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MVP (6)
[실력은 1위 연봉은 91위]
시즌 종료를 앞두고 한국 여론에서 불만 섞인 기사가 나왔다.
올 시즌 MVP 수상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이인영, 그런데 한 기자가 연봉을 걸고 넘어졌다.
2년 전, 이인영은 필라델피아와 6년 5000만 달러 계약에 합의했다.
KBO 포스팅 역사를 다시 쓴 기록, 당시만 해도 대형계약이라는 말이 오갔지만 이제는 헐값 계약이라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계약 수정 필요할 듯]
필라델피아 현지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왔다.
올해 미국 나이로 26살 밖에 안 된 선수, 4년 후 FA 자격을 획득하면 7~ 8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맺을 수 있는 재목 아닌가.
6년 계약을 1연장하는 것도 방법, 하지만 당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인생 그렇게 치사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6년 5000만 달러가 적은 계약이라고요? 그래요.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필라델피아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구단은 없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지켜야 하는 겁니다. 돈이 적네 많네 따지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도장은 찍은 건 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계약규모를 들먹이며 수정을 요구한다? 계약이라는 개념을 이해 못 한 행동, 구단에서 수정을 요구한다면 모를까 이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건 옳지 않았다.
지금은 시즌에만 집중할 때, 연봉 논란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며 선을 그었다.
“고려하고 있다. 시즌이 끝나면 아마 결론이 나올 거다.”
반면, 필라델피아 구단은 계약서를 수정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1993년, 필라델피아는 계약서 수정 때문에 곤욕을 치른 역사가 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연봉이 500만 달러만 되도 최상위권을 기록했던 시대, 필라델피아는 주축 선수 루이스 맥고완과 8년 2500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그때는 나쁘지 않았던 계약, 하지만 1994년 파업을 기점으로 연봉은 크게 뛰기 시작했다.
1993년, 전체 연봉 43위를 기록했던 맥고완의 연봉은 3년 만에 전체 164위로 추락, 불만이 쌓인 맥고완은 계약서 수정을 요구했지만 구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고완은 이후 태업 플레이를 하며 구단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클리블랜드는 맥고완의 계약을 수정해줬고 맥고완은 1996년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맥고완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할 순 없지만, 주축 선수의 불만을 다독이지 못해 전력 누수를 초래한 필라델피아는 이후 긴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다시는 반복 되선 안 될 역사, 이인영은 도장 찍은 계약서에 불만 없다는 뜻을 밝혔지만 구단 입장에선 해결해야할 숙제로 다가왔다.
‘잘난 척 할 필요 없음’
이후에도 이인영은 별 말 없이 경기에만 집중했다.
내가 연봉 대비 뛰어난 활약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떠들 필요는 없는 법, 내가 잘 하면 남들이 다 알아준다.
남들에게 인정받았을 때 겸손하고 우직하게 노력해야 하는 법, 쓸데없는 잘난 척은 하지 않았다.
[이인영, 2년 연속 3할 6푼 타율 기록할까?]
[1954년 이후, 한 번도 없는 대기록]
그렇게 시즌은 흘러 필라델피아는 시리즈 최종전을 눈앞에 뒀다.
84승을 거두며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필라델피아, 이쯤에서 주축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고 기록을 관리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피터 와이즈 감독은 대기록을 앞둔 선수에게 휴식을 권했다.
“오늘 투수 누가 나오는데요?”
“빌 제임스야.”
“그럼 안 빠질래요.”
빌 제임스(신시내티)는 올 시즌 8승 8패, 평균자책점 3.33을 기록하고 있다.
신시내티에서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 이런 선수를 앞두고 도망쳐서 3할 6푼 타율을 유지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타율 쌓기 좋은 투수가 올라왔다면 미련 없이 빠졌겠지만, 오늘 경기는 치르기로 했다.
“혹시 날 위해서 그런 거야?”
이런 사정을 모르는 프랭크 토마스는 친구에게 농담을 걸었다.
토마스는 이인영이 빠지는 날 우익수로 출전하는 백업 선수, 모난 곳 없는 수비와 타격 덕분에 이런저런 포지션을 소화하며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안배해 줬다.
오늘 친구가 빠졌다면 토마스는 수준 급 투수를 상대해야했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착각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에효~ 그러니까 네가 발전을 못하는 거야.”
“뭐라고?”
“수준급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때릴 줄 알아야 진짜 스타가 되는 거지. 너처럼 타율 올리기 좋은 투수만 골라 상대하면 매일 제자리걸음이다.”
쉬운 문제만 100문제 풀어봤자 뭐 하나,
진짜 어려운 문제를 풀 줄 아는 학생이 실전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법, 이런 말을 지껄이는 친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야, 바꿔. 오늘은 내가 나갈 거야.”
“뭐?”
“내가 나간다고,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토마스는 친구에게 자리 바꾸기를 요구했다.
오늘은 내가 나갈 테니 너는 내일 나가라는 것, 하지만 빌 제임스에게 볼 일이 있는 이인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B급 투수한테 안타 쳐봤자 내 기록에 흠집이 날 뿐이라고”
“너는 시즌 내내 잘 했잖아. 한 경기 쉬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
“됐거든? 오늘은 내가 나갈 거야.”
“내가 나간다니까.”
주위에 있는 선수들은 이 말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에이스급 투수는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하는데 저것들은 반대로 행동하고 있으니, 한동안 이어진 기싸움의 승자는 프랭크 토마스였다.
