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MVP (11)
“자, 이제 3대 0으로 뒤진 LA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마이클 헤인스, 이번 챔피언십시리즈에서 8타수 2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인스 선수뿐만 아니라, LA 타선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시즌 말미에 그런 조짐이 보이긴 했는데, 포스트 시즌 들어 더 두드러지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LA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팀 타율 0.230, OPS는 0.735 밖에 안 되거든요. 참고로 올 시즌 최악의 공격력을 보여준 샌디에이고의 팀 타율이 0.242였습니다. LA가 얼마나 답답한 공격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헤인스는 92마일 초구를 그냥 보냈다.
올 시즌 헤인스는 라인 드라이브 - 뜬 공 타구가 전체 타구의 64%를 기록했지만, 이번 포스트 시즌에선 인상적인 활약은 하지 못하고 있다.
앞선 2차에서 홈런 1개를 기록했지만 그것 뿐, 이 한 방도 팀의 패배로 빛을 잃었다.
전체적으로 명성에 걸맞지 않는 활약, 필라델피아 극성팬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헤인스를 물어뜯었다.
“넌 상 받을 자격 없어!!”
“올스타전 MVP 뱉어 내!! 이 사기꾼아!!”
올 시즌 올스타전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인영은 그날 선제 솔로 홈런 포함,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NL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MVP는 마이클 헤인스의 몫, 헤인스는 팀이 3대 2로 뒤진 4회 말 공격에서 에릭 바인스의 2구를 잡아당겨 3대 3 동점을 만들었다.
올스타전 성적은 3타수 2안타 1타점, 분명 인상적인 활약이었지만 이인영은 7회에 교체된 헤인스와 달리 9회까지 그라운드를 지켰다.
문제는 MVP 투표용지가 9회 초에 이미 수거됐다는 것, 그때 이인영은 펜스 앞에서 홈런 성 타구를 걷어내는 믿기 힘든 플레이를 선보였다.
투표에 반영될 수 있는 플레이를 했건만, 투표용지가 일찍 수거되는 바람에 투표에 반영이 안 됐고 결국 헤인스가 MVP를 받았다.
“투표 다시 해!!”
“눈이 썩었냐?!! 이 멍청이들아!!”
그날 필라델피아 홈 팬들은 헤인스의 수상에 격한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투표용지가 9회 초에 이미 수거됐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커미셔너가 직접 나서 해명했지만 문제가 없었다는 말을 반복했을 뿐, 리그 MVP 수상 논란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LA 여론은 헤인스가 올스타전 MVP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고 반격, 더 나아가 리그 MVP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라델피아는 헛소리 하지 말라고 반격, 그때부터 시작된 논쟁은 9월에 들어서야 끝났다.
하지만 현재진행중인 올스타전 MVP 수상 논란, 필라델피아 팬들은 넌 수상자격이 없다며 욕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볼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헤인스 선수가 올 시즌 37홈런을 쳤는데, 홈런을 친 30경기에서 팀이 28승을 거뒀어요. 그런데 그 공식이 이번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에서 깨진 겁니다. LA 입장에선 충격이 컸을 겁니다.”
“본인도 뭔가 위축이 된 것 같아요. 초구도 그냥 보내고, 뭔가 정규 시즌 답지 않은 활약이거든요. 겉모습과 달리 너무 섬세한 것 같습니다.”
“하하~ 여기서 왜 외모를 따지십니까?”
“아니, 그렇잖습니까. 누가 봐도 이인영 선수가 훨씬 가녀린 얼굴인데, 성격은 정 반대에요.”
박한우 위원도 여기에 한 몫 거들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근육질 몸매와 덥수룩한 수염까지, 한 눈에 봐도 헤인스는 강인한 인상이다.
반면 이인영은 수염 하나 없는 얼굴에 얌전해 보이는 인상, 하지만 두 선수의 행보는 너무 다르다.
