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MVP (9)
[딱~!!]
“우측!! 멀리 가는 타구!! 아… 우익수가 잡아내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마음먹고 돌려 본 것 같은데, 결과는 플라이였습니다.”
“축제에는 불꽃이 필요한데, 이인영 선수가 바통을 잇지 못하네요.”
“하하~ 그런 겁니까?”
“그렇죠. 뻔하다고 해도 축제에 불꽃놀이가 빠지면 섭섭한 법이죠. 야구의 꽃은 누가 뭐래도 홈런입니다. 특히 이런 축제에선 홈런이 더 빛을 발하는 법이죠.”
“브런들 선수가 홈런을 치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고 싶은 건 이인영 선수의 홈런입니다. 몇 번을 봐도 안 질려요.”
중계석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인영은 타구가 날아간 방향을 한 번 쳐다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38홈런, 포스트 시즌에서 홈런 2개를 때렸지만 이 정도에 만족할 선수는 없다.
마음 같아선 시즌 전타석에서 홈런을 치고 싶지만 그렇게 애를 써도 한 시즌에 담장을 넘기는 타구는 몇 개 안 된다.
열 번 간절해도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야구의 꽃, 다른 선수들도 호쾌한 스윙을 이어갔다.
‘삼진 당해도 돌린다.’
선두 타자 크리스 스나이더는 초구부터 큰 스윙을 했다.
LA는 3년 전만 해도 20홈런 타자만 7명을 배출할 정도로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그 해 기록한 홈런은 무려 242개, 스나이더도 홈런 28개를 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점 점 줄어든 팀 홈런은 올 시즌 157개로 급감했다.
단축 시즌이라는 걸 고려해도 너무 급격한 추락, 댄 말론 감독이 1차전 패배의 원인을 공격력 부진으로 꼽은 건 우연이 아니다.
올 시즌 타율 0.252, 홈런 13개에 그친 스나이더, LA 지역여론과 팬들은 이제 스나이더를 퇴물 취급하고 있다.
댄 말론 감독도 디비전 시리즈 엔트리에서 스나이더를 제외시켰지만, 이 선수마저 없으면 공격이 돌아가질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1차전에 호쾌한 스윙으로 홈런을 날린 스나이더, 오늘 경기도 좋은 활약을 기대했다.
[딱~!!]
“다시 크게 돌리지만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이게 스나이더 선수의 한계죠. 게스 히팅을 하는데 그렇게 잘 하는 것도 아니라 삼진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스나이더는 3구 삼진으로 물러났다.
게스 히팅의 장점은 히팅 포인트를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와 장타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그 예상이 빗나갔을 때 어처구니없는 볼에 배트가 나갈 수 있다는 것, 정말 뛰어난 타자는 빠른 볼에 타이밍을 맞춰놓고 변화구를 때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선수는 상대 투수의 데이터를 철저히 분석하고 무슨 공이 올지 기다린다.
스트라이크가 들어와도 장님이 되는 이유, 스나이더는 자신의 한계를 명백히 드러냈다.
‘뭘 노릴까?’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초, 대기 타석에 선 이인영은 몸을 풀며 생각을 정리했다.
빠른 볼에 타이밍을 놓고 치는 스타일이지만 그렇다고 게스 히팅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칠거면 뭐 하러 매일 아침 일찍 나와 상대 투수를 분석하겠나. 일단 첫 타석처럼 빠른 볼에 포인트를 두고 곁가지를 치는 방식을 택했다.
“초구는 볼입니다. 지금은 92마일인데, 구속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 같죠?”
“제가 볼 때는 투구 폼도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 많은 투수들이 이렇게 몸의 중심을 낮춘 상태에서 발을 길게 뻗는 투구를 하거든요. 그런데 무릎을 너무 구부리다보면 도리어 힘을 상실 할 수 있습니다.”
이인호 위원은 투구 폼을 지적했다.
앞발을 길게 끌고 나와야 구위도 살고 공에 위력이 실린다는 건데,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는 거다.
