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MVP (10)
“자, 필라델피아의 맹공은 계속됩니다.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는군요. 오늘 공격에서는 홈런, 앞선 이닝에서는 수비로 팀의 위기를 막아내는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역시 팀이 필요할 때 뭔가 해줄 수 있는 선수죠. 여기서 쐐기를 박는 게 좋습니다.”
마운드 위의 조셉 케레케스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브런들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은 죄인, 하지만 지금 LA는 투수를 교체할 수가 없다.
선발 킨사이드가 조기 붕괴되면서 벌써 다섯 명의 불펜을 소모한 LA, 1차전에서도 불펜 소모가 극심한 탓에 더는 방법이 없다. 케레케스가 이 위기를 넘겨야 하는 입장, 댄 말론 감독도 손을 놔버렸다.
“우우~ 우~ ”
2구 연속 볼에 홈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케레케스는 얼핏 보면 파이팅이 넘치는 인상이지만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한 편, 심지어 팀이 득점에 성공해도 별 다른 반응이 없다.
이런 성격 때문에 가끔 팀 동료들에게 무슨 불만 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냥 말이 없을 뿐, 동료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넘기고 있지만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선 그냥 답답할 뿐이다.
투지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선수, 스트라이크를 던질 용기가 없으면 마운드에서 내려오라는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었다.
"FXXX!!"
3구도 볼이 되자 케레케스는 주심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퇴장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깜짝 놀란 댄 말론 감독은 더그아웃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평소 조용한 선수가 이런 돌발행동을 하다니, 어쨌든 보호 마스크를 벗은 주심도 투수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행히 별 일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 자세를 잡은 케레케스는 포수 사인을 주고 받다 다시 발을 풀었다.
“장난 하냐?!! 던지기 싫으면 내려가!!”
이번엔 이인영이 폭발했다.
주심과 눈싸움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더니 또 발 풀고 시간 끌기, 주심도 케레케스가 12초 룰을 어겼다며 1루를 가리켰다.
“입 다물고 그냥 1루로 가라고!!”
“가고 있잖아 XX아!! 네가 XX 짓 한 덕분에 말이지!!”
이인영은 1루로 걸어 나가면서도 케레케스와 말싸움을 주고받았다.
당장이라도 한 판 붙을 분위기, 하지만 사방에서 몰려온 양 팀 선수들이 장벽을 치면서 몸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결국 이날 경기는 6대 3 필라델피아의 승리로 종료,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LA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신 겁니까?”
“그런 말은 심판한테 눈알 부라린 그 자식한테 하세요.”
이인영은 나는 잘못 없다는 반응을 내놨다.
투수도 공을 던지기 전에 집중하겠지만, 타자도 나름 고충이 많다. 그런 식으로 계속 타이밍을 끊으면 타자 입장에선 짜증, 그리도 목소리도 별로 안 큰 자식이 욕을 해봤자 무섭지 않다는 조롱을 날렸다.
“그 자식 목소리를 듣고 주심이 위협을 느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리 지르는 연습 좀 해야 되겠더군요.”
“연습이라고요?”
“네, 우리는 언제나 클럽하우스에서 소리 지르는 훈련을 하죠. 상대 투수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죠.”
실제로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오늘 경기 내내 더그아웃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 따위로 던져서 이길 수 있겠냐, 내가 던져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이렇게 계속 투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LA 선수들은 한 게 별로 없다. 그저 팀 동료의 활약을 응원했을 뿐, 필라델피아 선수단을 자극하지 못했고 오히려 말려들었다.
"LA는 우리가 꼴 보기 싫겠죠. 예의를 차려야 하는 그라운드에서 슬라이딩 세리머니를 하고 조롱을 퍼부었으니까요. 하지만 LA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패배지 우리의 조롱이 아닙니다. 패배했기 때문에 조롱을 당하는 거죠. 분하면 이겨 보라고 하세요. 아? 최근 우리가 14승 6패로 앞 서 있죠? 무리겠네요.”
마지막까지 조롱의 연속,
이런 태도를 비난하는 팬들도 많았지만 LA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너무 얌전한 LA 팬덤, 이 동네는 팀이 이기든 지든 허허 웃는 중립 팬들이 많다. 덕분에 구장은 언제나 평화로운 분위기 10년 연속 평균 관중 TOP 3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우승을 향한 집착이 부족하다.
LA가 40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이 없는 게 그런 분위기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기고 싶다면 악독해지라는 악마의 속삭임, 그렇게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20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가까워진 필라델피아는 열광의 도가니, 경기 시작 2시간을 앞두고 TNT 파크 일대는 팬들의 환호로 들끓었다.
“FXXX!! LA!! FXXX!! LA!!"
"더 크게 외쳐!! 그 촌놈들이 들을 수 있도록!!“
어떤 무리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을 위한 샤우팅에 열을 올렸다.
이인영의 말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선수들도 가끔 이런 훈련을 한다고 하지 않나. 선수가 한다면 우리도 해야겠지, 하지만 필라델피아 클럽 하우스 분위기는 조용했다.
“얼른 뽑아.”
“가만히 있어 봐.”
선수들은 간단한 카드 게임으로 긴장감을 풀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은 도둑잡기,
평소엔 원 카드를 많이 하지만 심리게임이 필요한 도둑잡기는 실전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의외로 도움이 된다.
카드를 하나 씩 보여주고 버리다보면 누가 조커를 쥐고 있는지 감이 오는 게임, 오늘은 뒤로 빠진 이인영은 동료들의 게임을 지켜봤다.
