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일은 일인자-183화 (183/309)

183화. MVP (8)

‘그러고 보니 아직 6회였지?’

1루를 돌던 이인영은 전광판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역전홈런을 쳤지만 경기는 이제 6회 초, 불펜 싸움이 길어지면 어느 쪽이 유리한지 명확하지 않나.

끝내기 홈런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우쭐거리진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약간 불안한 미래가 보였거든.”

이인영은 프랭크 토마스의 물음에 속마음을 털어놨다.

불펜과 전화를 주고받는 코치를 보아 하니 다음 이닝에 투수가 교체될 분위기, 이렇게 팽팽한 경기에서 와이즈 감독이 애용하는 선수가 있다.

로버트 크리머가 그 주인공, 크리머는 7월 10일까지 28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6.69라는 끔찍한 기록을 달성했다.

이 와중에도 삼진은 9이닝 당 10.22개를 잡았는데, 7월 말부터 영점이 잡히더니 후반기에 부활하면서 평균자책점 4.56으로 시즌을 마쳤다.

52이닝을 던지면서 삼진을 66개나 잡아낼 정도로 구위는 정말 좋은 선수, 다만 안 좋을 때는 팀의 재앙으로 돌변한다.

지난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서도 1이닝 동안 삼진 3개 - 볼넷 2개, 무실점이라는 아찔한 묘기를 보여줬는데 오늘은 어떨지, 솔직히 못미더웠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필라델피아의 6회 초 공격은 종료, 예상대로 로버트 크리머가 마운드에 올랐다.

따악~!!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크리머는 다음 타자를 삼진 처리했지만 폭투를 던져 1사 주자 2루 위기에 몰렸다.

다음 타자 크리스 스나이더가 볼넷으로 출루 그리고 폭투로 추가 진루, 후속 타자 마이클 헤인스가 볼넷으로 출루하며 1사 주자 만루에 몰렸다.

아웃 카운트 하나 잡는 동안 볼넷 3개 폭투 2개, 이러고도 아직 무실점, 살얼음판을 걷는 투구는 필라델피아 극성팬의 입마저 틀어막았다.

“이번에도 바운드 볼!! 산체스가 막아냅니다.”

“지금 산체스 선수의 표정을 보세요. 이 한 장면이 필라델피아 팬들의 심기를 대변하고 있네요.”

산체스는 돌아서는 로버트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봤다.

가끔 흔들릴 수는 있는데 블로킹이 안 될 정도로 엉망인 제구,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았다.

2구는 101마일 빠른 볼, 헛스윙을 확인한 야수들은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을 풀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때문에 와이즈 감독도 노심초사, 하지만 로버트는 바깥쪽 꽉 차는 101마일 포심으로 회답했다(루킹 삼진).

그리고 다음 타자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며 이닝 종료, 홈런을 치고도 웃지 않던 이인영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불길한 미래가 지나갔잖아.”

주위에 있는 선수들은 피식 웃고 말았다.

대놓고 동료를 폭탄 취급하다니, 그냥 넘어갈 로버트가 아니었다.

“넌 내가 마운드에 오르는 게 그렇게 불안하냐?”

“어, 양심 있으면 다음 이닝은 기권해라.”

하지만 와이즈 감독은 다음 이닝에도 로버트를 내보냈다.

초반에 살짝 흔들렸지만 제구가 잡힌 느낌, 로버트는 평균 100마일에 이르는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7회는 말끔하게 막아냈다.

그 사이 필라델피아 타선은 8회 초 공격에서 산체스의 희생타로 추가점을 냈고, 이게 결승 득점이 됐다.

LA는 9회 말 1점을 추가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 홈에서 1차전을 내주는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피해갈 수 없는 기자들의 질책, 댄 말론 감독은 쏟아지는 질문에 덤덤한 표정으로 응했다.

