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MVP (12)
[LA 4차전 반격]
[시리즈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열린 4차전에서 LA는 기사회생 했다.
3차전까지 선발진이 무너지면서 패배를 반복한 경기, 4차전 선발로 낙점된 어서리는 한 걸음만 삐끗해도 침몰하는 살얼음판 위에서 4이닝 무실점 투구로 팀을 지켜냈다.
답답한 타선은 여전했지만 불펜진이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8회 초 대타 윌리엄 바네스가 적시타를 뽑아내며 1대 0으로 앞서나갔다.
최종 스코어는 1대 0, LA 타선은 필라델피아 투수진에게 삼진 13개를 헌납하며 고전했지만 어쨌든 귀중한 승리, 댄 말론 감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인영 3타수 무안타 1볼넷 침묵]
[득점권 기회 2번 살리지 못했다]
반면 필라델피아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인영이 침묵하면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욱 더 아쉬움이 남는 결과, 하지만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Ye, I was lost, that happens”
= 그래요. 나는 졌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3타수 무안타 쳤는데 뭘 어쩌라는 건가.
앞선 3경기에서 홈런 2개 포함 11타수 7안타를 퍼부었는데 오늘 한 경기 못했다고 눈물을 흘려야 하나.
당신들 중 돌을 던질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며 가슴을 폈다.
“오늘 부진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요? 야구선수에게 경기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게임을 하기 전 상대가 무슨 공을 던질지 어떤 작전으로 나올지 전부 생각을 하고 계획합니다. 하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거의 다 무용지물이 되죠. 부진에 이유를 따진다면 끝도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로 끝내야 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인영은 타들어 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가 찬스를 한 번이라도 살렸다면 5차전까지 갈 일도 없었는데, 하지만 더 참기 힘든 건 LA의 조롱이었다.
[You're lose, that always happen]
= 넌 졌어. 언제든 일어날 일이지
4차전 만에 1승 거뒀다고 좋아하기는, 다음 5차전에서는 반드시 박살내겠다는 각오를 품었다.
* * *
“자,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 필라델피아는 휴 스트러프 선수를 앞세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1승 무패 평균자책점 2.57, 팀의 승리를 견인했습니다.”
“한 물 갔다 뭐다 해도 역시 필라델피아의 에이스죠. 굳이 시리즈를 6차전까지 끌고 갈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끝내야죠.”
양 팀의 에이스를 앞세운 5차전, LA도 멘탈 붕괴로 예정보다 일찍 내려간 존 킨사이드를 앞세웠다.
LA 지역 여론에선 댄 말론 감독이 킨사이드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고집했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LA 투수진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킨사이드가 해줘야만 승산이 있는 시리즈, 3차전에서 가벼운 목 부상을 입은 헤인스도 출장을 강행했다. 그만큼 모두가 승리에 간절한 입장, 타석에 들어선 크리스 스나이더는 자세를 잡았다.
‘이 짓도 벌써 7년인데 정말 어렵구나.’
헛스윙을 돌린 스나이더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타격은 겉보기엔 별 거 없다.
배트를 쥐고 공을 치면 그만, 내가 해도 너보다는 잘 하겠다는 관중의 야유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쉬운 일이라면 2할 5푼에 15홈런 치는 선수가 1120만 달러를 받겠나.
600타석 이상을 나가도 30홈런 치기 어려운 타격의 세계, 그 형편없는 확률에 돈을 지불하는 구단, 매번 지기만 하는 선수가 스타 소리를 듣고 고액연봉을 받는 게 야구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 오늘도 기적을 향한 몸부림은 계속됐다.
“스윙!! 크게 돌립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은 체인지업이죠. 역시 게스 히팅을 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볼 배합에 대응이 안 됩니다.”
“뭐… 스트러프 선수의 체인지업이 그만큼 좋다는 뜻이겠죠. 저 자리에 서면 아무 것도 안 보일 겁니다. 스트러프 선수가 구위가 좋다는 말은 못 듣는 선수인데, 평균 구속이 92마일이거든요. 국내 선수들의 평균 구속을 훨씬 웃도는 수준입니다.”
