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MVP (13)
“초구는 볼입니다. 들어오질 못하네요.”
“정확히 말하면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는 거죠. 이인영 선수가 좋은 타격을 하고 있는 이유는 볼넷이 적기 때문이니까요."
이명한 캐스터는 박한우 위원의 해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타격과 적은 볼넷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사실 개떡처럼 말한 거지만 이인호 위원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선구안이라는 개념부터 출발해야 하는 논리, 볼넷을 특히 잘 얻어내는 선수가 있는 걸까?
분명한 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구속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 구위에 자신이 있는 선수들은 더 이상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삼진을 잡기 위한 투구를 하고 있다.
타자들은 이제 선구안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볼을 골라내기 어려워 진 것, 실제로 신시내티의 토비 시버스는 최근 3년 동안 성적이 급감했다.
■ 2021~ 2024년 평균성적
= 타율 0.297, 홈런 27개, 92타점, 출루율 0.421, 장타율 0.519
■ 2025~ 2027년 평균성적
= 타율 0.273, 홈런 15개, 65타점, 출루율 0.374, 장타율 0.414
아직 30대 초반 밖에 되지 않은 선수가 받아들이기 힘든 몰락
분석 결과, 토비 시버스의 배팅 스피드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바뀐 게 있다면 팔꿈치 높이를 약간 낮춰 빠른 볼 대응능력을 높였다는 것 뿐, 시버스는 왜 이런 변화를 택한 걸까.
이유는 간단했다.
갈수록 향상되는 투수들의 빠른 볼에 시버스의 배팅이 이를 따라오지 못한 것, 시버스의 선구안은 지금도 살아 있다.
최근 3년 동안 연 평균 81볼넷을 얻어낼 정도, 하지만 빠른 볼 타격이 안 되면서 장타력이 급감했다. 볼넷에 집중하고 똑딱질 밖에 못하는 타자에게 어떤 투수가 겁을 먹겠나.
결국 볼을 잘 보는 타자가 아니라 빠른 볼을 잘 치는 타자들이 볼넷을 얻어내는 시대가 됐다.
올 시즌 이인영의 타석 대비 볼넷 비율은 10.9%, 일반적인 타자들이 평균 10% 정도를 기록한다.
38홈런을 친 선수가 이 정도 볼넷 비율을 기록했다는 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거기다 순장타율은 무려 0.306, 누가 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수 있을까.
케레케스가 빠른 볼 승부를 걸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다음 공은 커브야. 넌 못 칠 걸?”
LA의 포수 래리 포터는 소심한 반항에 나섰다.
빠른 볼에 비해 변화구는 살짝 약한 이인영, 올 시즌 커브 상대 타율은 0.265에 불과하다.
빠른 볼을 던지는 건 겁나고 배터리는 변화구를 택할 타이밍, 하지만 이인영은 무시하고 공에만 집중했다.
“스트라이크!!”
예고대로 2구는 커브, 칠 공이 아니라 그냥 보냈다.
“역시 커브는 입맛에 안 맞나 보지? 다음도 커브인데 어떻게 할 거냐?”
기가 살은 래리 포터는 심리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인영은 무시하고 정면을 응시, 바깥쪽으로 빠진 래리 포터는 빠른 볼을 요구했다.
스트라이크 콜을 받기엔 너무 먼 코스,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LA의 댄 말론 감독은 배터리에 사인을 내렸다.
절대 스트라이크 주지 말라는 지시, 바깥쪽으로 빠진 래리 포터는 커브를 요구했다.
[따아악~!!]
“밀어낸 타구가!! 좌측으로 멀리~ 담자~ 앙!! 넘어갑니다!!!! 3연 타석 홈런!! 필라델피아를 월드시리즈로 인도하는 한방입니다!! 스코어 5대 2!! 이번 시리즈에서 다섯 번째 홈런입니다!!”
