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MVP (5)
따악~!!
계속되는 필라델피아의 공세, 2회 초 공격에서 필라델피아는 하위 타선의 안타, 볼넷으로 무사 주자 1 - 2루 기회를 잡았다.
타석에는 투수 존 카바노프, 사인을 받은 카바노프는 대놓고 번트 자세를 잡았다.
‘이건 내가 잡는다.’
워싱턴의 3루수 윌리 캠벨은 적극적으로 수비에 개입했다.
맨 손으로 공을 잡는 순간 캠벨의 시선은 이미 2루로 향하고 있었고 보폭을 길게 가져가면서 2루 송구를 마쳤다.
공을 넘겨받은 2루수가 1루에 송구를 하면서 병살 플레이, 이렇게 2사 주자 3루가 되고 말았다.
“아!! 이건 아니잖아!!”
이 광경을 지켜본 이인영은 누구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윌리 캠벨이 좋은 수비로 2루 송구를 한 건 분명하다.
문제는 존 카바노프의 주루 플레이, 아니나 다를까 박한우 위원은 카바노프의 실책을 지적했다.
“장면을 잠시 돌려보죠. 이 상황에서 3루수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번트 타구가 약했다면 3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야 했고, 타구가 강했다면 본인이 처리를 해야 했죠. 그런데 지금은 애매한 타구였고, 투수가 공을 잡았다면 병살 플레이가 불가능했겠죠. 여기서 캠벨 선수가 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3루수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잡아야 병살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바로 수비를 들어왔어요.”
“그럼 어디서 문제가 된 겁니까?”
“바로 이 장면이죠. 카바노프 선수는 이 타구를 3루수가 잡을 거라곤 예상을 못한 겁니다. 투수 앞 땅볼로 생각했던 거죠. 캠벨 선수가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낸 건 잘한 거지만, 병살을 만들어 준 건 카바노프 선수의 어정쩡한 주루플레이입니다.”
“이건 아니죠. 투수라도 뛰어야 합니다. 이게 포스트시즌이었다면 엄청난 사건이에요.”
카바노프는 멍한 얼굴로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민망한 플레이, 스스로 엎은 밥상이라 화도 못 내고 멍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후속타자 세스 브런들이 범타로 물러나면서 황금 같은 기회는 증발, 기분이 상한 이인영은 굳은 얼굴로 외야로 향했다.
‘나라고 언제나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MVP급 활약을 할 수 있지만 매일, 매 타석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못해주면 그 빈자리를 동료들이 채워줘야 하는데, 동료들이 파놓은 구멍을 내가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가끔가다 얼빠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들, 이런 정신상태로 포스트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수 있을까. 이기지 못하는 팀에서 MVP가 돼 봤자 별로 기쁘지 않았다.
“자, 이제 워싱턴의 2회 말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윌리 캠벨, 올 시즌 타율 0.284, 홈런 24개, 81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선 이닝에서 아주 깔끔한 수비를 보여줬죠. 그 정도 집중력이라면 타석에서도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캠벨은 초구를 골라냈다.
원래 초구는 잘 안 치는 스타일, 하지만 2구를 밀어 쳐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뛰어야 돼!! 뛰어야 돼!! 뛰어야 돼!!’
잠시 머뭇거리던 캠벨은 미친 듯이 1루로 질주했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우익수, 어깨가 워낙 강한 선수라 느긋하게 타구를 감상할 시간도 없었다.
필라델피아의 1루수 오스틴 카터도 후속플레이에 대비, 날아오는 대포알 송구를 캐치했다.
“세이프!!”
간발의 차로 갈린 운명, 캠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이인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안타치고 이렇게 열심히 뛴 건 처음일 거야.”
그 사이 캠벨은 카터에게 농담을 걸었다.
안타가 될 타구를 날리고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캠벨도 타구에 대한 집착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저 선수의 독기는 인정했다.
‘나만 민망해지네.’
한편, 캠벨의 질주와 이인영의 송구를 지켜본 카바노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번트 치고 산책하던 나와 너무 비교되는 플레이,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느꼈다.
실수를 만회해야하는데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1대 1 동점, 다음 이닝에서는 쓰리 런 홈런을 맞고 침몰해 버렸다.
선취점을 낸 초반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 갑작스런 전개에 필라델피아 선수단은 당황했다.
[딱~!!]
“아, 다시 안타가 나오는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이제 5대 1이 됩니다.”
“이게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얼마나 아쉽습니까. 카바노프 선수가 그때 전력 질주만 해줬다면 1사 주자 1 - 3루에서 상위타선 아닙니까. 승부는 한 순간의 방심으로 결정되거든요. 이런 플레이로는 포스트 시즌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초반에 벌어진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경기를 내줬다.
대세에 큰 지장은 없는 패배지만 모두가 아쉬움을 삼킨 경기, 라커룸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는다.’
피터 와이즈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라커룸에서 어느 선수를 공개적으로 칭찬하고나 비판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게 와이즈 감독의 철학,
반면 어떤 감독은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선수의 자존심을 자극해 실전에서 성과를 내도록 유도하는 것, 하지만 잘못하면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뭣보다 감독에게 권위가 있어야 가능한 일, 지휘봉을 잡은 지 4년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선수들 앞에서 한 선수를 다그칠 수 있겠나.
감독에게 권위가 없다면 다른 선수의 권위를 빌리는 것도 방법, 그날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을 호텔 방으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냥 이것저것 얘기할 게 있네.”