다리는 앞으로 나가고 상체가 뒤에 머물면서 밸런스가 붕괴되는 게 그 예, 킨사이드는 한창 좋은 투구를 할 때 몸이 좀 더 앞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앞다리가 몸을 튼튼히 받쳐주면서 몸의 중심을 좀 더 앞으로 끌고 왔는데 지금은 다리만 앞으로 끌고 가는 폼, 구속은 둘 째 치고 공에 힘이 실리질 않았다.
[딱~!]
“이번에는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본인도 뭐가 문제인지 알고는 있는 것 같네요. 빠른 볼을 적극적으로 못 던지잖아요.”
“그런데 이게 프로라고 단 시간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은 얼마나 이 상황이 답답하겠습니까?”
댄 말론 감독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많은 불펜을 소모한 LA는 킨사이드가 최대한 많은 이닝을 소화해줘야 한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에이스, 반면 이인영은 강력한 한방을 날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한 대 툭 치면 넘어갈 것 같이 위태로운 킨사이드, 히팅 포인트를 최대한 앞에 잡고 기다렸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걸렸고!! 쭉쭉 뻗어 나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밝힙니다!! 이인영 선수의 솔로 홈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홈런을 추가합니다!! 스코어 2대 1!! 필라델피아가 다시 앞서나갑니다!!”
“지금은 그물망을 치고 기다렸네요. 빠른 볼에 벼락같이 튀어나오잖아요. 안 걸리는 게 이상한 거죠.”
킨사이드의 붕괴에 LA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벌써 5번 째 피홈런, 하지만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는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후속 타자 산체스의 징검다리 홈런이 나오면서 스코어는 3대 1, 킨사이드의 얼굴엔 체념한 미소가 번졌다.
‘더는 안 되겠군.’
댄 말론 감독은 급히 마운드로 향했다.
킨사이드는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문제는 자포자기하면서 스스로 붕괴하고 있다는 것, 빠른 볼이 안 통하면 계속 던져보면서 감을 잡아야 되는데 변화구를 던지다 카운트가 불리해지면 그제야 빠른 볼을 밀어 넣는다.
아무 의미가 없는 볼 배합, 이런 형편없는 투구는 필라델피아 타선에게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자네가 할 일이 있잖아!! 그까짓 홈런 맞아도 돼!! 자네답게 행동하라고!!”
감독의 충고에 킨사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정규시즌에서도 210이닝 동안 홈런 24개를 맞았지만 포스트 시즌은 1이닝에 홈런 1개를 헌납하는 수준, 빠른 볼이 배팅 볼이 되면서 자신감을 상실해 버렸다.
정규시즌이라면 빠른 볼을 밀어 넣으며 감을 잡았겠지만, 지금은 공 하나에 팀 운명이 걸린 포스트 시즌,
나 때문에 지고 있다는 부담감이 멘탈 붕괴로 이어지면서 에이스의 품격마저 잃어버렸다.
‘이 친구는 틀렸어.’
댄 말론 감독은 불펜에 사인을 보냈다.
더는 지켜볼 수가 없는 수준, 더그아웃으로 물러난 일그러진 영웅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규 시즌 15승 6패,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한 에이스의 눈물, 주위에 있는 동료들은 위로를 건넸지만 킨사이드의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불펜이 뒷수습을 잘 해주면서 3회 초는 마무리, LA는 3회 말 반격에 나섰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타석에 들어선 마이클 헤인스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올 시즌 어떤 투수보다 훌륭한 투구를 펼친 킨사이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홈팬들의 야유를 틀어막았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좌측으로 높게!! 담장 위로 사라집니다!! 마이클 헤인스의 솔로 홈런!! LA가 한 점을 따라 붙습니다!! 오늘 양 팀 모두 홈런으로 득점을 내고 있군요!!”
“3회도 안 끝났는데 벌써 홈런 5개거든요. 이런 경기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잔루 없이 호쾌한 한 방으로 득점을 내는 양 팀, 하지만 불꽃놀이는 중반 들어 잠잠해 졌다.
