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MVP (17)
[7대 3, 보스턴 반격 성공]
[월드시리즈 혼전으로]
반전 없이 끝난 경기, 선발 투수의 붕괴와 집중력을 유지하지 못한 타선, 패할 수밖에 없는 공식 앞에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조용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2승 1패로 앞서고 있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이 통할만큼 만만한 무대가 아니라는 건 선수들이 더 잘 알고 있다.
패자는 패자다워야 하는 법,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인영도 오늘은 조용히 경기장을 나섰다.
난 검둥이지만 내가 멋지다는 건 알고 있어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인기가 치솟을 거라 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달리는 차 안에서 등장음악을 재감상했다.
이 래퍼는 정말 인종차별, 아니 자신감을 회복한 건가.
내가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인기가 치솟을 거라 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라니, 결국 백인은 우수한 종족이라고 떠드는 꼴 아닌가.
이런 기운 빠지는 이야기도 결국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현실은 인정하되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 내가 백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그렇게 불행한 일인가? 백인으로 태어났다면 지금보다 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을 거다? 그런 불평불만이 무슨 소용인가.
억지로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다.
같은 세상이라도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 그걸 일정 기준에 맞출 이유는 없다.
내가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면 세상이 뒤틀리고 왜곡 돼 보이는 것, 야구선수인 내가 할 일이 뭐겠는가.
깜둥이든 흰둥이든 노랑이든 그라운드에서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나는 지금 떳떳하고 자신감 있게 선수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
그것만 생각했다.
* * *
“자 월드시리즈 4차전!!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타순에 약간 변화가 있죠. 제리 오디스콜 선수가 8번에서 1번으로 올라왔습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12타수 5안타 감이 좋죠. 특히 어제 경기에서 4타수 2안타 2타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보스턴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경기, 필라델피아는 지난 8월 24일 콜 업 된 에머리 케론을 선발로 내세웠다.
에머리 케론은 고교시절부터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린 유망주,
4년 전 전체 3번 픽을 얻은 필라델피아는 에머리 케론을 선택했고, 1년 만에 메이저리그 등판 기회를 줬지만 1승 3패, 평균자책점 5.23이라는 평범한 기록을 남기고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빠른 볼 평균 구속이 95마일이나 될 정도로 좋은 구위를 갖췄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인 성격과 도망을 모르는 성격 때문에 피홈런이 너무 많은 게 흠, 그래도 구위는 메이저리그에서 손가락에 꼽힐 선수 아닌가.
올 시즌은 빅 리그(4경기)에서 2승 2패, 평균자책점 2.57을 기록한 에머리 캐론, 피터 와이즈 감독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따아악~!!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 좌측으로 큰 타구를 보낸 오디스콜은 홈런 타구를 감상하며 1루까지 배트를 들고 갔다.
‘너희들도 그랬잖아? 우리는 그러면 안 돼?’
1루 코치에게 배트를 넘겨준 오디스콜은 유유히 베이스를 돌았다.
지난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안타를 친 이인영은 손에 쥔 배트를 1루까지 들고 가는 기행을 선보였다.
예의를 중시하는 야구에서 있을 수 없는 일, 그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오디스콜은 보란 듯이 배트를 들고 1루로 향했다.
“야, 너 그게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이야?”
하지만 보스턴 선수단은 오디스콜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
상대가 쓰레기 짓을 한다고 우리가 똑같은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특히 나이가 지긋한 고참들은 튀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홈런 쳤잖아?’
알았다고 답했지만 뒤돌아선 오디스콜은 불만을 중얼거렸다.
우리도 도발에 맞대응하거나 화끈한 경기를 해야 하는데 너무 고지식한 베테랑들, 이래선 아무 재미도 없다며 투덜거렸다.
‘잠깐, 이거 내 무덤을 판 건가?’
오디스콜은 뭔가를 떠올렸다.
내가 한 행동이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인영이 2차전에서 한 행동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되는 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보스턴의 1회 초 공격은 끝났고 필라델피아의 반격이 시작됐다.
“젠장!! 저 자식 다음 타석에선 맞춰버리겠어!!”
더그아웃에 입성한 에머리 캐론은 빈볼을 예고했다.
1루까지 배트를 들고 간 건 명백한 도발, 하지만 이인영은 그건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내가 2차전에서 그렇게 했잖아. 그 자식은 지금 너한테 도발을 날린 게 아니라 나한테 한 거야.”
“그런 거야?”
“그래, 그러니까 복수는 내가 해야지. 네가 끼어들 일 아니다.”
에머리 캐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자식은 예고대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다른 선수가 내놨다.
[따아악~!!]
“자!!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세스 브런들 선수의 솔로 홈런!! 필라델피아가 균형을 맞춥니다!!”
“오늘은 한 치의 양보도 없네요. 어제의 실책과 패배가 브런들 선수에겐 좋은 약이 된 것 같습니다.”
브런들은 배트를 쥔 채 1루까지 걸어가며 홈런을 감상했다.
오디스콜을 향한 무력시위, 아직 초반이지만 도발을 한 방씩 주고받은 양 팀 벤치는 조금씩 달아올랐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홈 팬들은 MVP를 연호하며 역전 무드를 형성했다.
‘아차, 이러면 안 되지’
결과는 땅볼, 페어 라인 안쪽으로 달리던 이인영은 3피트 라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격수의 송구가 빗나갔고, 1루수의 글러브가 주자 앞을 가로 막았다. 충돌하면서 튕겨나간 공, 이인영은 1루수를 밀치고 2루로 돌진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지!!”
보스턴의 유격수 나타니엘 콜리스는 수비 방해를 주장했다.
페어 라인 안쪽으로 달리고 있던 주자, 나중에 진로를 수정하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는 게 요지, 하지만 이건 비디오 판독 대상이 아니다.
