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MVP (2)
후속타자가 아웃되면서 애리조나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필라델피아도 9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타자 퀼튼 바네스는 땅볼 아웃됐지만 투수 타석에 대타 투입된 리차드 잉글리시아가 볼넷을 얻어내면서 1사 주자 1루, 여기서 세스 브런들이 우중간으로 경쾌한 타구를 보냈다.
[따악~!!]
“자!! 이 타구는!! 우익수가 원 바운드로 잡아냅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에 안착합니다!! 오늘 브런들은 3안타 게임!! 자신이 왜 올스타인지 보여주는 경기입니다!!”
“지금은 잉글리시아 선수가 판단을 잘 했네요. 여기서 주춤거렸으면 3루까지 못 갔을 겁니다.”
애리조나의 우익수 랄프 햄은 몸을 날리려다 움찔했다.
잡으면 좋지만 타구가 빠지면 그대로 경기 종료 아닌가.
안전하게 원 바운드로 처리하려 했지만 그 심리를 읽은 잉글리시아는 빠르게 스타트를 끊었다.
과감함과 무모함은 종이 한 장 차이, 끝내기 기회를 잡은 필라델피아는 벤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승부 난다.’
산체스 다음은 이인영, 애리조나가 누굴 제물로 삼을지 뻔하지 않나. 피터 와이즈 감독은 산체스에게 초구 타격을 주문했다.
애리조나의 척 핀리 감독도 외야수 2명을 내야로 끌어오는 극단적인 시프트로 맞불을 놓으면서 분위기는 고조됐다.
“초구는 볼입니다. 들어가질 못하는군요.”
“지금은 카운트를 잡았어야 했는데, 타자가 초구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투수도 알거든요. 과감한 투구가 필요했는데 프로라도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야구가 어려운 거예요.”
애리조나의 로버트 존슨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초구가 볼이 됐을 때 피안타가 나올 확률은 0.275, 반면 초구를 잡았을 때 타율은 0.233로 떨어진다.
그런데 그 초구를 타자가 쳐냈을 때 타율은 0.331, 웃기지 않은가.
초구 스트라이크는 투수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데, 그 공을 타자가 때릴 경우 타자가 유리하다니, 이게 바로 야구의 묘미다.
‘아직이다. 기회는 있어.’
불리한 상황이지만 로버트 존슨은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교환했다.
그리고 바깥쪽 빠른 볼로 파울을 유도,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통계학자들은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던진 공에 따라 타율과 장타율의 차이가 극명히 갈린다는 걸 알아냈다.
■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타격 : 타율 0.302 장타율 0.501
■ 투 볼 원 스트라이크 타격 : 타율 0.354 장타율 0.568
■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타격 : 타율 0.162 장타율 0.233
볼 하나에 따라 이렇게 타율과 장타율이 차이가 난다.
단순한 숫자놀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년의 통계가 누적된 데이터, 코치진은 통계를 바탕으로 배터리의 볼 배합에 간섭한다.
투수 입장에선 반드시 카운트를 잡아야 하는 상황, 애리조나와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필라델피아 벤치도 긴장된 얼굴로 산체스의 타격을 지켜봤다.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산체스 선수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애리조나는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죠. 이인영 선수 차례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궁지에 몰린 로버트 존슨은 승부를 택했다.
산체스도 응해주면서 배트를 휘둘렀고, 팬들의 시선은 높게 뜬 타구에 집중됐다.
뜨긴 했는데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타구, 격분한 산체스는 배트를 집어던졌다.
통계가 언제나 맞진 않는다는 걸 증명한 상황, 한숨 돌린 애리조나는 여기서 다시 투수를 교체했다.
“자, 여기서 로렌스 맥니시 선수가 올라오는데요. 투수를 교체했다는 건 승부를 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엔 다음 타자 오스틴 카터를 겨냥한 교체입니다. 카터 선수가 좌완에 약점이 있거든요. 마침 이인영 선수도 좌타자니까, 밑져야 본전이거든요. 유인구로 유혹하고 안 나오면 거르겠다 이거겠죠.”
애리조나의 핀리 감독은 내야로 돌린 외야수를 원위치로 돌려보냈다.
이 상황에선 무리하게 스윙을 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인영은 허리를 바짝 숙이며 공을 밀어냈다.
몸을 날려 타구를 잡은 건 3루수 에릭 먼시,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2아웃에서 포스 플레이 상황에 놓인 주자가 아웃되기 전에,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 점수가 인정될까?
1루 주자 세스 브런들은 무조건 2루로 뛰어야 하는 상황, 포스 아웃 상황이라 3루 주자가 홈을 밟은 뒤 아웃이 되도 득점은 인정되지 않는다.
2루로 송구해 주자를 잡아내면 이닝 종료, 에릭 먼시는 1루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2루를 택했다.
“맙소사!!”
하지만 송구는 2루수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높게 날아갔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 인, 한 순간의 실책으로 희비가 갈리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한덩이로 뭉쳐 승리를 만끽, 반면 대역죄를 저지른 에릭 먼시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어쨌거나 이인영의 배트에서 끝난 경기, 기자들은 그 상황에서 왜 무리한 타격을 했는지 물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2아웃이었고 주자들은 무조건 뛰어야 했죠. 제가 3루 쪽으로 느린 땅볼을 굴려주면 3루수는 2루로 송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이밍을 봤을 때 홈으로 뛰는 3루 주자는 잡기 어려우니, 2루에서 포스 아웃을 시켜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로날드 윌슨은 2루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커버를 들어오면서 송구를 받아내야 했죠. 에릭 먼시도 그런 상황에선 강한 송구를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송구를 하더라도 실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다 생각하고 타격을 했단 말입니까?”