와이즈 감독은 평소 즐겨듣는 차분한 음악을 틀고 분위기를 잡았지만, 거칠고 신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이인영은 선곡에 의문을 표했다.
“죄송한데 음악 좀 끄면 안 될 까요?”
“왜? 마음에 안 드나?”
“네, 저희가 은밀한 대화를 속삭일 사이는 아니잖아요?”
신혼여행에서 부부가 분위기 잡을 때 트는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민망해진 와이즈 감독은 서둘러 음악을 꺼버렸다.
“오늘 경기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네. 자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야.”
“뭐…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자네가 팀 분위기를 다잡아줄 수 있겠나?”
“그런 건 감독님이 하셔야죠. 그리고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 두 사람의 목표는 같았지만 방법을 두고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카바노프가 어정쩡한 주루플레이를 했을 때 이인영은 확실히 불만을 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 카바노프를 앞에 두고 충고를 하거나 대화를 할 레벨은 아니다.
이제 2년차 밖에 안 된 선수가 라커룸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실력 있는 선수일 뿐, 감독에게 빌려줄 권위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건 별개의 영역이죠.”
“뭐… 그건 그렇긴 하네만… ”
“감독의 권위가 업적에서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발언에 정당성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도 권위가 실리겠죠. 내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감독님 자신 아닙니까?”
이인영은 감독이라는 지위 자체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다.
10번 우승을 한 감독은 선수단을 지휘할 자격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감독은 선수에게 듣기 싫은 말 한 마디 못하나?
권력이란 조직의 동의와 정당함에서 나오는 것, 필라델피아 구단은 왜 와이즈 감독을 4년 동안 감독 자리에 뒀을까.
프런트가 부리기 쉬운 꼭두각시라서? 그렇게 생각하면 감독은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와이즈 감독이 4년 동안 걸어온 길, 본인이 정한 권위 안에서만 감독의 역할을 수행해 온 거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을 때 타인의 권위를 빌리고자 하는 것, 이인영은 와이즈 감독에게 당신의 권위는 스스로 정하라는 일침을 날렸다.
“오늘 누가 봐도 카바노프는 욕먹을 짓 했습니다. 감독님이 한 마디 했다면 그 자식은 아무 말 못했을 거예요. 그 말에는 정당성이 있으니까요. 반발하면 본인이 형편없는 선수라는 걸 증명할 뿐이고요.”
“뭐…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솔직히 피곤하네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이인영은 감독 방에서 퇴장, 와이즈 감독은 이날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내가 그동안 스스로 정한 권위 안에 갇혀 있었다니,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누가 지적을 해주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생각하는 감독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마음을 정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 * *
“야, 너 왜 그러냐? 좀 웃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된 하루, 세스 브런들은 아침부터 음침한 기운을 뿜어내는 친구를 건드렸다.
필라델피아는 어제 패배했지만 지구 라이벌 뉴욕 퀸스도 패배하면서 4경기 차 우위를 점하고 있다.
거기다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내야지 계속 우중충한 분위기를 뿜어내면 주위 사람들도 불편할 뿐, 하지만 이인영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난 패배한 다음 날 웃으면서 출근한 적 없어.”
프로라면 패배 그 자체에 불쾌함을 느껴야 하는 법,
거기다 필라델피아는 1964년, 지구 1위를 달리다 마지막에 10연패를 당하며 지구 1위를 내준 치욕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깟 4경기 차가 웃으면서 넘어갈 일인가. 이인영은 패배하고 웃을 수 네 정신상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다들 잠깐 모여 보게.”
마침 클럽하우스에 출근한 와이즈 감독, 감독의 호출을 받은 선수단은 하나 둘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네. 우리는 지금까지 무수한 패배를 겪었고 올해 드디어 포스트 시즌 진출 기회를 잡았어. 지나간 일은 따지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다들 사소한 플레이도 신경써줬으면 좋겠어. 자네들도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거야.”
선수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무게를 잡는 건 와이즈 감독과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분위기를 잡는 건가. 어쨌든 지은 죄가 있는 카바노프는 말없이 감독의 말을 경청했다.
“어제 경기는 제가 잘못해서 진 겁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자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지금 난 자네를 콕 집어 얘기한 게 아니야. 다들 집중해서 남은 경기 잘 해보자고 하는 뜻으로 한 말이네. 그 이상 그 이하의 뜻도 없어.”
제 발 저린 카바노프는 감독의 일침에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자기주장이 확실한 사람이었나, 하루아침 사이에 너무 달라진 분위기, 그제야 선수들도 감독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 챘다.
한동안 자유분방하게 돌아갔던 필라델피아의 클럽하우스, 이날부터 소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땅볼 하나에도 전력을 다하는 선수들, 투수라도 예외는 없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이인영 선수의 안타!! 오늘도 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6경기에서 24타수 13안타, 타율이 0.542나 되거든요. 역시 날씨가 선선해지면 뜨거워지는 선수입니다.”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필라델피아, 그 중심에는 이인영이 있었다.
일주일 동안 28타수 15안타(타율 0.535) 2홈런, 11타점을 올리며 이 주의 선수에 선정, 시즌 성적도 타율 0.361 - 36홈런 - 124타점으로 끌어올렸다.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기는커녕 무섭게 치고 나가는 야생마
마이클 헤인스를 MVP 후보로 여겼던 LA 지역기자들도 이인영의 독주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