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90화 (190/309)

190화. MVP (15)

“야구만 하면 안 지루해?”

월드시리즈 2차전을 앞둔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 세스 브런들은 오늘도 상대 팀 분석에 열중하고 있는 친구를 건드렸다.

가끔은 흘러나오는 댄스에 몸을 싣거나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며 유흥을 즐겨야 하는데 저 녀석은 그런 게 없다.

너무 열중해도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릴 텐데, 가끔은 긴장을 풀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넌 여자 친구 만날 때마다 지루하냐?”

“아니 그건 아닌데.”

“정말 좋아하는 건 계속 해도 안 지루한 거다. 넌 야구를 진심으로 좋아해 봤냐?

한 방 먹은 브런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실력도 타고 난 녀석이 노력까지 하는데 야구를 못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야구를 잘하니까 더욱 재미가 있는 거겠지, 나도 MVP급 성적을 내면 저렇게 되는 걸까. 좀 더 야구를 잘 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경기 시간이 되자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더그아웃으로 이동, 어제보다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원정에서 1차전을 잡아낸 덕분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 얼굴들, 와이즈 감독도 미소를 띤 채 선수들과 손뼉을 마주쳤다.

반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보스턴 벤치, 이를 바라보는 현지 중계석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자, 필라델피아의 1회 초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타자는 조시 빌라, 어제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기세를 살려줘선 안 됩니다. 보스턴이 올 시즌 홈 승률이 0.704, 메이저리그 전체 1위였거든요. 그리고 어제 경기가 이번 포스트 시즌 첫 패배였습니다. 만약 오늘까지 패배한다면 여파가 꽤 클 것으로 보입니다.”

보스턴 현지 중계진은 생각보다 강한 필라델피아의 전력에 당황했다.

홈에서 극강의 승률을 기록한 보스턴이 홈에서 패배를 당할 줄이야, 그것도 타선이 막히면서 1대 0 패배,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월드시리즈에서 이런 전개는 바람직하지 못했다.

딱~!

“와아아아~!!”

보스턴의 유격수 나타니엘 콜리스는 평범한 타구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아침부터 쏟아진 비에 젖어 있는 그라운드, 발이 미끄러지면서 스텝이 꼬여버렸다.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필라델피아 메뚜기들, 해충의 민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투구하라고!!”

피터 와이즈 감독은 보스턴의 선발 제임스 프리먼의 행동에 문제를 제기했다.

메이저리그도 로진을 쓰긴 하지만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경기 전 공에 미끄럼 방지용 흙을 발라 놓기 때문에 로진 백 사용이 그리 많지 않은 것, 반면 프리먼은 뒷주머니에 넣어둔 로진 백을 훌훌 털어낸 뒤 공을 다리에 문지르는 행동을 보였다.

습기가 있는 날씨라 물기를 닦아낸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눈에 띄는 장면, 주심은 별 말 없이 넘어갔지만 와이즈 감독은 시비를 걸며 프리먼의 심기를 건드렸다.

[딱~!]

“2루 땅볼, 아~ 한 번 더듬는 사이 1루 주자는 2루에 진출합니다!! 타자 주자는 1루에서 아웃, 1사 주자 2루가 됩니다.”

“지금은 공을 한 번에 잡지 못했죠. 오늘 야수들은 땅볼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단 직원들도 나름 신경을 썼겠지만,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을 거란 말이죠.”

“지금도 가랑비가 약간씩 내리고 있거든요. 오늘은 이 비가 경기에 큰 변수가 될 것 같습니다.”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인영은 뒷주머니에 넣어둔 로진을 툭툭 털고 타석에 섰다.

타자들도 배트가 미끄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액체송진을 장갑에 묻히는데, 이게 세척도 힘들고 헬멧에 때가 타서 최근에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환경 논란 때문에 스프레이 송진은 사용이 금지된 MLB, 이인영도 규정대로 액체형 송진을 쓰다 가루송진으로 바꿨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가루송진도 타자들에게 애용된다.

