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MVP (7)
[LA, 40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한다.]
10월 1일,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대진표가 결정됐다.
최근 14년 동안 8번이나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한 LA, 하지만 월드시리즈 진출은 2번뿐이고 우승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LA의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 같은 기사를 도대체 몇 번이나 보고 있는 건가. LA 팬들은 제발 이번만은 우승하자며 두 손을 모았지만 이에 맞서는 필라델피아 여론은 조롱으로 대응했다.
[너희는 올해도 안 될 거야]
[선발 3인방 다 소모했고, 그랜트도 부상이잖아?]
LA는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고 챔피언십 시리즈에 올랐다.
에이스 킨사이드가 6회까지 버텨줬지만 4실점을 하며 무너졌고, 2 - 3차전에 등판한 어서리와 핸들리도 각각 4이닝 3실점, 5이닝 3실점을 하며 인상적인 투구를 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타선의 핵심 중 하나인 로 그랜트가 등 부상으로 이탈, 선발진의 부진에 부상자까지 겹치면서 LA는 만신창이가 됐다.
최고 승률을 기록한 덕분에 홈 쿼터 어드밴티지를 가져가지만 이런 선수단을 이끌고 필라델피아를 넘어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필라델피아의 우위에 힘을 실었다.
“LA는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리더만이 5차전에서 2이닝 동안 45구를 던진 것만 봐도, LA 투수진이 시리즈 내내 부진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리더만이 1차전에 등판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죠. LA는 든든한 클로저를 잃고 1차전을 치르게 되는 겁니다. 초반에 점수가 벌어지면 경기가 쉽게 끝날 수도 있겠네요.”
LA 입장에선 뭐 하나 긍정적인 전망이 없는 1차전, 하지만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차분하게 챔피언십 1차전을 준비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
라커룸을 나서기 전, 이인영은 캡 안에 적어둔 글자를 잠시 지켜봤다.
하고 싶은 걸 한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생각을 정리하고 캡을 뒤집어썼다.
* *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LA와 필라델피아의 NLCS 1차전에 열리는 머린스 파크입니다. 저는 캐스터 이명한, 해설에는 박한우 - 이인호 위원께서 도움을 주시겠습니다. 박한우 위원님”
“예”
“오늘 경기 전에 필라델피아 클럽하우스를 방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인영 선수와 만나신겁니까?”
“그게 … 만나진 못했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워낙 거물이 돼서 그런지 만나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필라델피아 구단은 외부인의 클럽하우스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큰 경기를 앞두고 있는 양아들에게 응원이라도 해주자는 좋은 의도로 방문을 신청했건만 생각보다 완강했던 구단 관계자, 나는 한국에서 날아온 해설위원이고, 이인영 선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설명해도 받아주질 않았다.
이젠 메이저리거이자 필라델피아의 주축 선수가 된 양아들, 이러다 나 따윈 아는 척도 안 하는 게 아닌가.
박한우 위원의 푸념 덕분에 중계석은 떠들썩해졌다.
“이인영 선수가 앞으로도 아는 척 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면 너무 서운합니다.”
“하하 ~ 그럼 경기 끝나고 다시 한 번 가 보시죠?”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사이, 양 팀 선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적지만 3루석을 점거한 붉은 물결, 필라델피아 원정 응원단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 시즌 MVP는 누구일까?!!”
“적어도 헤인스는 아니지!! 주제를 알라고!!”
진상 팬들은 LA의 주축 선수 마이클 헤인스를 저격했다.
올 시즌 헤인스는 타율 0.303 - 38홈런 - 101타점을 올렸지만 이인영과 빗댈 수준은 아니다. 주제를 알라는 야유에 LA 팬들은 격하게 반응했지만, 그런다고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조시 빌라, 올 시즌 43경기 출장, 타율 0.313 - 홈런 7개 - 1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빌라 선수가 시즌 말미에 햄스트링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필라델피아 타선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거든요. 지난 디비즌 시리즈에서도 12타수 4안타, 좋은 활약을 했고 팬들의 기대가 큽니다.”
조시 빌라는 LA의 선발 조시 카펜터의 3구를 잡아당겼다.
좌중간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 이렇게 LA는 포스트 시즌에서 선발로 나선 투수 6명이 모두 홈런을 얻어맞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렇게까지 투수운용이 안 풀릴 수 있나. 댄 말론 감독은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다 다음 타자 세스 브런들이 안타를 치며 무사 주자 1루, 보고 싶지 않았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자, 이인영 선수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챔피언십시리즈 무대를 밟는 첫 번째 한국인 야수가 되는 군요.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이름을 드높인 선수입니다.”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성공했다고 옛 정을 잊어버리면 안 되죠.”
“하하 ~ 이인영 선수가 만나기 싫다고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와중에도 농담이 오가는 한국 중계석, 하지만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상대 투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이 선수에게 빠른 볼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투수가 있을까.
빠른 볼의 도살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이인영, 올 시즌 빠른 볼 상태 타율이 0.414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찍었다.
특히 최근 51타석만 따져본다면 빠른 볼을 때렸을 때 타율이 0.477, LA 벤치도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
빠른 볼을 던져야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 볼 카운트가 불리해진 건 당연했다.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인영 선수는 변화구에 초점을 두고 있네요. 앞발이 처음부터 지면에 붙어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빠른 볼을 던져야 할 텐데 말이죠. 여기서 또 볼이면 거를 수밖에 없습니다.”
3구도 볼이 되자 LA 배터리는 볼넷을 택했다.
후속 타자 오스틴 카터도 장타력이 있는 선수지만 이인영에 비하면 상대하기 쉬운 편, 하지만 카터는 호쾌한 타구로 그 결정을 비웃었다.