“당연하죠.”
시간을 약간 되돌려보면 이인영은 타격을 하기 전, 2루수 로날드 윌슨이 우측으로 쏠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개략적인 상황을 계산, 3루 쪽으로 땅볼을 굴리는 걸 택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계산을 다 해냈다는 건가. 농담이든 진담이든 어쨌든 이인영의 배트가 경기를 끝낸 건 분명했다.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글쎄요.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 선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런 상황까지 계산하고 타격을 했다면… 하하~ 글쎄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마이크를 넘겨받은 피터 와이즈 감독은 나름대로 입장을 밝혔다.
솔직히 그런 것까지 다 계산하고 타격을 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타자가 해야 할 건 어디까지나 안타를 날리는 것, 상황에 맞는 타격은 아시아 야구에서 통하는 개념이다.
“상황에 맞게 플라이를 치고 땅볼을 때려? 누가 그래?”
메이저리그에서 통용되는 팀 배팅은 안타와 장타를 날리는 거다.
무사 만루에서 스퀴즈? 안타를 치면 되는데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나. 한 마디로 쓸데없는 짓, 그런데 한국에서 온 선수는 내가 팀 배팅을 한 덕분에 팀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데 그럴듯하게 시나리오를 꾸민 건 아닌지,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유후~ 휴~!!”
“오늘도 넌 최고였어!!”
경기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선수 전용 주차장 앞에 진을 팬들은 오늘의 영웅에게 환호를 보냈다.
이인영은 별 말없이 손을 들어 답할 뿐, 이때 한 소년이 애절한 목소리를 높였다.
“올스타전에서는 홈런 쳐줘요!! 저는 그 날도 아빠랑 같이 올 거예요!!”
누군가 했더니 오늘 열심히 응원을 해준 그 녀석, 차에 오르던 이인영인 가던 길을 멈추고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처음 야구장을 찾은 소년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내가 홈런 못 친 게 서운하니?”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배트 플립을 못 본 게 아쉬워요.”
예상외의 답에 슈퍼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 배트 플립이 소년의 로망이 될 정도로 멋있었던가? 이때 옆에 있던 아버지가 한 몫 거들었다.
“이 녀석은 TV에서 당신이 홈런 치는 장면을 봤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배트 던지는 연습만 하고 있죠.”
“오 그래요? 그럼 제법 잘 던지겠네?”
“그렇지도 않아요. 엄마한테 배트 던진다고 엄청 혼났거든요.”
“혹시 엄마가 투수 출신이니?”
허를 찌르는 농담에 소년은 낄낄 거렸고, 기세를 잡은 이인영은 잡담을 이어갔다.
“그런데 배트는 치고 던지라고 있는 거야. 아무 것도 못 치고 던지면 폼이 안 나는 법이지.”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던지지 마라. 공을 친 다음에 던지라고”
“그럼 저도 나중에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을까요?”
소년은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나도 이 선수처럼 홈런을 치고 멋지게 배트를 날릴 수 있을까. 인생의 선배는 나름대로 답을 줬다.
“뭐든 도전해 봐. 도전하지 않고 포기해 버리면 후회만 남으니까.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살겠니? 하고 싶은 거 해.”
“으음~ 알았어요. 한 번 해 볼게요.”
“그래, 올스타전에서도 보자.”
“아는 척 해 줄 거예요?”
“그래, 그날도 네 목소리가 들린다면 말이지.”
슈퍼스타는 깰 수 없는 약속을 남기고 퇴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열린 올스타전,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을 찾은 소년은 있는 힘껏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 여기 있어요!! 여기에 있다고요!!”
외야석이라 들릴 리가 없는 상황, 하지만 경기 전날 소년의 아버지에게 정보를 입수한 이인영은 소년이 앉은 곳을 향해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평소 홈런을 노리고 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팬 서비스를 확실히 해줘야겠지, 첫 타석부터 의욕을 드러냈다.
“자!! 이인영 선수가 통산 2번 째 메이저리그 올스타 게임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57, 홈런 19개, 64타점!! 여전히 아름다운 비율스탯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동양 선수가 올스타전에 2년 연속 선발 출장한 건 이인영 선수가 처음입니다. 한국 야구를 넘어 아시아의 자랑이죠.”
초구는 볼, 요즘 왜 이렇게 볼만 들어오나.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팀 포수, 조지 웰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이봐, 나 오늘 홈런 하나 쳐야 돼.”
“그렇게 올스타 MVP 되고 싶어?”
“그게 아니라 꼬맹이한테 약속한 게 있어, 스트라이크 하나만 줘 봐.”
“오해하지 마. 여기서 볼질 할 녀석 아무도 없다고”
정규경기도 아니고 여기서 도망칠 선수가 어디 있나. 조지 웰스는 다음 공은 쳐 보라며 미트를 벌렸다.
따아악~!!
“와아아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외야로 뻗어나가는 타구, 이인영은 평소보다 더 화끈한 배트 플립을 선보였다.
한참을 날아가 아메리칸 리그 더그아웃 근처에 떨어진 배트, 하지만 오늘은 누구도 발끈하지 않았다.
“진짜 멋있다!!”
이 장면을 지켜 본 소년 팬은 흥분했다.
어떻게 저렇게 배트를 잘 날릴 수 있는 건가. 사실 배트가 아니라 공을 더 잘 날리는 선수, 나도 저런 슈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면 후회만 남는 법, 미래의 메이저리거가 될 소년의 꿈은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