심판의 재량에 따라 결정되는 일, 1루심은 문제가 없다며 원심을 유지했다.
“네가 실수한 거잖아? 거기에 왜 3피트 규정 위반을 들이 대냐?”
“너 처음에는 라인 안 쪽으로 달렸잖아? 그거 규정 위반인 거 몰라?”
“그래서? 뭐? 문제없다고 하잖아?”
여기서 가벼운 말싸움이 붙었다.
별로 그렇게 큰 실수도 아니었는데 3피트 규정 위반이라며 핏대를 세운 나타니엘, 본인의 송구 실책을 그렇게 덮어도 되는 건가.
이인영은 주루 방해를 당한 건 나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소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이 안 쪽으로 달리는 거 내가 똑똑히 봤다고!! 똑바로 보고 판정을 해야 될 거 아냐?!!”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보스턴의 조시 해밀턴 감독은 격한 항의를 이어갔다.
홈에서 1루까지 거의 절반 가까이를 페어 라인 안쪽에서 달린 주자, 이 정도면 1루수 벤 데이비스가 충돌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다.
벤 데이비스가 옆으로 이동하면서 유격수의 송구도 어긋났다는 게 해밀턴 감독의 주장, 하지만 1루심은 원심을 유지했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이인영 선수가 여기까지는 페어 라인 안쪽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반 즈음부터 3피트 라인으로 이동했죠?
“아니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벤 데이비스 선수가 빠진 송구를 잡으려다 3피트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거든요. 이건 이인영 선수가 규정을 어긴 게 아니라 벤 데이비스 선수가 주자의 경로를 침범한 겁니다. 그러니까 2루로 가는 게 맞는 거죠.”
“뭐… 이건 1루심의 재량이라 뭐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판정은 내려졌고, 그걸로 끝인 거죠.”
조시 해밀턴 감독은 계속 항의를 이어가다 퇴장 당했다.
150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월드시리즈 퇴장 감독은 조시 해밀턴이 역대 3번 째, 필라델피아 팬들은 손가락 세 개를 높이 들어 기록 달성을 축하했다.
따악~!!
“와아아~!!”
어찌어찌 재개된 경기, 오스틴 카터의 적시타가 나오면서 필라델피아는 경기를 뒤집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보스턴 선수단, 이인영은 보란 듯이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정말 얄미운 자식,
보스턴은 3회 초 공격에서 2대 2 동점을 만들었지만 4회 말, 잉글리시아에게 적시타를 얻어맞고 다시 리드를 내줬다.
생각보다 훨씬 탄탄한 필라델피아의 타선, 해밀턴 감독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은 안토니오 코치는 조금 일찍 불펜 진을 가동했다.
“좋았어!!”
반면 필라델피아는 선발 에머리 케론을 6회까지 끌고 갔다.
볼넷을 4개나 내줬지만 고비 때마다 삼진을 잡아내는 투구, 반면 보스턴 타선은 6회까지 잔루를 7개나 남기는 답답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7회 말 필라델피아의 공격,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균형이 끊어졌다.
[따악~!!]
“자!! 이 타구는 멀리 가는 데요!! 중견수!! 우익수!! 워닝 트랙에 떨어집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득점!! 필라델피아가 추가점을 내면서 스코어는 4대 2로 벌어집니다!!”
“이건 보스턴에겐 너무 피해가 큰 한방이네요. 브라이언트 선수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6이닝 동안 실점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무너집니다.”
1사 주자 1루에서 터진 조시 빌라의 적시 2루타, 다음 타자 세스 브런들이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보스턴은 더 큰 위기에 몰렸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오늘은 안타가 없지만 필라델피아에서 제일 성가신 놈이 누구인가.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한 최악의 상대, 보스턴 벤치는 여기서 한 점 더 내주면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재미있군.’
헛스윙을 돌린 이인영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내가 낮은 공에 강점이 있다는 걸 알고 높게 던지고 있는 배터리, 역시 높은 공은 타이밍을 조금 더 빨리 잡아야 한다.
높게 던지고 떨어트리는 건 흔한 패턴, 그래도 빠른 공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섰다.
“높은 볼!! 나오지 않습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너무 높았죠.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높은 볼에 상대적으로 약점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투수 입장에선 던지기 어려운 코스거든요. 브라이언트 선수는 지금 승패를 걸고 던지는 겁니다.”
3구를 앞두고 브라이언트는 발을 풀었다.
프로라도 살 떨리는 순간,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체인지업?’
빠른 볼을 노리고 있던 이인영은 낮은 공에 체크 스윙을 하고 말았다.
선구안이 높게 형성된 탓에 순간 사라지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서 떠들썩한 관중석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이인영은 씩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엉성한 스윙을 한 적이 있었던가. 괴물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 가능한 일, 이런 궁지를 이겨냈을 때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것 아니겠나.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악~!]
“타격!! 파울입니다. 이제 승부는 5구로 넘어갑니다.”
“이인영 선수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아직 삼진이 없거든요. 하지만 브라이언트 선수도 지금까지 탈삼진 14개를 잡아낸 최고의 방패입니다. 어떤 승부가 날지 기대가 되네요.”
고개를 끄덕인 투수, 바깥쪽으로 빠져 앉은 주심,
홈 팬들은 절대 치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인영은 뒷다리를 쭉 빼며 도망치는 공을 따라갔다.
따악~!!
“와아아아~!!!!”
슬라이더를 기가 막히게 걷어낸 타구,
나타니엘 콜리스는 힘껏 뛰어올랐지만 닿지 않았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돌진, 5대 2가 되면서 승부의 축은 기울었다.
“MVP!! MVP!!"
"MVP!! MVP!!"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양손을 높이 들어 더 많은 환호를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