한 번 쓰고 툭툭 털면 알아서 떨어지는 가루,

세탁도 편하고 얼마나 좋나. 타석에서 로진 백을 터는 행동은 이제 이인영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를 잡았다.

‘나도 털 테니까 너도 털어라.’

투구를 앞두고 다시 로진 백을 어루만지는 프리먼, 하지만 이인영은 아무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잘 하는 놈은 잘 하고 못하는 놈은 못하는 게 야구, 송진가루 날린다고 따져서 뭐 할 건가.

투구에만 집중했다.

[따악~!!]

“투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타!! 그 사이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이인영 선수의 적시타!!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그런데 방망이는 왜 들고 간 겁니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배트와 일심동체가 된 건가요?”

여기서 소소한 해프닝이 일어났다.

타구를 날린 이인영은 배트를 쥔 채 1루로 질주, 1루에 안착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치고 던져버리면 그만인데 뭐가 그렇게 귀중하다고 손에 꼭 쥐었을까.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인영은 덤덤한 얼굴로 코치에게 배트를 넘겨줬다.

‘그래, 쉽게 끝나면 재미없지.’

선취점을 냈지만 보스턴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회 말 로버트 페르난데스가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날리며 동점, 선발 투수 제임스 프리먼이 2회에도 실점했지만 3회 말, 1사 주자 1 - 3루에서 데이빗 셔먼의 적시타로 다시 균형을 맞췄다.

1차전과 달리 타격 전으로 흘러가는 게임

날씨 때문에 수비 실책도 잦은 편이고 선수들은 한 순간도 방심하지 못했다.

“자, 이제 경기는 4회 말 보스턴의 공격으로 시작됩니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재정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조금씩 내리던 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폭우로 바뀌었다.

주심은 경기 중단을 선언, 사방에서 달려든 직원들이 방수포를 펼치는 장관이 연출됐다.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월드시리즈 경기가 우천 취소 된 건 2008년, 세인트루이스와 보스턴의 5차전 경기가 유일,

무려 1시간 40분을 기다려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 날로 경기가 연장됐다.

19년 만에 그 일이 반복되는 건가. 하지만 관중들은 자리를 지켰고 선수들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비구름이 계속 머물고 있어요.”

하지만 보스턴 진영 분위기는 심각했다.

뒤처지던 경기를 따라잡았고 이 기세를 몰아 역전까지 가야되는데 흐름이 끊겼다.

경기가 중단된 지 벌써 40분이나 흘렀는데 더 지켜봐야 하나. 이때, 한 선수가 느린 걸음으로 3루로 향했다.

이어지는 전력 질주,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던 팬들은 방수포 위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에 관심을 보였다.

“너희도 한 번 해 보라고!! 나만큼 잘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물을 뒤집어 쓴 이인영은 보스턴 벤치를 향해 도발을 날렸다.

나만큼 시원하게 미끄러질 수 있을까? 계속 시비를 걸어도 웃기만 할 뿐 나오질 않는 보스턴 선수단, 이인영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승리를 못하는 거라며 약을 올렸다.

“4대 2!! 5대 2!! 우리가 계속 득점한다고!! 이게 내일 너희들의 맞이할 운명이야!!”

이인영은 홈을 향해 미끄러질 때마다 스코어를 높였다.

그제야 반응을 보이는 보스턴 선수단, 나타니엘 콜리스는 코치의 만류도 뿌리치고 3루에서 홈으로 내달렸다.

수비 실책 때문에 경기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기분전환이 됐다고 해야 하나, 이 정도만 하고 끝내려고 했지만 이인영의 도발은 계속 됐다.

“자!! 이제 6대 3!!”

또 홈을 향해 전진하면서 벌어진 스코어, 그냥 무시할까 했지만 콜리스는 점수 차를 좁히기 위해 홈으로 뛰어들었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경기했던 사이 아니었나?

