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MVP (16)
[필라델피아 2연승]
[역대 3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정조준]
결국 필라델피아의 승리로 끝난 2차전,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사소한 소란이 일어났다.
한국인 이인영, 일본인 나오이 츠토무가 참여한 이번 월드시리즈
이인영은 좋은 활약을 펼치는데 저 일본인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이인영이 이번 시리즈에서 7타수 4안타 2홈런 활약을 펼치는 동안 나오이 츠토무는 8타수 무안타 부진에 빠졌다.
가성비에서도 너무 차이가 나는 두 선수,
이인영이 6년 동안 5000만 달러를 받는데 비해 나오이 츠토무는 6년 7천 5백만 달러 계약을 맺고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다.
보스턴 팬들은 인종차별적 모욕까지 퍼부으며 나오이 츠토무를 비난했고, 경기장을 떠나는 일본인 팬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지금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미국 현지 여론은 물론 아시아 쪽 기자들도 보스턴 팬들의 수준을 걸고 넘어졌지만 이인영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뭘 더 바라는 거지? 난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이인영도 데뷔 초에는 홈 팬들에게 많은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
KBO 선수들은 MLB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말까지 나돌았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미국 영화를 봐도 정의의 주인공은 언제나 백인이고 유색인종은 들러리 역할을 하거나 이리저리 휘둘리다 죽어버린다.
피부 색깔 자체가 미국인들에게 ‘그 인간은 이럴 것이다.’라는 선입관을 주는 것,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백인이 주인공이었던 미국, 그 사이에 유색인종이 끼어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인영은 그 차별을 작년 시즌에 이미 겪었다.
“나한테 투표 안 한 기자들은 다 죽어버려.”
작년 시즌 MVP 투표에서 1위 표를 겨우 한 장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이런 욕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KBO에서도 외국인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지구촌, 위 아 더 월드라고 떠들어 봐도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 법, 화를 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차별을 받을수록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 내가 마음에 여유가 있고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면 어떤 차별과 야유를 받아도 그러려니 웃어넘길 수가 있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스스로가 약자라는 생각을 가지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곱게 들리지가 않는다.
옐로우 펑크? 그까짓 말 들으면 좀 어떤가.
야구 선수가 야구를 못하면 욕을 먹는 게 당연, 지금 나오이 츠토무는 인종차별에 화를 내야 하는가 아니면 형편없는 자신의 실력을 탓해야 하는가.
내가 8타수 무안타를 치고 팀 성적에 도움이 못 됐다면 그 선수처럼 노랑이라고 욕을 먹었겠지. 여느 때처럼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3차전이 열리는 TNT 파크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이인호 위원님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보스턴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공격이 문제죠. 1차전에 무득점, 2차전에서도 4득점을 올렸지만 보스턴은 올 시즌 팀 타율이 메이저리그 전체 1위 팀입니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 들어서는 0.235 밖에 안 되거든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알 수 있죠.”
“그에 비해 필라델피아는 골고루 터지고 있습니다. 조시 빌라 선수가 3안타, 브런들 선수가 4안타, 이인영 선수가 4안타, 오스틴 카터도 2차전에서 2타점을 올리면서 살아났거든요. 여기에 산체스, 토마스, 잉글리시아 선수까지 뭐 하나 틈이 없습니다.”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
선두 타자 나타니엘 콜리스는 강한 타구를 날렸지만 3루수 토마스의 글러브에 걸렸다.
정말 징그럽게 안 풀리는 경기, 콜리스는 땅을 한 번 걷어차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노랑이!!”
“너는 검둥이보다 못한 노랑이야!!”
이어지는 나오이 츠토무의 타석, 사방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이 쏟아졌다. 보스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필라델피아 팬들, 원래 쓰레기들인데 뭘 더 바라나.
우익수로 나선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타구를 기다렸다.
따악~!!
마침 이쪽으로 날아오는 타구, 앞으로 나가던 이인영은 백스텝을 밟으며 잡아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팀에도 옐로우 펑크가 있었지, 몇 몇 팬들은 자체검열에 나섰지만 쓸모없는 선수를 향한 야유만은 잊지 않았다.
‘분하다, 뭔가 보여주고 싶었는데’
더그아웃으로 물러난 나오이 츠토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실력으로 갚아주고 싶은데 성과가 나지 않는 경기, 어려운 상황에서 1보 전진하면 영웅이지만 도망치면 겁먹은 개 밖에 더 되겠나.
어려운 경기를 하고 있지만 다음 타석은 반드시라는 독기를 품었다.
보스턴의 1회 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 타자 조시 빌라는 아웃 됐지만 후속 타자 세스 브런들의 안타로 1사 주자 1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난 검둥이지만 내가 멋지다는 건 알고 있어
백인으로 태어났으면 인기가 치솟을 거라 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거기에 있는 이쁜이들, 내 곁에서 떨어지라고
난 쿨 해 보이지만 너희들의 허영심을 불태울 만큼 열정적이지
그리고 돈도 끝내주게 많아, 거기다 빌어먹을 정도로 잘생겼어
너희들이 조롱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아.
난 내가 멋지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야 끝내주는 검둥이]
어느새 또 바뀐 등장음악,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필라델피아 팬들은 환호와 침묵 사이에 놓였다.
