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MVP (3)
[필라델피아 시즌 첫 8연승]
[지구 2위 뉴욕 퀸스와 맞붙는다]
어느덧 8월에 접어든 시즌,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잠시 흔들렸던 필라델피아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48승 36패로 NL 중부지구 1위 질주,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같은 지구 라이벌이자 앙숙인 뉴욕 퀸스와 맞붙게 됐다.
6월 21일 이후 23승 9패로 호조를 보이고 있는 퀸스, 현재 2.5경기 차로 필라델피아를 뒤쫓고 있다.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은 양 팀, 얼마 전엔 사인 훔치기 의혹을 두고 날 선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필리스의 코치 미키 마이어가 불펜에서 사인을 훔치는 장면을 봤다.]
공방전은 익명을 요구한 팬의 증언에서 시작됐다.
2회 말, 필리스의 수비 때 마이어 코치가 상대 포수의 움직임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는 것, 그리고 마이어 코치가 좌익수 세스 브런들에게 사인을 주는 장면이 포착됐다.
뉴욕 퀸스 팬들은 필라델피아가 사인 훔치기로 연승행진을 달리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 물론 필라델피아는 격하게 반발했다.
“당시는 우리가 수비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포수의 사인을 훔쳐보는 게 무슨 의미가 다는 건가? 의혹을 제기하고 싶다면 좀 그럴 듯하게 꾸며내길 바란다.”
피터 와이즈 감독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세상에 어느 바보가 자기 팀 포수의 사인을 훔쳐본단 말인가. 그제야 기자는 당시 상황이 2회 초였다고 수정했지만, 제보의 신빙성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 사무국이 조사에 나서긴 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심판들에게 수상한 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별 일 없이 넘어갔지만 문제를 제기한 기자가 뉴욕 퀸스 기사를 전문 담당하는 FCN 소속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필라델피아 팬들은 발끈했다.
우리가 잘 나가는 게 그냥 싫다는 거 아닌가.
뉴욕 홈구장을 붉은 빛으로 물들여 주겠다며 대규모 원정을 예고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오늘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 돼.”
경기를 앞두고 피터 와이즈 감독은 선수들에게 투지 있는 플레이를 요구했다.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는 퀸스, 여기서 한 번 콧대를 꺾어놔야 시즌 경쟁도 유리해지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이 경기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뭔가를 의식할수록 안 풀리는 게임, 평소처럼 몸을 풀며 경기를 준비했다.
“내가 요즘 못 치고 있는 건 다 심판 때문이라니까.”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으로 해주면 안 되겠냐?”
세스 브런들은 친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불만을 쏟아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타율 0.310, 15홈런으로 잘 나갔는데 후반기 접어들면서 타율은 0.296로 떨어졌다.
최근 12경기에서 홈런이 없다는 것도 문제, 그렇다고 감독이 하위 타순으로 좌천 시킨 것도 아니다.
시즌을 치르다보면 경기가 안 풀리는 때도 있는 법, 지난 경기에서 볼 카운트를 두고 심판과 언쟁을 벌이더니 왜 날 물고 늘어지는 건가.
이인영은 말이 많은 친구 입을 봉쇄했다.
“그리고 넌 심판한테 구걸하고 싶냐?”
“뭐? 구걸?”
“그래, 우리가 심판한테 구걸할 입장은 아니잖아. 그 인간들이 유리한테 판정을 해줄 거란 기대하지 마. 구걸해서 1루로 걸어 나가는 게 네가 할 일은 아니잖아?”
브런들은 입을 다물었다.
볼을 많이 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최근 볼 카운트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가지 못하면서 사소한 판정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게 사실,
구걸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쓴 건 조금 너무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뭐라 따지고 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 * *
“자,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합니다. 선두 타자는 세스 브런들, 올 시즌 타율 0.296, 홈런 15개, 4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10경기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죠. 특히 삼진 9개를 당하는 동안 볼넷은 한개도 얻어내지 못했는데, 조금 더 신증하고 정확한 타격을 해 줘야 합니다.”