“지금은 커브인데 밀어 쳤단 말이에요!! 이 선수를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그냥 도망치는 게 나았네요. 쐐기포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타격이 된 순간 이인영은 배트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커브 던질 건데 어떻게 할 거냐고? 그 답은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열광에 빠진 관중석, 이인영은 망연자실한 LA 선수들 곁을 하나 둘 지나 쳤다.
“It's the only answer I have"
= 이게 내 답이다.
마지막으로 심기를 걸린 래리 포터에게 한 방 거하게 먹여줬다.
커브 던져봤자 쳐 맞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LA, 이 홈런을 기점으로 LA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더 발악해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투쟁심이 꺾이면서 집중력까지 흐트러졌다.
실책까지 겹치면서 완전 붕괴, 반면 필라델피아는 그로기 상태에 빠진 LA를 착실히 밀어붙였다.
8회 말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7대 2, LA 선수들은 더그아웃 보호 펜스에 건어물처럼 매달렸다. 하나 같이 생기가 없는 얼굴, 포기한 자에게 기적은 찾아오지 않았다.
“와아아~!!”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적립되자,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한 덩이로 뭉쳐 월드시리즈 진출을 자축했다.
16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 이번 시리즈에서 18타수 10안타 5홈런 12타점을 기록한 이인영은 NLCS MVP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MVP 연호,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슈퍼스타는 인터뷰에서 덤덤한 소감을 밝혔다.
“이인영 선수, 월드시리즈 진출과 MVP 수상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역시 세 번째 타석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요. 바깥쪽 떨어지는 커브를 밀어내서 홈런을 치셨는데, 솔직히 치기 어려운 공 아니었습니까? 그걸 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나요?”
홈런 3개를 쳐냈지만 역시 주목을 받은 건 세 번째 홈런,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인영은 마이크에 입을 댔다.
“그 상황에서 팀과 팬이 제게 원한 건 볼넷이 아니었습니다. 칠 수 있는 공은 쳐내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자들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역시 볼넷보다는 안타를 칠 수 있는 선수가 위협적이라는 걸 증명한 경기, 한 기자가 월드시리즈에 임하는 소감을 물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셨는데요. 이번 활약, 월드시리즈에서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전에도 말씀 드린 것 같은데, MVP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 선수입니다. 월드시리즈에서 패배한다면 MVP로 불릴 자격도 없겠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결과가 좋은 나쁘든 팀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뿐, 인터뷰를 마친 이인영은 클럽하우스로 돌아와 동료들과 샴페인 파티를 즐겼다.
* * *
“만남이 기대됩니다. 같은 아시아 선수로서 멋진 경기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보스턴의 우익수 나오이 츠토무는 기자들 앞에서 소감을 밝혔다.
나오이 츠토무는 이인영보다 2년 앞서 메이저리그를 밟은 선수, 작년 시즌은 부상으로 93경기 밖에 뒤질 못했지만 올 시즌은 142경기를 모두 소화하며 타율 0.273, 홈런 22개, 77타점을 올렸다.
이번 월드시리즈는 아시아인 야수가 2명이나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역사적인 무대, 하지만 이인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언제부터 한국과 일본이 같은 아시아였습니까?”
한국은 한국이고 일본은 일본, 언제부터 양국이 아시아라는 개념에 묶여 있었나.
뭣보다 대동아주의를 앞세워 주변 국가를 침략한 역사가 있는 일본, 같은 아시아라는 그럴 듯한 말을 앞세우면 내가 웃으며 어울려 줄 거라고 생각했나.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라며 선을 그었고, 이 논란은 양국 야구팬의 기싸움으로 번졌다.
[한국인들은 은혜라는 걸 몰라. 일본야구가 없었다면 한국 야구가 출범이나 할 수 있었겠어?]
-> 일본 야구가 없었으면 한국 야구도 없었지. 이인영은 그런 배경을 모르는 것 같아
-> 그렇게 따지면 야구의 종주국은 미국 아니냐? 그 미국에 선빵 갈긴 게 누구더라?