“자!!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타율 0.571, 홈런 2개, 4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등장음악이 또 바뀌었네요. 이유 없이 바꿀 선수가 아니라 뭔가 또 의미가 있을 텐데요.”
모두가 집중하는 상황,
마운드를 지키는 밀튼 셰로드는 포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볼만 안 던지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인영은 오히려 떨어지는 공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어설픈 변화구를 앞세우느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최선, 셰로드는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따아악~!!]
“자!! 밀어낸 타구가 좌측으로 멀리!! 멀리!! 계속 뒤로 가는 타구!! 담장을 직접 때립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 아!! 2루에서 멈추는 군요!! 이인영 선수도 1루에 안착합니다!!”
“아~ 글쎄요. 맞는 순간 넘어갔다고 판단했나요? 브런들 선수가 살짝 방심한 것도 있는데, 지금은 데이비스 선수의 타구처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하하~ 이인영 선수는 지금 불만이 많네요. 충분히 3루까지 갈 수 있는 타구였거든요.”
1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브런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흰둥이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 브런들은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이인영은 연신 불만을 쏟아냈다.
저 자식의 주루 판단 미스로 손해를 본 게 몇 번째인가.
정규시즌부터 쌓여있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거기다 셰로드는 후속 타자 오스틴 카터와 산체스를 각각 삼진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위기 탈출,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이인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을 노려봤다.
1- 2차전을 잡아냈는데 저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눈치를 살피던 브런들은 알아서 기어들어갔다.
저 더러운 성깔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건드리질 못하는 것, 코치진도 눈치만 살필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기회를 놓친 필라델피아는 역공을 허용했다.
2회 초 보스턴의 공격, 1사 주자 2 - 3루 위기에서 토니 윌랜드가 중견수와 좌익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렸다.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주자들은 모두 홈인, 거기다 다음 타자가 12구만에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1사 주자 1 - 2루 위기는 계속됐다.
[따악~!!]
“아~ 이 타구가 다시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오는군요!! 오늘은 보스턴의 방망이가 불을 뿜습니다!!”
“이게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보스턴의 공격력이죠. 1 - 2차전 잡았다고 시리즈 끝난 거 아닙니다.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긴장해야 합니다.”
계속 되는 경기, 보스턴은 2사 주자 만루에서 나오이 츠토무가 싹쓸이 장타를 날리며 6대 0으로 앞서나갔다.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영웅이 되는 순간,
욕심을 낸 츠토무는 홈까지 파고들다 아웃됐지만 그 무모함에 욕설을 퍼붓는 팬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프로는 실력이 최고, 심기일전한 필라델피아 진영은 3회 말 반격에 나섰다.
[따악~!!]
“1루수가 몸을 날리지만 잡지 못합니다!! 장타 코스!! 잉글리시아 선수는 1루를 지나 2루!! 3루까지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1사 주자 2루!! 필라델피아가 추격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여기서 대타를 내겠죠. 스미스 선수가 6실점을 했기 때문에 와이즈 감독도 두고보진 않을 겁니다.”
예상대로 스미스가 빠지고 대타 댄 스테어가 들어섰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첫 타석, 타격감 조율이 쉽지 않았을 텐데 초구를 받아쳐 2루수 키를 넘기는 적시타를 뽑아냈다.
올 시즌 대타에서 18타수 6안타를 기록한 스테어, 기대가 현실로 바뀌자 필라델피아 진영은 다시 달아올랐다.
‘이거 뭔가 흐름이 안 좋은데’
보스턴의 조시 해밀턴 감독은 오른손을 턱에 괴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행동, 이제 다시 상위타선이다.
여기서 기세를 살려주면 와르르 무너지겠지, 선발 셰로드를 내리고 에드윈 에스코바르를 투입했다.
에스코바르는 조시 빌라는 3구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오늘의 대역죄인 세스 브런들이 타석에 들어섰다.
1회의 어설픈 주루만 없었어도 산뜻하게 출발 했을 텐데, 뭘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있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흰둥이라는 욕은 좀 너무하지 않았나.
여기서 뭔가 해내면 나도 할 말이 생기겠지. 항의는 안타를 때린 다음에 하기로 했다.
“스윙!! 크게 돌립니다.”
“지금은 빠른 볼을 노린 것 같은데 노림수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빠지는 볼이었거든요.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브런들은 다음 공에도 헛스윙을 돌렸다.
원래 배트 스피드가 빠른 편이 아니라 스윙 출발이 빠른 편, 빠른 볼은 분명 강점이 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볼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커트를 하는 대응력은 아직 부족하다.
여기서 찬스를 못 살리면 다시 보스턴의 흐름으로 흘러갈 경기, 브런들은 타석에서 여느 때보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도 안 돼!! 오~ 신이시여!!”
3구를 잡아당긴 브런들은 비명을 질렀다.
파울 폴 대 옆으로 빗나가는 타구,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연달아 닥치는 건가.
내심 비디오 판독을 바랐지만 필라델피아 진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분석 결과 항의해 봤자 뒤집기 어려운 타구, 지난 일은 잊고 공에만 집중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결과는 삼진, 헬멧을 집어던진 브런들은 분노를 뿜어냈다.
“젠장!! 난 쓸모없는 흰둥이야!!”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인영은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평소 뭔가 나사 빠진 얼굴로 플레이를 하던 녀석이 저렇게 화를 내다니, 그런다고 1회에 벌인 실책이 만회되는 건 아니지만 잊어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