 휩싸인 원정 팬, 공수교대가 이뤄질 때도 이인영은 문제의 팬을 향해 눈빛을 흘겼다.
야유를 받은 것보다 2대 0으로 뒤지고 있는 게 더 기분 나쁜 일, 남아 있는 울분은 타석에서 토해냈다.
[따악~!!]
“3루 강습!! 막아냈지만!! 유격수가 튄 공을 잡지 못합니다!! 오늘 필라델피아의 첫 안타!! 이인영 선수가 만들어 냅니다!!”
“2사에서 나온 안타라는 게 좀 아쉽네요. 여기서 오스틴 카터 선수가 한 건 해주면 동점인데 말이죠.”
박한우 위원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1차전에서 허만 로빈슨을 상대로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오스틴 카터, 오늘도 첫 타석에서 투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상성 자체가 안 좋은 상대, 그래도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공만 봐!! 어차피 존재감도 없는 놈들이니까!!”
이인영은 1루에서 계속 도발을 퍼부었다.
욱한 로빈슨은 견제를 곁눈질로 1루를 견제했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주자, 진짜 던질까 했지만 일단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던져볼 테면 던져 봐라.’
이인영은 바로 2루를 훔쳤다.
2아웃이라 타자에만 집중할 배터리, 거기다 로빈슨은 주자 견제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다.
무관심 도루로 기록됐지만 어쨌든 안타 하나면 득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뒤통수가 근질거렸지만 로빈슨은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따악~!!
“와아아아~!!”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주자는 그대로 홈으로 파고들었다.
무관심 도루가 가져온 결과, 로빈슨이 글러브에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이 이인영은 팬들을 향해 귀를 세웠다.
저들은 내 마음을 읽었을까.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보스턴의 빨간 색은 보호색!!”
“우리는 당신만 보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팬들,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필라델피아는 6회 말 산체스의 홈런으로 균형을 맞췄다.
이제는 보스턴이 쫒기는 상황,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필라델피아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