이 장면을 지켜보는 선수단도 팬들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 하지만 두 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경전을 이어갔다.

“자!! 이제 14대 11이야!!”

“이제 그만 하자고, 너도 지쳤잖아?”

“아니, 안 지쳤는데?”

이인영은 다시 홈으로 뛰어들어 15대 11을 만들었다.

구경을 하던 팬들도 신경전에 합세한 상황, 보스턴 팬들은 여기서 지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또 홈으로 뛰어든 콜리스, 보다 못한 보스턴 구단 직원이 뛰어들었다.

“그만 하시죠. 우천 취소 됐으니까 저희도 정비해야 됩니다.”

“좋아요. 15대 11, 보스턴의 패배입니다.”

이인영은 적진을 향해 승리의 세리머니를 날리고 그라운드에서 퇴장했다.

2대 2 동점 상황에서 우천취소 된 경기, 하지만 보스턴 선수단은 찝찝함에 인상을 구겼다.

이인영이 홈으로 미끄러질 때마다 솔직히 기분은 좋진 않았다.

올 시즌 홈에서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한 보스턴, 상대 팀 선수가 홈을 유린하고 있는데 그걸 지켜보기만 했다.

나타니엘 콜리스가 대응사격을 했지만 늦은 감이 없지 않았고, 보스턴 팬들도 선수들의 소극적인 대응에 불만을 표했다.

[보스턴, 이인영에게 홈 열어줬다]

[우천취소로 끝났지만 찝찝한 뒷맛 남겨]

그건 기자들도 마찬가지, 실점은 아니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나.

월드시리즈 시작 전, 전문가들은 모두 보스턴의 승리에 표를 던졌다.

타격과 투수력 모두 보스턴이 한 수 위라는 게 객관적인 분석,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필라델피아 선수단의 기세에 밀리고 있다.

우천취소 된 경기에서도 홈을 향한 집착을 보여준 이인영, 보스턴 선수단에겐 그만한 열정이 있는 건가.

여론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보스턴의 단장 니콜라스는 해명에 나섰다.

“방수포 위에서 미끄러지는 건 멍청한 짓입니다. 그러다 다칠 수도 있죠. 우리 선수들은 열정이 없는 게 아니라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방수포 위에서 미끄러지는 게 승리를 향한 열정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다음 날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과감한 주루와 몸을 아끼지 않는 슬라이딩이로 홈을 훔쳐냈다.

그에 비해 뭔가 위축된 보스턴 선수들, 생각보다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 8대 4!! 조금 더 뒹굴어도 괜찮다고!!”

이인영은 박수를 치며 동료들의 분투를 끌어냈다.

누구 눈엔 바보처럼 보였겠지만, 내가 홈을 훔칠 때마다 보스턴 선수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야구는 객관적인 전력이 다가 아니다.

누군가가 미쳐주면 주위 선수들도 영향을 받는 법, 야구에 미친 놈 덕분에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상승세에 올라탔다.

[따악~!!]

“아~ 이번에는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군요.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점수 차는 다시 벌어집니다. 스코어 9대 4, 필라델피아가 1차전에 이어 2차전까지 우세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건 예상 외로 너무 압도적인데요. 전문가들도 지금 머리가 복잡할 겁니다.”

“저는 필라델피아는 정말 싫어하지만 이 선수는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왜 이런 선수가 보스턴에는 없는 걸까요.”

보스턴 현지 해설위원 브래드 레드킨은 푸념을 늘어놨다.

너무 얌전하고 튀는 선수가 없는 보스턴, 보스턴은 도시가 원래 보수적이고 눈에 튀는 행동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인영은 확실한 존재감으로 팀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홈에서 2연패를 당한다는 건 보스턴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21세기 이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 4번 진출했고 모두 우승했다.

월드시리즈 진출 = 우승이라는 공식이 깨지는 건가.

염려는 현실로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