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89화 (189/309)

189화. MVP (14)

따악~!!

조시 빌라는 2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렸다.

출발이 좋은 필라델피아, 타석에 들어선 세스 브런들도 빠른 카운트 타격을 노렸다.

‘이건 아니네.’

초구는 91마일 바깥쪽 빠른 볼, 배트 스피드가 빠르지 않은 브런들은 중심을 뒤에 둔 채 별 다른 동작 없이 배트를 내지른다.

밀어서도 넘길 수 있는 파워가 있다면 초구에 반응을 했겠지만 그냥 지켜봤다.

“2구는 들어 왔다는 판정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드디어 나왔네요. 71마일 슬로우 커브인데, 로빈슨 선수가 2m가 넘는 거구 아닙니까. 타점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선 건드리기가 쉽지 않죠.”

“다만 이 구종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올 시즌 로빈슨 선수의 커브에 타자들이 스윙을 한 확률이 38%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순수 피장타율이 0.328이나 됩니다. 걸리면 위험하다는 뜻이죠.”

로빈슨은 3구를 바깥쪽으로 던져 파울을 유도했다.

슬로우 커브는 타자의 스윙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자주 던지긴 어려운 구종, 본인도 그 한계를 알고 바깥쪽 빠른 볼과 체인지업으로 카운트를 잡는다.

탈삼진 능력은 떨어지고 이닝이 거듭될수록 공이 눈에 익을 위험이 높지만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한 로빈슨은 노련한 피칭을 이어갔다.

‘빨리 좀 던져라.’

인터벌이 길어지자 브런들은 타임을 요청했다.

자세를 잡은 투수는 12초 안에 공을 던져야 되는 게 규칙, 자세를 잡지 않으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어도 된다.

3구를 던지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초,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따악~!]

“다시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조시 빌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선지 1분 10초 만에 안타를 치고 나갔거든요. 그런데 브런들 선수는 타석에서 3분 40초나 머물고 있습니다.”

“로빈슨 선수가 원래 인터벌이 긴 편이긴 한데, 오늘은 특히 눈에 띄네요. 조금 더 빠른 경기 진행을 부탁합니다.”

투구도 느리고 인터벌도 느리고 상대 팀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 질질 끄는 싸움에 질려버린 브런들은 본인의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힘껏 잡아당겼지만 3루 정면으로 간 타구, 1루 주자는 2루에서 포스 아웃 돼고 타자 주자만 살아남았다.

‘너는 시간을 좀 더 끌어야겠다.’

큰 산을 앞에 둔 로빈슨은 캡을 고쳐 쓰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론은 로빈슨이 시간을 끈다 뭐라 하는데 12초 룰에서 벗어나는 짓은 안 하고 있다.

특히 이인영은 MLB에서 빠른 볼을 잘 치기로 유명한 선수, 이 정도 시간 끌기는 당연하다며 자신의 투구를 정당화 했다.

“바깥 쪽, 낮게 들어옵니다. 89마일, 이번에도 경계선에 걸치는 군요.”

“우리가 이 선수 투구 스타일을 마냥 깎아내릴 수가 없는 게 뭐냐면, 제구가 정말 환상적이거든요. 올 시즌도 9이닝 당 볼넷은 2.83개 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에 붙이고 커브 던지면 타자는 말 그대로 바보 되는 거죠.

“그래도 걸리면 넘어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인영 선수라면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2구를 앞두고 이인영은 히팅 포인트를 약간 넓게 잡았다.

브런들과 달리 밀어서도 담장을 넘길 파워를 갖췄으니 바깥쪽 공을 신중하게 고를 필요는 없다. 타이밍만 맞추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심리전이라면 타자도 할 수 있다.

저 쪽이 공을 던질 타이밍에 내가 타임을 외치면 그만, 인터벌이 길어지자 타임을 요청했다.

‘저 자식이 내 타이밍을 뺏네?’

페이스를 빼앗긴 로빈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차분한 타자, 다음에는 네 페이스를 빼앗겠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다.’