‘저 자식이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이인영은 산체스와 브런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둘 중 하나는 조커와 카드 한 장만 들고 있다. 만약 상대가 정상적인 카드를 뽑아버리면 무조건 패배, 모든 카드를 공개한 선수들은 치열한 눈치게임에 흥미를 보였다.
‘이거 뽑아. 이거’
브런들은 조커를 잡은 손을 약간 느슨하게 풀었다.
이걸 반드시 뽑아줘야 내가 이기는 상황, 하지만 매번 볼 배합을 바꾸며 타자와 눈치 싸움을 벌이는 산체스는 반대편 카드를 뽑았다.
“야, 그걸 느슨하게 잡냐?”
“내가 그랬어?”
“그래, 우리는 다 보였어.”
다들 심한 말은 안 하는 분위기, 하지만 잠자코 있던 이인영이 거한 한 방을 날렸다.
“이 등신아. 그냥 가만히 있지 왜 무덤을 파냐?”
속이 뻥 뚫리는 욕설, 동료들이 낄낄거리자 브런들은 쥐고 있던 카드 한 장을 소심하게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내 행동이 그렇게 티가 나?”
“그래, 널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여.”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같아? 그럼 내기하자.”
이인영은 천 달러 거금을 걸고 내기를 신청했다.
네가 타석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공에 스윙을 하는지 맞춰보겠다는 것, 브런들은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였다.
“사실대로 말 해줘요. 괜히 웃기겠다고 나 속이지 말고”
“알았네 알았어.”
와이즈 감독은 브런들의 투정을 웃어 넘겼다.
선수들이 서로 내기를 하는 건 늘 있는 일, 2연승 했다고 다들 긴장감이 떨어진 것 아닌가.
약간 걱정은 됐지만 팀 분위기가 그만큼 좋다는 뜻이겠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포스트 시즌 3차전, 지치지도 않는지 오전 내내 소리를 질러댄 홈팬들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 죽어버려!!”
“너희들은 존재감 없는 유령이야!!”
“오늘 전원 삼진 당하면 존재감이 조금은 뚜렷해질지도 모르지!! 삼진 당하라고!! 안타도 못 치는 너희들에게 플라이 아웃은 존재감을 떨어트릴 뿐이니까!!”
역시 적응이 안 되는 악마의 소굴,
2패로 뒤져 있는 LA 선수단은 심리적으로 몰려 있었고, 사소한 야유에도 흔들렸다.
삼자범퇴로 시작하는 LA의 공격, 필라델피아의 공세가 시작됐다.
“자, 1회 말 필라델피아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프랭크 토마스, 이번 시리즈에서 3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시 빌라 선수가 아직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2루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햄스트링에 또 무리가 올 수 있습니다. 체력 관리를 해줘야겠죠.”
토마스는 2구를 잡아당겨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오늘도 기분 좋게 출발하는 공격, 2차전의 영웅 세스 브런들의 등장에 관중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 혹시 바보 연기하는 거냐?’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친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타자가 타석에서 하는 행동은 모두 빠른 볼을 치기 위한 동작이다. 변화구 대처 능력은 긴급 상황에서 발동되는 능력일 뿐, 변화구에 삼진을 당하는 건 빠른 볼을 못 쳤기 때문이다.
지금 브런들은 무슨 공을 노리고 있을까.
답은 당연히 빠른 볼, 그런데 브런들은 내가 타석에서 무슨 공을 노리고 있는지 맞춰보라며 내기에 응했으니, 저 바보를 어찌 해야 하나.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위해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일단 감독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자식 빠른 볼에 타격할 거예요.”
“뭐 다 아는 사실을… ”
“그런데 저 자식은 그걸 몰라요. 그러니까 제가 돌겠다니까요.”
카드 게임에서도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낸 녀석, 타석에서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딱~!!]
“파울입니다. 지금은 조금 빨랐네요.”
“브런들 선수가 테이크 백 동작이 조금 큰 편이죠. 국내에선 이런 동작이 배트 스피드를 느리게 한다고 지적하는데, 그런 통념은 잘못된 겁니다. 지금도 93마일인데 따라가잖아요. 처음부터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아 놓고 스윙을 하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지만 브런들 선수의 각성이 늦은 것도 이런 타격 접근법에 있다고 봅니다. 테이크 백이 큰 만큼 스윙 스타트를 빨리 해야 되는데, 이때 변화구가 들어오면 공략 하기가 어렵죠. 그래도 필라델피아가 6년 동안 꾸준히 출장기회를 준 덕분에 변화구 대처 능력이 향상됐다고 봐야겠습니다.”
“위대한 타자는 단 시간에 만들어지기 어려운 거죠. 늦게라도 꽃을 피워서 다행입니다.”
브런들은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지만 무릎을 굽혀 떨어지는 변화구를 걷어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보기 어려웠던 광경, 투 스트라이크 이후 대응 능력이 몰라볼 정도로 향상됐다.
‘나 1억 달러 받을 수 있겠지?’
1루를 밟은 브런들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로 6년 차가 됐으니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는다. 딱 맞춰서 폭발한 성적, 얼마 전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도 해야 하고 나도 이젠 대접 받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인영은 그 속마음을 꿰뚫었다.
“저 자식 지금 FA 계약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가?”
“네, 말해주세요. 내기는 제가 이겼다고”
한편,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이인영은 감독에게 한 소리 던지고 타석으로 향했다.
결과는 우측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안타, 스타트를 끊은 주자들은 단숨에 홈으로 파고들었고, 2루에 안착한 이인영은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자네, 혹시 1루에서 FA 계약 생각했나?”
“네?!!”
한편,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던 브런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뒷배경을 듣고 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저 자식이 야구를 잘 하는 건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 덕분이 아닌지,
소설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지만 이 쯤 되면 정말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