헤인스는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인터뷰도 차분한 편, 반면 이인영은 누구보다 공격적이다.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려고 했는데 강아지에게 손가락을 물리는 기분이랄까.
헤인스의 성격을 알고 있는 필라델피아 배터리는 몸 쪽 코스를 공략하며 상대의 심기를 건드렸다.
“야!! 그 자식 호구야!!”
“그냥 맞춰버려!! 덤비면 두들겨 패면 돼!!”
필라델피아 더그아웃도 한 몫 거드는 중, 약간 욱한 헤인스는 다음 공을 힘껏 잡아당겼다.
따아악~!!
힘차게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헤인스는 보란 듯이 배트를 집어던졌고 마운드의 제임스 오델리는 바로 대응했다.
“배트는 왜 던져 이 XXX야!!”
1루로 가던 헤인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보다 배트 플립을 많이 하는 게 필라델피아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뭐라고 하는 건지, 하지만 홈을 안 밟으면 홈런이 취소되기 때문에 달려들진 않았다.
“덤벼!! 쫄보라 싸움도 못 거는 거냐?!!”
“거기 가만히 있어!! 홈 밟고 붙어줄 테니까!!”
“지금 당장 덤벼 봐!! 왜?!! 겁나냐?!!”
3루를 밟을 때까지 계속되는 오델리의 시비, 홈을 밟은 헤인스는 마운드로 향했지만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온 동료들의 만류 때문에 싸움은 성사되지 않았다.
역시 싸움과는 거리가 먼 녀석,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다음 이닝은 반드시 맞춰버리자고 입을 모았다.
‘진짜 악당이구나. 우리는’
이인영은 동료들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팀의 특색이라면 특색인 건가.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하면 안 된다는 전형적인 놀부 심보, 그런데 이런 도발에 낚이는 선수들이 있으니까 하는 거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시리즈 내내 민감하게 반응하는 헤인스, 거기다 화만 내지 직접 달려들진 못하고 있다.
저렇게 행동하면 호구되기 십상, 원래 선한 자의 약점을 잡아 흔드는 게 악당의 특성 아닌가. 철저히 악당답게 행동했다.
그리고 경기는 흘러 3회 초,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마이클 헤인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유격수 위로 넘어갑니다!! 마이클 헤인스의 안타!! 오늘 2타수 2안타를 기록합니다!!”
“헤인스가 드디어 살아나네요. 이렇게 되면 경기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다시 찾아온 필라델피아의 위기, 마운드의 오델리는 2루수 프랭크 토마스와 눈빛을 마주쳤다.
저격에 실패했으니 그 다음은 토마스의 몫,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딱~!!]
“유격수가 잡아서 2루에!!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아~ 그런데 이게 뭐죠?!! 헤인스 선수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딩을 들어가다가 무릎에 부딪친 것 같은데요. 어휴~ 아찔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병살을 막기 위해 1루 주자는 전력을 다해 2루로 돌진할 수밖에 없던 상황,
예전부터 더티 플레이로 유명했던 프랭크 토마스는 점핑 스로우를 하면서 무릎을 헤인스의 얼굴 높이에 맞췄다.
다만 조준을 약간 높게 잡으면서 니킥 시도는 실패, 그래도 다리에 머리가 걸리면서 헤인스는 목이 뒤로 꺾였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던 순간, 이렇게까지 더러울 수 있는 건가.
댄 말론 감독은 당장 그라운드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주루 방해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룰의 사각지대를 이용한 토마스의 더티 플레이, 필라델피아 팬들도 쌍방과실을 주장하며 LA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 어디 해보자 이거지?’
시리즈 내내 얌전하게 대응했던 LA 선수단은 불타올랐다.
일단 다음 공격에서 이인영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고, 수상한 낌새를 느낀 필라델피아 선수단도 대응에 나섰다.
“야, 무조건 출루해야 된다.”
“못하면 저 자식 빈볼 맞는다고”
“알고 있어.”