포수 마스크를 쓴 존 라이어는 신속한 투구를 요구했다.

빠른 볼을 사인을 보냈는데 들어온 공은 체인지업, 사인교환이 어긋난 건가. 마운드에 올라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로빈슨은 포수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그렇게 또 1분이 흘러갔다.

“아~ 다시 발을 풀어보는데요.”

“이건 무슨 사우나에서 오래참기 시합하는 것 같네요. 로빈슨 선수는 도대체 뭐 하는 겁니까?”

“그래도 이인영 선수는 차분합니다. 인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안 뒤지죠.”

무려 2분을 끈 로빈슨은 4구를 던졌다.

바깥쪽으로 빠지면서 카운트는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 이 자식에겐 타이밍 뺏기가 안 통하는 건가.

약간 뜸을 들인 로빈슨은 5구를 던졌지만 배트 끝에 걸리면서 파울, 6구도 파울이 되면서 맞대결 시간은 9분으로 늘어났다.

“좋았어!!”

“이 대결은 네가 이긴 거야!!”

이인영은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로빈슨에게 볼넷을 얻어냈다는 건 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뜻, 이렇게 1사 주자 1 - 2루 기회가 왔다.

다음 타자는 오스틴 카터, 인내심과 거리가 먼 선수인데 로빈슨을 공략할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카터는 바깥쪽 빠지는 볼에 헛스윙을 돌렸다.

“아~ 이 공도 따라 나오는군요. 볼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로빈슨 선수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죠. 이 선수가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볼을 던졌을 때 스윙을 끌어내는 확률이 33%나 됩니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2위 기록이에요.”

“달리 생각하면 이런 공을 골라낸 이인영 선수의 선구안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겠죠.”

오스틴 카터는 결국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다음 타자 산체스도 2루 땅볼로 물러나면서 필라델피아의 공격은 종료, 하지만 무려 18분이 걸린 1회 초 때문에 양 팀 선수들의 집중력은 많이 떨어졌다.

“재미없어!!”

“역사상 가장 형편없는 월드시리즈야!!”

몇 몇 보스턴 팬은 로빈슨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성적은 뛰어나지만 특유의 피칭 스타일 때문에 인기는 별로 없는 로빈슨, 월드시리즈에서 이런 재미없는 투구를 봐야 하는 건가.

필라델피아 못지않은 강성 팬덤을 보유한 보스턴, 사방에서 조롱이 쏟아졌지만 로빈슨은 꿋꿋하게 자신의 피칭을 이어갔다.

딱~!!

경기는 어느덧 3회 초, 선두 타자 브런들은 초구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유격수 빌리 웨스트의 호수비가 안타를 막아내며 원 아웃, 한 발 낮은 브런들은 헬멧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로빈슨의 투구를 요약하면 실력도 없는 놈이 깐족거리면서 챙길 건 다 챙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더그아웃에 입성한 뒤에도 불만은 계속 됐다.

“이봐, 조용히 하고 저 친구 좀 보라고”

보다 못한 피터 와이즈 감독이 한 마디를 날렸다.

지금 필라델피아 타선에 필요한 건 차분함, 이인영은 말보다 행동으로 선수단에 자극을 줬다.

“초구, 떨어집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경기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네요. 저도 현역 시절 인내심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는데, 로빈슨 선수는 정말 최악입니다.”

박한우 위원은 연신 불만을 쏟아냈다.

이제 막 3회 초인데 벌써 한 시간 20분이나 흘러간 경기, 그 중 절반 이상은 로빈슨이 잡아먹었다.

이 정도면 지켜보는 쪽도 고문, 로빈슨이 등판하는 경기는 다시는 중계하고 싶지 않다는 소감을 밝혔다.

“나중에 로빈슨 선수가 이인영 선수의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제가 사양합니다. 도저히 못 봐주겠어요.”

“하하~ 박한우 위원께서 그렇게 하실 힘이 있습니까?”

“없으니까 불만이라도 쏟아내야죠. 해설위원인데 말도 못합니까?”

그 사이 이인영은 2구를 받아쳤다.