LA는 철벽 불펜을 앞세워 필라델피아의 맹공을 봉쇄, 필라델피아도 5회부터 투입된 로버트 크리머가 삼진 쇼를 펼치며 LA 타선을 잠재웠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7회 말 LA의 공격, 투수 타석에 대타로 투입된 벤 맥브라이드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LA는 기회를 잡았다.
타석에는 오늘 삼진만 3개를 적립한 크리스 스나이더, 어제와 달리 혈압 올리는 짓만 반복하고 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팬들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따악~!!]
“좌중간으로 멀리 가는 타구!! 좌익수가 몸을 날리지만 잡지 못합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내친 김에 홈까지 내달립니다!! 득점!! 스나이더 선수가 어제 동점 홈런에 이어서 오늘도!! 동점타를 날립니다!! 스코어 3대 3 동점!! 여기에 무사 주자 3루 기회도 계속됩니다!!”
“시즌 내내 미운오리 새끼 취급받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해주네요. 이러면 경기 재미있어지죠.”
3루에 안착한 스나이더는 동료들을 향해 어퍼컷 세리머니를 날렸다.
역시 배트에 걸리면 장타, 스나이더를 엔트리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은 댄 말론 감독은 가슴을 치며 포효했다.
여기에 후속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무사 주자 1 - 3루, 홈 팬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마이클 헤인스를 향해 MVP를 연호했다.
‘MVP 찬스는 다음 기회에 이용하시길’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헤인스를 걸렀다.
지금은 병살을 노려야 하는 상황, 우타자 헤인스를 거르고 좌타자 지미 가르시아를 택했다. 우측으로 지우친 시프트, 가르시아는 이를 비웃듯 우측으로 큰 타구를 날렸다.
중견수 잉글리시아와 우익수 이인영이 동시에 달려들었고, 장타를 직감한 3루 주자 스나이더는 스타트를 끊었다.
“와아아아아~!!”
“언빌리버블!!”
환호성이 터져나온 건 필라델피아 원정팬이 몰려있는 3루 관중석 쪽,
잉글리시아가 옆으로 빠져주자 이인영은 몸을 날려 타구를 캐치, 깜짝 놀란 스나이더는 3루로 귀환했다.
그 사이 2루수 프랭크 토마스가 송구를 받아 주자들을 견제, 결국 LA는 한 점도 내지 못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슈퍼 캐치, 오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었던 지미 가르시아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건 댄 말론 감독도 마찬가지, 상대 감독이 아쉬움을 삼키는 동안 세스 브런들은 슬라이딩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미끄러지듯 공을 잡아낸 이인영의 슈퍼 플레이를 재현한 것, 얼마나 기뻤으면 저랬을까.
하지만 보수적인 팬들은 이런 행동을 굉장한 무례로 받아들였다.
다음 타석에서 빈볼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도발, 와이즈 감독은 브런들을 저지했다.
“여기가 무슨 축구장이야?!!”
누가 보면 골 넣고 세리머니 하는 줄 착각할 정도, 어쨌든 후속타자가 범타로 물러나며 LA의 역전은 다음 기회로 미뤄졌고, 필라델피아는 8회 초 잉글리시아의 적시타로 다시 경기를 뒤집었다.
여기에 조시 빌라의 안타가 나오면서 계속되는 기회, 1사 주자 1루에서 세스 브런들이 타석에 들어섰다.
LA 입장에선 당장 빈볼을 날리고 싶지만 지금은 팀의 승패가 더 중요, 바뀐 투수 크리스 패튼은 바깥쪽 빠른 볼을 던졌다.
[따악~!!]
“밀어낸 타구가!!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계속 굴러가는 타구!!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홈까지 파고듭니다!! 다시 한 점 추가!! 오늘 경기의 영웅은 세스 브런들입니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야구 잘 하네요. 다만, 세리머니는 좀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얼굴 붉힐 일 벌어지면 안 되죠.”
하지만 브런들은 아군 진영을 향해 기관총 세리머니를 퍼부었다.
총에 맞고 쓰러져 나가는 필라델피아 선수들, 이인영도 이번에는 어울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