[일본은 자기들이 아시아의 맹주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 그 건방진 생각이 침략으로 이어졌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
-> 그놈의 같은 아시아, 웃기지도 않은 소리지. 한국은 한국이고 일본은 일본이다. 한국 선수가 잘 하는 게 일본의 자랑이 될 순 없지.
-> 동감, 이인영은 아시아 야구의 자랑이 아니라 한국 야구의 자랑이다.
일본과 같은 아시아에 포함됐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게 한국의 반응, 별것 아니지만 이번 월드시리즈에 양국 팬들이 그만큼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미국 다음으로 큰 야구 시장을 가지고 있는 일본과 한국, 논란이 거세질수록 중계권을 쥔 MLB 사무국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스타성이 있어.’
‘광고 계약 추진해 보자.’
한국 기업들도 이번 월드시리즈에 주목했다.
이제 이인영은 말 한 마디로 여론을 뒤흔들 수 있는 입지에 올라섰다. 작년도 대단했지만 올 시즌은 더 대단한 존재감, 이런 사람을 광고 모델로 써야하지 않겠나.
이렇게 이인영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받으며 월드시리즈 무대에 섰다.
‘여기서 이기면 나는 진짜 일인자다.’
클럽하우스에서 이인영은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진정한 일인자에 오를 수 있는 무대,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리, 각오를 다지자 심장박동은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철저하고 냉정하게 파괴적으로,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자!! 월드시리즈 1차전!! 필라델피아의 라인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루수 오스틴 카터, 2루수 조시 빌라, 3루수 프랭크 토마스 … (중략) …
그리고 우익수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인영 선수!! 아시아의 자랑이 아닌 한국 야구의 자랑입니다!!“
“누가 진정한 아시아의 맹주인지 이번 시리즈에서 아주 끝장을 보죠. 다시는 건방진 소리 못하도록 밟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시작부터 거친 입담을 발휘하는 박한우 위원, 반면 이인호 위원은 그 옆에서 침묵을 지켰다.
한국 야구의 자랑이 된 아들이지만 좁게 보면 이 씨 집안의 자랑,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너무 욕심을 앞세워도 안 되는 법, 어떤 결과가 나오든 최선을 다하길 바랐다.
“자, 오늘 보스턴은 허만 로빈슨을 마운드에 올립니다. 올 시즌 28경기 등판 18승 4패, 평균자책점 2.96, 187이닝 동안 볼넷 59개, 탈삼진은 149개를 기록했습니다.”
“보시다시피 길쭉하죠. 신장이 2미터가 넘는 선수인데, 최고 구속은 94마일 평균 구속은 90마일이 약간 넘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죠. 리그 최고 수준의 투심에 큰 키에서 내려오는 커브, 그리고 이를 보조하는 체인지업도 뛰어납니다. 정면 승부를 피하는 유형도 아니에요.”
허만 로빈슨은 올 시즌 땅볼 유도 비율 56%를 기록했다.
땅볼은 홈런은 물론 2루타도 나오기 어려운 타구, 로빈슨을 상대하는 타선은 말 그대로 미쳐버린다.
안타는 그냥저냥 때려낼 수 있는데, 장타로 주자를 불러들일 수 없으니 병살도 많이 나는 편, 거기다 가치가 0 이하인 구종은 한 개도 없다.
모든 구종을 균등한 수준으로 던질 수 있다는 게 뭘 뜻하겠나.
구속은 빠르지 않아도 WAR만 따지면 매년 4이상을 찍어주는 특급 투수, 여기에 리그 최강을 자랑하는 보스턴의 내야진이 합세하면서 로빈슨은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올라섰다.
화끈한 타격과 홈런을 앞세우는 필라델피아 타선과는 상성이 맞질 않는 투수, 하지만 타석에 선 조시 빌라는 자신 있게 방망이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