“1회만 제외하면 그렇게 나쁜 경기는 아니었습니다. 스나이더가 따라붙는 홈런을 치고 동점타가 나왔을 때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죠.”

“불펜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6회 말에 역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1사 주자 만루였죠. 하지만 한 점도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타선입니다.”

불펜 호세 라미레스를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스나이더를 올린 건 문제가 없다는 발언, 댄 말론 감독은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스나이더는 오늘 홈런 포함 2번이나 1루를 밟으며 제 몫을 했고, 불펜진도 본인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택했다.

그런데 그게 통타를 당했다는 게 문제, 결과론만 따지면 어느 팀이 우승을 못하겠나.

아무리 좋은 작전을 세워도 예상을 빗나가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 잘 준비해서 2차전은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감독님, 1차전 승리 축하드립니다.”

“예, 감사합니다.”

반면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승장이 된 와이즈 감독은 한껏 들뜬 얼굴로 질문을 받았다.

“오늘 경기의 승패는 언제 갈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로버트가 1사 만루 위기를 넘겼을 때입니다. 그는 제가 지금까지 본 투수 중 누구보다 위력적인 공을 던지죠. 물론, 가끔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건 어느 투수든 마찬가지입니다.”

와이즈 감독은 로버트를 감싸고돌았다.

솔직히 불안한 면도 있지만 감독이 선수를 믿지 않으면 어쩌겠나.

후반기부터 불펜의 에이스로 등극한 로버트, 제구 불안은 여전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내보낼 거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드러냈다.

“로버트가 올라와도 안심할 수 있도록 많은 점수를 내겠습니다.”

하지만 이인영은 감독과 다른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로버트가 가끔 흔들린다니, 양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솔직담백한 말에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로버트가 서운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넌 못 믿겠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산체스의 눈빛 보셨습니까? 당장이라도 마운드로 달려가 주먹을 날릴 기세였죠. 제가 포수였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포수 입장에선 정말 욕 나오는 제구,

이인영은 본인이 역전 홈런을 쳤을 때보다 위기를 무실점으로 탈출한 로버트의 투구에 더 기뻐했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이것도 다 잘 해보자고 하는 말, 같은 팀이라고 좋은 말만 해주면 선수가 자극을 받겠나.

나는 빈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솔직히 저는 9회 말에 역전 홈런을 치고 영웅이 되는 것보다 팀이 10대 0으로 앞선 상황에서 홈런을 치는 게 더 좋습니다. 혼자서 영웅이 되는 건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이죠. 하지만 팀이 10대 0으로 이기면 선수단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되길 바랍니다.”

자신감과 겸손함이 교묘히 섞인 소감,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친 영웅은 호텔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다음 날, 이인영은 자신의 열혈 팬과 얼굴을 마주했다.

어제 만남을 시도했다가 씁쓸히 발걸음을 돌렸다는 은사, 구단 관계자에게 이번은 막지 말라고 말했고, 그렇게 만남이 성사됐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냐?”

“성공했잖아요. 성공한 사람은 원래 이런 저런 사정이 있는 거예요.”

박한우 위원은 간만에 마주한 제자와 악수를 나눴다.

한국에서도 대단한 스타였는데 이제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린 녀석, 오늘도 이기고 얼른 월드시리즈로 가라는 덕담을 건넸다.

“글쎄요.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왜 약한 소리를 하냐?”

“저도 가끔은 진다고요. 아니, 냉정히 말하면 지는 날이 더 많죠.”

타자가 아무리 잘 쳐봤자 3할 5푼을 넘기기 어렵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은 셈, 그런데 팀은 승리를 거두며 여기까지 왔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선수단 모두가 영웅이 돼야 올라갈 수 있는 월드시리즈 무대, 올 시즌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위대한 선수보다 위대한 팀의 일원이 되길 바랐다.

“플레이 볼!!”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후 5시 47분,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오늘 LA의 선발은 존 킨사이드, 발등에 불이 떨어진 LA는 예정보다 하루 빨리 에이스를 등판시켰다.