“나도 일류 선수 좀 돼 보자.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 좋아. 일단 지켜보겠어.”
이인영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양보해줬다.
살리는 건 본인의 몫, 그렇게 간만에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프랭크 토마스, 올 시즌 타율 0.266, 홈런 7개, 38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오늘은 벤치에 앉았네요. 뭐… 포스트 시즌을 대비한 체력 안배로 이해해야겠죠.”
박한우 위원은 명단에서 빠진 양아들의 이름에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현재 양아들은 타율 0.361, 홈런 37개, 126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타율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남은 경기에서 홈런 3개 채우고 아시아 최초 40홈런 타자가 되는 것도 좋았을 텐데,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만 더해졌다.
따악~!!
그런데 이날 우익수로 선발 출장한 프랭크 토마스는 4타수 3안타, 2타점 게임을 펼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활약,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은 토마스 앞에 마이크를 내밀었다.
“간만의 선발 출장이었는데 제임스를 상대로 좋은 활약을 하셨군요. 오늘 컨디션이 좋았던 겁니까?”
“컨디션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친구의 자극이 도움이 됐습니다.”
“자극이라고요?”
“예, 사실 오늘은 리(Lee)가 선발 출장할 예정이었습니다. 저는 내일 쉬운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칠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쉬운 투수를 상대해 봤자 네 성장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말이죠. 그게 정말 큰 자극이 됐습니다.”
토마스는 이인영의 독특한 리더십을 선전했다.
어려운 투수가 나왔을 때 동료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선발 출장을 강행하는 선수는 있다. 하지만 이인영은 정 반대, 얼핏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결국 동료들을 위하는 리더십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도 갖춘 선수, 토마스는 친구를 MVP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로 치켜세웠다.
[도망친 게 아니었네]
[이런 것도 능력이다]
내막을 알게 된 팬들은 태세를 전환했다.
타율 관리를 위해 라인업에서 빠진 줄 알았는데, 그런 뒷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이인영을 도망자로 욕하던 일부 팬들은 입을 다물었다.
* * *
‘그냥 끝내버리자.’
이곳은 필라델피아 구단 사무실, 주주들은 연장계약 논의를 두고 토론을 이어갔다.
날이 갈수록 가치가 치솟고 있는 이인영, 시즌이 끝나기 전에 연장계약을 맺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연장계약을 논하는 건 너무 이르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4년까지는 지켜보시죠.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 사이 선수 가치가 떨어지면 저희들만 손해입니다.”
물건을 살 때 그게 값이 뛸지 떨어질지 예측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결정권은 소비자의 몫,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대형계약을 맺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지켜볼 것인가.
일단 지금 분위기면 최소 6~ 7년 계약에 2억 달러는 보장해 줘야 한다. 기존에 있던 계약과 합치면 12년 2억 5천만 달러가 되는 것, 실현된다면 구단 역사를 새로 쓰게 된다.
이 선수에게 이만한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주주들의 고민이 고민하는 사이, 이인영은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무력시위를 이어갔다.
[따악~!!]
“우익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들어옵니다!! 이인영 선수의 희생 플라이로 필라델피아가 추가점을 올리는군요.”
“이렇게 되면 130타점 돌파죠. 134경기에서 기록한 수확입니다.”
162경기를 기준으로 해도 130타점은 엄청난 기록, 그런데 이인영은 단축 시즌에 이런 기록을 세워버렸다.
필라델피아에서 단일 시즌 130타점 기록이 나온 건 무려 21년 만의 일, 풀 시즌이었다면 어떤 기록이 나왔을까.
슈퍼스타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좌중간으로!! 높게!! 계속 뻗어 나가는 타구!! 담자~~ 앙!!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만루 홈런!! 오늘 경기 7타점 째입니다!!”
“신시내티가 아주 아낌없이 주고 있네요. 기왕 주는 거 140타점 안 될까요?”
6회도 안 끝났는데 벌써 7타점 경기, 승패는 이미 기울었지만 와이즈 감독은 라인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연장계약을 두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 구단 관계자, 감독 입장에선 저런 선수가 팀에 한 명 있어야 경기하기 수월하다.
얼른 잡을 것이지 뭘 망설이고 있나, 무력시위를 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9회 초, 필라델피아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이인영은 1사 주자 1 - 2루에서 6번째 타석을 맞이했다.
만루 홈런 포함 7타점(3안타) 맹활약, 충분히 받아가 놓고 무슨 욕심을 더 내는 건가.
신시내티 배터리는 고의사구를 가장한 볼넷을 택했고, 이렇게 이인영의 2년차 메이저리그 도전기는 막을 내렸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63 - 홈런 38개 - 137타점, 겨우 135게임을 치르며 이런 결과를 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대활약, 경기가 끝난 후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시즌을 마무리한 소감을 밝혔다.
“뭐… 재미있는 시즌이었습니다. 단축 시즌에 부상도 있었고… 이런 저런 악재가 겹쳤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이뤄낸 결과라 만족합니다.”
“구단 내부에서 연장계약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글쎄요. 저는 에이전트로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논의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포스트 시즌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선수가 침묵을 지키자 기자들은 상상과 추측을 덧붙인 기사를 쏟아냈다.
12년 2억 5천만 달러부터 3억 달러까지 내용은 천차만별, 신속한 계약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