결과는 파울, 못 때릴 공은 아닌데 구속 차가 심해 타이밍을 잡기 만만치 않다. 그래도 쳐야 하는 공, 심호흡으로 짜증을 가라 앉혔다.

‘이 정도면 나올 만 한데?’

상대가 짜증나는 건 로빈슨도 마찬가지, 3구를 낮게 던졌지만 방망이는 나오지 않았다.

바깥쪽 공은 타자 몸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쳐 봤자 좋은 타구가 나오기 어렵지만 낮은 공은 걸려들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던진 위닝샷을 골라내다니, 투구를 하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4구는 바깥쪽 높은 공, 파울이 되면서 볼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됐다.

[딱~!!]

“다시 파울!! 승부는 이제 6구로 넘어갑니다.”

“지금은 체인지업인데 걷어냈어요. 일반적인 타자라면 헛스윙을 됐을 텐데, 역시 변화구 대응 능력이 있는 선수입니다.”

일반적인 타자들은 양쪽 팔꿈치가 지면과 평행을 이룬다.

한쪽 팔꿈치가 위로 올라가면 공을 중심에 맞출 수가 없고 타구가 파울 존 밖으로 밀려나간다는 상식 때문,

하지만 이인영은 왼쪽 팔꿈치가 오른쪽 팔꿈치보다 올라와 있고, 공이 날아오는 각도에 맞게 배트를 내리면서 스윙 각도를 만들어낸다.

모든 공은 매그너스 효과 때문에 점점 가라앉는데, 양팔을 미리 수평으로 맞춰 놓으면 점점 떨어지는 공에 맞춰 스윙 각을 만들 수 있을까.

이론이 아니라 실전에서 마주하는 공에 맞춰 완성시킨 타격 폼, 이런 특징 덕분에 이인영은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나 낮은 공에 큰 강점을 보인다.

그렇다고 빠른 공을 못 치는 것도 아니고 걸렸다 하면 장타, 약점이 없는 타격기술 앞에 로빈슨은 드디어 실투를 던졌다.

[따아악~!!]

“걸렸고!! 이 공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버립니다!!!! 이인영 선수의 선제 솔로 홈런!!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6번 째 홈런입니다!! 오늘도 홈런!! 아무도 이 선수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타구 속도가 112마일, 거리는 459피트가 나왔거든요!! 올 시즌 백 베이 파크에서 나온 가장 큰 홈런입니다!!”

홈런을 날린 이인영은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다.

투구도 갑갑했는데 베이스러닝까지 느긋하게 하면 팬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날 경기는 1대 0으로 종료, 이인영의 홈런이 결승득점이 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원정 1승을 챙겼다.

112마일짜리 홈런을 치고 8초 만에 홈으로 돌아온 오늘의 영웅, 왜 그렇게 급하게 베이스를 돈 걸까.

기자들의 질문에 이인영은 속마음을 드러냈다.

“여러분들도 보셨겠지만 오늘 로빈슨은 정말 느긋한 투구를 했습니다. 공하나 던지는데 최고 2분 정도 걸렸나요?

“2분 11초였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땡큐~ ”

오늘도 큰 웃음을 주는 선수, 어쨌든 이인영은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제가 홈런을 날린 공은 69마일짜리 커브였습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스윙을 2번 할 수 있는 속도였죠. 경기 내내 이런 공을 지켜본 팬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저는 그 답답함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당신도 로빈슨의 투구에 짜증이 난 겁니까?”

“당연하죠. 제가 올해 선수 생활 8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그렇게 짜증나고 느린 투구는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로빈슨은 훌륭한 투구를 했으니까요. 그건 인정합니다.”

로빈슨은 오늘 8회 까지 7피안타 1실점 투구를 펼쳤다.

경기운영은 조금 답답했지만 어쨌든 타자들의 타이밍을 효과적으로 빼앗은 투구, 이인영도 3번 째, 4번 째 타석에선 범타로 물러났다.

4차전 안에 시리즈를 못 끝내면 그 자식을 또 봐야 한다는 건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4차전 안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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