최근 피홈런이 부쩍 늘어났는데 무리를 시켜도 되는 건지, 현지 여론이 부정적인 반응을 내놨지만 LA의 현실은 그만큼 다급했다.

“자, 조시 빌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어제 경기에서는 4타수 1안타, 그 1안타는 팀에 리드를 안기는 솔로 홈런이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어제 인터뷰에서 이번 시리즈는 선수단 모두가 영웅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저한테 그 말을 했거든요. 동료들에게도 자극이 됐을 겁니다.”

조시 빌라는 차분하게 초구를 골라냈다.

통산 킨사이드를 상대로 별 재미를 못 봤지만 모두가 제 역할을 해야 이길 수 있는 게임,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했다.

따악~!!

“아!!”

잘 쳤지만 유격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하면서 아웃,

올 시즌 전력질주를 하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지만 조시 빌라는 1루를 밟을 때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승리를 원하는 선수들, 와이즈 감독은 조시 빌라의 투혼에 박수를 보냈다.

“2구는 볼, 브런들 선수가 차분하게 볼을 보고 있습니다.”

“브런들 선수도 뭔가 바뀌었어요. 이 선수가 올 시즌 볼넷이 34개 밖에 없는데 역시 집중력이 올라와 있어요.”

초구성애자 브런들마저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 유인구 위주의 투구를 하던 LA 배터리는 예상보다 빨리 승부를 걸었다.

따아악~!!

하지만 이 공은 배트에 걸렸고 좌중간 펜스를 넘어갔다.

마운드에 오른 선발 투수 7명이 모두 홈런을 맞은 LA, 지난 경기에서도 피 홈런 때문에 눈물을 삼킨 킨사이드는 글러브에 얼굴을 쳐 박고 욕을 퍼부었다.

뭐 하나 되는 게 없는 포스트 시즌, 킨사이드가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는 사이 세스 브런들은 타석에 들어서는 친구와 손뼉을 마주쳤다.

“Now it's your turn to be a hero.”

= 이제는 네가 영웅이 될 차례야.”

이인영은 친구의 립 서비스를 모른 척 넘겼다.

노력은 하겠지만 못 치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초구는 보내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딱~!]

“음, 파울이군요.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역시 계속 변화구 승부죠. 어제도 필드 선수가 빠른 볼 승부를 하다 홈런을 맞았기 때문에 킨사이드 선수라도 함부로 들어가진 못할 겁니다.”

3구도 배트에 걸리면서 파울,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든 킨사이드는 빠른 볼 사인을 냈다.

하지만 구위가 떨어져 있는 에이스, 킨사이드는 올 시즌 정규이닝에서 210이닝을 던졌다.

한 달이나 개막이 미뤄졌는데 210이닝을 넘겼으니, 막판에 체력 관리를 해줬지만 이미 너무 많은 공을 던졌다.

평균 94마일까지 나오던 구속은 지금 92.8마일까지 하락, 포수 마스크를 쓴 래리 포터는 약간 빠지는 곳으로 빠른 볼을 유도했다.

딱~!!

또 파울, 킨사이드는 공을 양손으로 문지르며 마음속으로 불만을 쏟아냈다.

‘넌 정말 X 같은 자식이야.’

속도에 변화를 줘도 볼 배합을 바꿔도 다 반응을 하는 자식,

킨사이드는 이인영과 통산 20타석 맞붙었다. 상대전적 17타수 9안타, 출루율 0.600에 장타율은 0.752, 심지어 삼진은 한 개도 잡아내지 못했다.

내가 특정 선수에게 이렇게까지 고전했던 적이 있었나.

컨디션이 최고조였을 때도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구위마저 떨어진 상황, 정신을 차려보니 도망치는 투구를 하고 있었다.

팀의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에이스답지 않은 행보, 킨사이드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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