1회 초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시작한 경기,
예고대로 3루 석을 점령한 메뚜기 군단은 'Suck Queens'를 연호했다. 이에 질세라 홈팀들도 오렌지색 응원 티셔츠를 입고 응원막대를 치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 1회부터 팽팽한 응원전이 이어졌다.
‘그래, 구걸 따윈 안 한다.’
브런들은 보란 듯이 초구를 받아쳐 중견수 키를 넘어가는 장타를 뽑아냈다. 홈팬들의 입을 틀어막는 선제 3루타, 후속 타자 산체스가 연속 안타를 뽑아내면서 필라델피아가 선취점을 냈다.
“자, 이제 이인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52, 홈런 22개, 76타점. 홈런은 내셔널리그 2위, 타점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인영 선수가 통산 퀸스 상대로 4할, 홈런도 2개가 있거든요. 강한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에 기대를 해봐도 좋습니다.”
뉴욕 퀸스의 선발 폴 워너는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1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작년에 당한 치욕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4대 2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4회 초 마운드에 오른 폴 워너, 이인영에게 초구 체인지업을 통타당하면서 4대 4 동점을 내줬다.
이후 퀸스는 대량 득점을 내며 7회까지 7대 4로 앞서나갔지만, 7회 말 이인영이 다시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턱 밑까지 추격을 허용, 결국 산체스에게 결승타를 얻어맞고 역전패했다.
철벽 마무리 제임스 베가까지 내보냈는데 당한 뼈아픈 패배, 그날 이후 퀸스는 연패를 당하며 순위권 싸움에서 멀어졌다.
이번 경기는 지구 1위가 걸린 싸움, 선취점을 내줬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초구, 볼입니다. 역시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군요.”
“이인영 선수가 올 시즌 달라진 게 좌투수 상대 홈런이 6개 됩니다. 작년 시즌 홈런 32개를 쳐냈지만 좌투수 상대로 뽑아낸 홈런은 5개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올 시즌은 벌써 6개에요.”
“뭐가 달라진 건가요?”
“제가 볼 때 기술적 변화는 없습니다. 마음가짐의 변화라고 해야겠죠.”
작년 시즌, 이인영은 좌투수 상대로 컨택 위주의 타격을 했다.
하지만 그게 투수들에게 위협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접근법을 바꿨고, 올 시즌 좌완 상대 OPS는 0.914까지 올라왔다.
좌투상대 출루율은 작년에 비해 4푼이나 떨어졌지만 (0.411 -> 0.372), 장타율은 0.481에서 0.542으로 상승, 장타가 많아진 것도 많은 타점을 올리고 있는 비결로 작용하고 있다.
투수 입장에선 볼넷을 얻어내는 타자보다 안타를 치는 타자가 무섭고, 안타보다 장타를 치는 타자가 무서운 법,
폴 워너가 쉽게 카운트를 잡지 못한 건 당연했다.
“스트라이크!!”
“어이!! 그게 스트라이크라고?!!”
“눈이 나쁘면 안경을 끼라고!!”
2구는 바깥쪽 꽉 차는 공, 필라델피아 더그아웃에서 불만이 쏟아졌지만 이인영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다음 공을 기다렸다.
일류타자가 체면이 있지 심판에게 구걸을 해야겠나, 보란 듯이 3구를 잡아당겼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말하지 않아도!! 시청자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우중간을 넘어가는 시즌 23홈런!! 이인영 선수가 팀을 정상(頂上)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시즌 78타점 째!! 스코어 3대 0!! 사인의혹 논란을 실력으로 해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프로는 말보다 실력으로 증명을 해야 하는 법이죠!!”
1회부터 휘몰아치는 타선, 원정 팬들은 유유히 베이스를 돌아 홈에 입성한 영웅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사인 훔치기 논란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이인영의 성적을 바라보는 팬들도 있는 게 사실,
거기에 일일이 맞대응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피터 와이즈 감독도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작년에 타율 0.366, 32홈런, 104타점을 올린 선수,
백인이 30홈런 100타점을 치면 당연한 거고, 동양인이 30홈런 100타점을 올리면 이유를 붙이고 따지고 들어야 하나.