이인호 위원은 스나이더의 입장을 변호했다.
우리도 한때 KBO에서 뛰었던 선수지만 140km 공도 쳐내는 게 쉽지가 않다. 그렇게 잘 치는 아들도 어제 경기는 3타수 무안타, 이게 타격 아니겠나.
스나이더의 막무가내 스윙을 비판할 생각은 없었다.
그 사이 스나이더는 바깥쪽 높은 빠른 볼에 삼구 삼진,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구위가 좋은데’
산체스 포수는 스트러프에게 공격적인 투구를 요구했다.
다음 타자 맥퀸은 빠른 볼 2개로 2루 땅볼 처리, 자신감을 얻은 스트러프는 헤인스를 맞이했다.
목 부상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출장을 강행하다니, 테러를 저지른 건 이쪽이지만 어쨌든 높게 평가해야 할 자세 아닌가.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승리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선수, 초구부터 몸 쪽 깊숙한 코스를 노렸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날아 담장 위로 사라집니다!! 마이클 헤인스의 솔로 홈런!! 이번 시리즈에서만 홈런 3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코어 1대 0!! LA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이건 헤인스 선수가 노렸네요. 체인지업을 던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는데 놓치질 않았습니다.”
노림수에 완벽히 걸려든 한 방, 목에 부상을 입었는데 이런 스윙이 가능하단 말인가.
수 싸움에서 당한 산체스 포수는 홈에 입성하는 주자를 씁쓸한 얼굴로 지켜봤다. 다음 타자는 땅볼 처리하면서 이닝 종료, 필라델피아의 공격이 시작됐다.
어제 침묵한 테이블 세터진은 오늘도 무안타로 출발, 주자 없는 상황에서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내가 넘기면 그만이지.’
스트러프가 홈런을 맞았지만 뭐 어쨌다는 건가.
헤인스가 홈런을 쳤다면 나도 때릴 뿐, 몸 쪽 약간 낮게 들어온 공을 들어올렸다.
따아악~!!
“우와아아~!!”
맞는 순간 홈런이라는 걸 직감 할 수 있는 타구, 또 이인영에게 당한 킨사이드는 포수가 던져준 공을 거칠게 낚아챘다.
시리즈 내내 92마일 근처에 머물렀던 킨사이드의 구속, 지금 공은 95마일이었다.
‘별거 아니었음’
좌익수 스나이더는 2루를 도는 주자의 거만한 얼굴을 노려봤다.
프로선수로서 말하는데 지금 공은 절대 가볍게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저 자식의 얼굴은 별 거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게 2년 연속 3할 6푼, 30홈런을 넘긴 타자의 저력인가.
타격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입장에선 기가 막힐 뿐,
그 사이 홈을 밟은 이인영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따아악~!!
하지만 3회 초 분위기는 다시 LA 쪽으로 기울었다.
헤인스가 센터 쪽 담장을 넘어가는 대형 홈런을 날린 것, 스트러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타자들은 내 공을 못 치고 있는데, 헤인스가 특별한 것뿐일까. 이를 증명하듯, 스트러프는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3회 말, 이인영은 두 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따아악~!!]]
“어?!! 이 타구는 계속 뒤로!! 계속 가는 타구!! 우익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립니다!! 이인영 선수의 연타석 홈런!! 장군에 이은 멍군입니다!! 스코어 2대 2!! 필라델피아가 다시 균형을 맞춥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4번 째 홈런!! 고감도의 장타력을 선보입니다!!”
“이젠 정말 사람처럼 보이질 않네요. 이런 선수가 6년 동안 KBO에 머물렀다니… 거긴 너무 비좁았습니다.”
대포 싸움에 한껏 달아 오른 관중석, 스트러프는 동료들 틈에 섞여 오른 손을 내밀었다.
내 실책을 만회해 준 동료,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너 지금 헤인스 상대로 도망치겠다는 생각하고 있지?”
“뭐?”
“분명히 말하는데 도망치지 마, 홈런 맞아도 돼. 내가 또 홈런 치면 되니까.”
이때 이인영은 그런 친구의 속마음을 훑어냈다.