따악 ~ !!
좌중간 펜스를 직접 때리는 장타, 타격이 되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브런들은 3루를 지나 홈까지 파고들었다.
그 뒤를 잇는 1루 주자, 1회부터 스코어가 3대 0으로 벌어지자 LA 팬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우리가 이대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하지만 내셔널리그 최강팀 LA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2회 말, 찰리 파머의 희생 플라이로 첫 득점을 올렸고 강판된 조시 카펜터의 뒤를 이은 헥터 클라렌스가 4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펼치며 따라갈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해 줬다.
그리고 4회 말 선두 타자 크리스 스나이더의 솔로 홈런이 터지며 스코어는 4대 2, 반면 1회에만 4점을 뽑아낸 필라델피아는 조시 카펜터가 내려간 이후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다.
‘그래, 역시 뺀 게 정답이었어.’
드디어 살아난 불펜, 댄 말론 감독은 이제는 해 볼만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론 감독은 챔피언십 시리즈를 앞두고 호세 라미레스를 엔트리에서 빼고 그 자리에 야수 크리스 스나이더를 올렸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방화를 저지르며 팀의 패배를 자초한 라미레스, 댄 말론 감독은 불펜진이 지친 상황에서도 투수 한 명을 줄이고 야수를 엔트리에 올려 여론의 비난을 샀다.
하지만 LA 불펜이 투수 한 명 빠졌다고 무너질 팀인가.
적어도 필라델피아보다는 훨씬 두터운 불펜 라인, 말론 감독은 공격만 해결되면 불펜도 살아날 거라 판단했다.
뒤지고 있지만 감독의 용병술이 모두 맞아 들어간 1차전, 자신감을 얻은 LA는 추격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었다.
[따아악 ~ !!]
“이 타구는 좌중간으로 높게!! 계속 날아가 원 바운드로 펜스를 때립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마이클 헤인스의 적시 2루타!! 스코어 4대 3!! LA가 턱 밑까지 추격해 옵니다!!”
“더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역시 와이즈 감독이 올라오네요.”
쫓기게 된 필라델피아는 불펜진을 가동했다.
하지만 동점타를 내주고 말았고, 양 팀은 4대 4 동점으로 클리닝타임을 맞이했다.
‘내가 상대를 너무 얕봤어.’
와이즈 감독은 후회를 곱씹었다.
LA에 비해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필라델피아, 선발이 흔들렸을 때 불펜을 투입해 막았어야 했는데 너무 늦고 말았다.
정규시즌과 달리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포스트 시즌, 감독 경력은 올해로 5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포스트 시즌을 처음 겪는 와이즈 감독은 위기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질 못했다.
거기다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LA의 불펜 진, 2회부터 5회까지 단 2명만 1루를 밟았다.
누군가 끊어진 공격 흐름을 연결해 줘야 할 텐데, 불안한 얼굴로 6회 초를 맞이했다.
‘불안하긴 한데 일단 가 보자.’
한편, 투수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댄 말론 감독은 5회에 올린 조시 필드를 6회에도 내보냈다.
조시 필드는 올 시즌 4승 3패, 평균자책점 3.28을 기록한 선수, 100마일이 넘는 구속을 앞세우지만 패스트볼 로케이션이 좋지 않고, 위기 상황에 몰리면 더욱 빠른 구속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타입이다.
하위타선을 상대할 땐 확실하게 막아주지만 그 반대는 약간 불안,
그래도 조시 필드는 5회 초, 대타 프랭크 토마스 - 조시 빌라 - 세스 브런들을 모두 범타로 돌려세우는 듬직한 모습을 보여줬다.
말론 감독은 괜찮다며 애써 부인하고 있지만 불펜 투수 한 명을 빼고 경기에 임하는 LA는 체력적으로 약간 불리한 입장, 여기서 또 투수를 교체하면 후반에 여파가 오지 않을까.
고심을 거듭하다 조시 필드를 한 번 더 믿어봤다.
“자, 이인영 선수가 세 번 째 타석을 맞이합니다. 오늘 첫 타석 볼넷, 두 번째 타석에서는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습니다.”
“올 시즌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선수 아닙니까. 이런 때일수록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야죠.”
조시 필드는 포수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봤자 의미도 없고 여기서 이인영을 꺾어야 선수단 사기도 오르겠지, 99마일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딱 ~ !]
“타격!! 파울입니다. 역시 빠른 볼은 위력이 있네요.”
“조시 필드 선수는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90% 이상이 빠른 볼과 슬라이더였습니다. 별명대로 황소처럼 돌진하고 있네요.”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으면 됩니다. 이인영 선수라면 공략 못할 투수가 아니에요.”
초구를 잡아냈지만 댄 말론 감독은 불안에 휩싸였다.
이인영은 구속을 끌어올린다고 잡아낼 수 있는 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투수를 바꿀 수는 없고, 포수에게 2구는 빼라는 사인을 보냈다.
‘내가 왜?’
하지만 자신감에 찬 필드는 승부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더 빠른 공을 던져서 눌러버리면 그만, 101마일 빠른 볼이 한 가운데로 밀려들어갔다.
[따아악 ~ !!]
“자!! 갑니다!! 가요!!”
“이 타구는!! 높게!! 멀리 날아!! 밤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역전 솔로 홈런!! 자신의 왜 MVP를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한 방입니다!!”
“역시 이런 단순한 투구로는 잡아낼 수 없는 선수에요. 너무 경솔했습니다.”
타격이 되는 순간, 말론 감독은 고개를 떨궜다.
설마 했던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도망치라는 사인을 무시한 필드보다 이런 전개를 예상하고도 막지 못했던 자신의 결단력을 책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