3회 말 공격을 앞두고 프랭크 토마스는 출루를 자신했다.
우리가 멋대로 벌인 일인데 주축선수가 다치면 손해, 토마스는 눈에 불을 켜고 볼을 골라냈다.
[따악~!!]
“당긴 타구가!! 3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토마스 선수는 오늘 2타수 2안타!! 공격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이제 세스 브런들 - 이인영 선수로 이어지거든요. LA는 여기서 추가점 내주면 어려워집니다. 총력을 다 해야겠죠.”
댄 말론 감독은 불펜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목에 약간 부상을 입은 헤인스를 생각하면 복수를 해야 하지만 지금은 이 위기를 넘기는 게 우선, 이미 몸을 풀고 있던 투수들도 마지막 연습 투구에 나섰다.
그 사이 세스 브런들이 좌익수 뜬 공으로 물러나면서 무사 주자 1루, 이인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LA는 바로 투수를 교체, 좌완 웨이드 마일리가 마운드에 올랐다.
“빈볼 안 맞게 조심해!!”
“분명 던질 거라고!!”
이인영은 더그아웃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미소를 지었다. 일은 본인들이 저질러 놓고 조심하라니, 기가 막혔지만 일단 타격에 집중했다.
따악~!!
“와아아아~!!”
우중간으로 뻗어나가는 타구,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토마스는 2루와 3루를 지나 홈까지 파고들었다.
4대 1을 만드는 적시타, 2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MVP!!"
"MVP!!"
오늘 경기에서 혼자 3타점, 관중들은 MVP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지만, LA의 유격수 제프리 맥퀸은 2루 주자 옆에서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다.
“너희들 정말 더럽게 경기하는 거 알고 있지?”
“지금 성인군자 상대하는 줄 아냐? X같으면 이겨보라고, 너희들이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이라면 우리 같은 악당쯤은 이겨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 4대 1이다. 패자는 정의가 될 수 없지, 기억해 두라고”
이인영은 바로 맞받아쳤다.
패배자는 승자의 입맛대로 서술되는 법, LA는 어떻게든 점수 차를 좁히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목이 불편하다.’
문제는 헤인스의 부상, 목이 약간 뻐근한 탓에 타석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경기 초반 놀라운 타격감각을 보여준 헤인스는 이후 2타수 무안타로 부진, 결국 LA는 5대 1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번 3차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끈 선수는 3타점을 올린 이인영이 아니라 프랭크 토마스, 예전부터 교묘한 더티 플레이로 주자들에게 위협을 가했던 선수라 LA 기자들은 고의성을 주장했다.
“헤인스는 올 시즌 뛰어난 활약을 했고 저는 그 선수의 플레이를 존중합니다. 저는 태클을 피하기 위해 점프를 했고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경기를 하다보면 일어나는 일이죠. 헤인스에게 일어난 불행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원한을 제게 돌리는 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프랭크 토마스는 노련한 언론 플레이를 펼쳤다.
더티 플레이 때문에 언론의 구설수에 오른 게 한 두 번이 아니라 대응 플랜도 다 갖춰져 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 LA 지역기자들도 더는 따지고 들지 못했다.
“우하하하~!!”
“야호~!! 최고의 플레이였어!!”
기자들이 떠나가자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프랭크 토마스를 에워쌌다.
타석에서 2안타 여기에 헤인스를 부상 입힌 더티 플레이까지, 너는 세계 최고의 악당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야, 너는 표정이 왜 그래?”
“너도 우리랑 한 배를 탄 거야. 더럽네 뭐니 하지 마라.”
반면 이인영은 뚱한 표정을 유지했다.
LA의 2루수 맥퀸에게 패자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뭔가 꺼림칙한 승리, 헤인스를 부상 입히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악당들과 한 배를 탄 것도 사실, 기왕 이렇게 된 거 완벽한 쓰레기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