이인영은 작년에 이미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사인 훔치기 논란과 저 선수의 성적을 엮는 건 실례되는 일, 이인영이 홈런을 치고 활약하는 건 이제 필라델피아의 일상이 됐다.
소란을 피우는 것도 이상한 일, 와이즈 감독은 당연한 일이라며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따아악~!!]
“자!! 이 타구는!! 다시 한 번!! 우측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인영 선수의 연타석 홈런!! 뉴욕 퀸스를 완전히 침몰 시킵니다!!”
“확인사살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역시 퀸스 상대로 강점이 있어요!!”
그렇게 경기는 흘러 7회 초, 7대 2로 앞서나가던 필라델피아는 이인영의 쓰리 런 홈런으로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
혼자서 팀 득점의 절반을 책임지는 활약, 승리를 확신한 와이즈 감독은 주전들을 대거 교체했다.
‘이거 왜 이래?’
그런데 7회 말부터 경기는 묘하게 진행됐다.
불펜진이 2사 주자 만루에서 싹쓸이 적시타를 허용하며 스코어는 10대 5, 필라델피아는 8회 말에도 선두타자 제레미 쿤닝햄이 안타로 출루하며 위기에 몰렸다.
“자, 여기서 투수가 다시 교체되는 군요. 존 루이스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퀸스가 최근 32경기에서 23승을 거둘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 와이즈 감독이 샴페인을 조금 일찍 터트린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 그래도 다음 이닝은 이인영 선수부터 공격이 시작되거든요. 여기서 막으면 추가점을 올릴 기회가 올 겁니다.”
타석에 서기 전 제임스 토마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못해도 2점은 내야 9회 말 반격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 필라델피아는 중견수 잉글리시아를 내야로 돌려 압박을 가하고 있다.
타자 입장에선 타구를 외야로 보내야 하는 입장, 마침 약간 높게 들어온 공을 우측으로 밀어냈다.
“Infield fly if fair!!”
타구를 따라온 이인영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귀를 세웠다.
타구가 파울라인 안 쪽으로 떨어지면 인필드 플라이, 파울라인을 벗어나면 공을 잡아야지 아웃이 되는 상황
파울 볼이 되면 주심의 인필드 플라이 선언은 무효가 된다.
1루 주자를 견제하려면 타구를 잡는 게 좋겠지, 이인영은 끝까지 타구를 추격해 파울라인 밖에서 공을 잡아냈다.
‘지금 뭐 하냐?’
2루로 뛰는 제레미 쿤닝햄, 이인영은 바로 1루로 송구했다.
캐치가 된 순간 타자 주자 제임스 토마스는 이미 아웃, 1루 주자의 본 헤드 플레이까지 겹치면서 순식간에 투 아웃이 적립됐다.
엇갈린 양 팀의 희비, 홈팬들의 야유와 원정 팬의 환호성의 뒤섞이면서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이건 말도 안 된 다고!!”
뉴욕 퀸스의 감독 에스터반 팜은 더그아웃에서 튀어나와 심판진과 격론을 벌였다.
인필드 플라이 상황이 나오면 심판진이 모든 선수들이 알아듣도록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우익수는 인필드 플라이 선언에 반응을 했다.
우익수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는데 1루 주자 제레미 쿤닝햄은 왜 2루로 뛴 건가.
그건 본인의 잘못, 주심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물리쳤지만 에스터반 감독은 계속 항의를 이어가다 퇴장 당했다.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은 논란, 왜 주심은 그 순간 인필드 이프 플라이 페어를 선언한 건가. 따지기 좋아하는 뉴욕 여론은 이번에도 의혹을 제기했고, 이인영은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뉴욕은 심판에게 유리한 판정을 구걸해야 이길 수 있는 겁니까? 판정 구걸이나 하는 수준이라면 올 시즌도 포스트 시즌 진출은 어렵겠군요.”
가슴을 후벼 파는 비난에 뉴욕 팬들은 발끈,
하지만 앞선 경기에서 멀티 홈런 포함 5타점을 올린 선수 앞에서 발끈해 봤자 초라해지는 건 본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