LA에 헤인스가 있다면 필라델피아에는 내가 있지 않나. 더 좋은 대포가 여기 있는데 왜 화력전을 피하는 건가.
먼저 꽁무니를 빼는 쪽이 마운드를 내려가겠지, 다음 타석도 정면 승부하라며 자극을 줬다.
“너 내가 홈런 맞아도 또 홈런 칠 수 있어?”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돼”
오늘의 영웅은 한 마디 툭 던지고 저쪽으로 멀어졌다. 정말 무서운 자식, 저 녀석에 비하면 헤인스는 귀여워 보였다.
그렇게 계속 진행 된 경기, 6회 초 마운드에 오른 스트러프는 1사 주자 1루에서 헤인스를 맞이했다.
투수를 바꿔야 할 타이밍, 그래도 거르고 교체하는 게 낫지 않겠나. 산체스에게 피하라는 사인을 보냈지만 헤인스는 승부를 택했다.
[딱~!!]
“유격수가 잡아서!! 2루에 송구!! 1루에는 던지지 못합니다!! 아~ 여기서 병살이 안 되는 군요!!”
“지금은 사인이 안 맞았네요. 조시 빌라 선수는 토마스 선수가 직접 2루를 밟고 1루로 던지는 걸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박한우 위원의 말대로 토마스는 실책을 인정했다.
내가 직접 밟았어야 송구가 원활했던 상황, 우측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던 조시 빌라는 빠르게 1루 송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스트러프가 헤인스를 잡아냈다는 것, 피터 와이즈 감독도 만지작거리던 불펜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타자는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이닝 종료, 6이닝 2실점 투구를 펼친 스트러프는 홈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6이닝 이상 투구만 3번, 불펜의 피로를 덜어준 활약은 박수를 받기 충분했다.
이어지는 필라델피아의 6회 말 공격, 투수 타석에 대타 투입된 로버트 스워드는 2구를 힘껏 잡아당겼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좌익수 키를 넘어갑니다!! 타자 주자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필라델피아가 득점 기회를 잡습니다!!”
“이제 토마스 선수 타석이죠. 어제도 오늘도 안타가 없지만 그래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4안타를 치고 있는 토마스의 등장, 위기를 느낀 LA의 댄 말론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에이스 킨사이드의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교체가 필요한 상황,
한참을 망설이던 킨사이드는 공을 넘겨줬다.
5이닝 2실점,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역전주자를 남겨두고 내려간 탓에 마음은 편치 않았다.
딱~
토마스는 1루로 타구를 굴려 주자를 3루로 보냈다.
주자가 2루에 있는데 이런 작전을 하다니, 하지만 와이즈 감독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거 진짜 신경 쓰이네.’
마운드를 넘겨받은 조셉 케레케스는 정면을 응시했지만 신경은 3루 주자에 쏠렸다.
어정쩡한 타구만 나와도 실점, 이 위기를 넘겨도 다음 타자가 이인영이라 부담감이 크다.
일단 브런들을 잡아내는 게 우선, 바깥쪽 빠른 볼을 던졌지만 배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좋아!! 잘 보고 있어!!”
와이즈 감독은 박수를 치며 브런들을 응원했다.
브런들은 이인영보다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클러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브런들을 거르고 이인영을 상대로 병살작전을 노릴 건가?
브런들과 이인영을 모두 거르고 1사 만루에서 오스턴 카터를 상대할 수도 있지만, 주자가 3루에 있으면 볼넷을 택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공을 잘못 뺏다가 폭투가 되면 역전, 3루 주자는 존재만으로도 배터리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뒤지고 있는 LA가 이 부담을 버텨낼 수 있을까. 아웃카운트 하나를 보더라도 압박을 가하는 작전을 택했다.
“다시 참아냅니다!! 카운트는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이러면 걸러야죠.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브런들은 고의사구로 볼넷으로 1루를 밟았다.
이제 타석에는 이인영, MVP를 연호하던 홈팬들은 이인영의 등장 곡을 연호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찬스 상황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낸 선수가 있었던가.
양 팀 벤치의 온도차는 극명하게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