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MVP (1)
[독립의 성지, 필라델피아에서 올스타전 열린다]
7월에 접어든 시즌, 필라델피아 일대는 축제준비로 떠들썩해졌다.
1976년 이후 무려 51년 만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메이저리그 올스타 전, 출장이 확정된 이인영은 기자들 앞에서 2년 연속 올스타로 선정된 소감을 밝혔다.
“솔직히 저는 어렸을 때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을 보고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선수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스프링캠프처럼 편안하게 경기를 했죠. 당시 저는 이 시시한 놀이 같은 축제가 하루 빨리 끝나고 피 튀기는 후반기기 시작되길 기다렸습니다.”
“올스타전이 너무 시시했다 이겁니까?”
“예, 메이저리가 되는 꿈을 키우는 어린 팬들도 이번 올스타전을 지켜보겠죠? 그 친구들에게 야구는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줄 생각입니다.”
또 뭘 어쩌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어쨌든 올 시즌 유독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 필라델피아 팬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여기 있는 거 다하면 됩니까?”
“네, 손 좀 아프시겠군요.”
올스타전을 일주일 앞두고, 이인영은 수많은 야구공과 유니폼을 전달 받았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함부로 사인을 할 수 없다. 반드시 사무국에서 인정한 유니폼이나 야구공에만 사인을 해야 하고, 팬들도 그 규칙을 알고 있다.
유니폼이 많이 팔렸다는 건 그만큼 내 일거리가 늘어났다는 뜻, 특히 올스타전 기간에는 올스타 출전 선수의 유니폼이나 관련 상품 판매량이 급증한다.
이인영은 이번이 2번 째 올스타 출전, 이런 전개는 예상했지만 이번이 첫 올스타 출전인 세스 브런들은 산더미 같은 야구공과 유니폼을 보고 경악했다.
“아니 이걸 언제 다하라는 거야?”
“어차피 해야 되는 거니까 인상 구기지 말고 해. 올스타전 당일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사인을 하게 될 거야.”
“맙소사 … ”
브런들은 친구의 조언에 당황했다.
올스타에 뽑히면 구름처럼 몰려온 관중들 앞에서 멋지게 차려잡고 폼이나 잡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뒷사정이 있었다니, 하지만 만년 유망주 딱지를 떼고 치르는 첫 올스타전이라 불평보다는 흥분과 떨림이 앞섰다.
“어린 시절 생각난다.”
“어린 시절?”
“응, 내가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을 처음 찾았던 게 올스타전이거든”
묵묵히 사인을 하던 브런들은 추억에 잠겼다.
벌써 17년이나 지난 일, 워낙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의 일부가 지워지거나 미화됐지만 그 코흘리개가 올스타 무대에 서게 될 줄이야.
자신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들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냐?”
“당연하지, 내가 야구를 처음 접한 날이었는데.”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 올스타전 보고 흥분한 적 없어. 기억에 남는 장면도 없고”
하지만 이인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축제처럼 하는 올스타전보다는 진짜 승리를 위해 몸을 부딪치는 실전이 더 기억에 남지 않나?
어린 팬들에겐 그런 장면이 더 강렬하게 남는 법, 그래서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
어린 팬에게 진짜 야구를 보여주는 게 프로의 역할, 며칠 후 열릴 올스타전보다 오늘 열릴 경기에 더 열정을 쏟았다.
* * *
“자, 이제 필라델피아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세스 브런들, 올 시즌 타율 0.306, 홈런 13개, 32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호가 대단하네요. 올 시즌 올스타전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만큼 팬들의 관심도 뜨겁습니다.”
애리조나와 필라델피아의 올 시즌 2번째 맞대결, 브런들은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축제 같은 올스타전보다는 전쟁 같은 정규경기가 어린 팬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니, 지금 내 타격을 보고 메이저리거 꿈을 키우는 팬들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언제나 치르던 타석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따아악~!!
2구 타격, 홈런을 예감한 브런들은 배트를 던지고 게걸음으로 1루로 향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펜스 상단을 때리고 나온 타구, 브런들은 서둘러 2루에 안착했지만 그 얼굴엔 민망한 미소가 번졌다.
2번 타자 산체스의 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선취점은 필라델피아의 몫, 또 다른 올스타의 등장에 관중석은 더욱 달아올랐다.
“자, 이인영 선수가 오늘 경기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올 시즌 타율 0.358, 홈런 18개, 57타점, 겨우 54경기에서 거둔 성적입니다.”
“만약은 없지만, 지금 이 성적을 162경기 체제로 환산하면 54홈런, 171타점이라는 아찔한 성적이 나오거든요. 이런 위대한 시즌을 부상과 천재지변으로 망친 게 너무 아쉽습니다.”
박한우 위원은 거듭 아쉬움을 표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200안타, 50홈런, 170타점을 한 시즌에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지금 이 선수는 얼마나 대단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건가.
파크 팩터가 반영된 OPS+를 따져보면 이인영은 217을 기록하고 있다. 리그 평균 수준의 타자가 100인데 그 2배가 넘는 활약을 하고 있는 뜻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기준으로 OPS+가 200을 넘은 선수는 역대 3명뿐이다.
말 그대로 역사에 기록될 시즌, 이런 배경을 반영하듯 관중석에서는 존경의 뜻이 담긴 환호가 터져 나왔다.
"MVP!! MVP!!"
2년차 징크스가 웬 말인가.
작년 시즌 리그 MVP 3위는 저 선수에겐 1위 등극을 위한 발판이었을 뿐, 홈 팬들은 올 시즌 MVP는 네 차지라는 응원을 보냈다.
[Your back number is 2., but you're going to be number one with us]
= 당신의 등번호는 2번이지만, 우리와 함께 넘버원이 될 거예요.
한 소년 팬은 이런 문구가 적은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이인영은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면 등번호 2번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소년은 저 선수가 필라델피아를 1위로 올려 줄 거라 굳게 믿었다.
어렵게 직관을 왔으니 홈런 하나 보여주면 땡큐, 하지만 마운드 위의 투수는 승부를 걸어주지 않았다.
“스트라이크를 던져!! 던지란 말이야!! 이 바보야!!”
결국 볼넷으로 걸어 나가는 마음속의 우상, 속이 상한 소년은 아버지 옆에서 불만을 중얼거렸다. ‘
“괜찮아. 이런 때는 넌 머저리라고 욕해주면 되는 거야.”
“정말요?”
“그래, 너도 따라 해봐, 이 멍청아!! 우우~ 우~!!!”
오늘도 열일 다하는 필라델피아 극성팬들, 약이 잔뜩 오른 소년 팬도 아버지를 따라 야유에 동참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경기, 필라델피아는 5회까지 4대 1 리드를 유지했지만 선발투수 잭 콜비스가 무너지고 불펜이 추가 실점을 하면서 6회 초에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6대 5).
풀이 죽은 관중석,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6회 말 공격에서 연속안타와 볼넷을 엮어 1사 주자 만루 기회를 만들었다.
“자, 이제 타석에는 산체스가 들어섭니다. 오늘 3타수 1안타, 첫 타석에 팀의 선취점을 올리는 적시타를 때려냈습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말도 있는데, 마침 다음이 이인영 선수 타석이거든요. 애리조나는 분명 여기서 끊겠다는 생각일 텐데, 신중해야 합니다.”
초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빠른 볼을 노리고 있던 산체스는 헛스윙을 돌렸다.
어설픈 땅볼보다는 헛스윙이 나은 상황, 팬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고 3루 코치 사인을 확인한 산체스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체인지업은 미끼, 이번에야 말로 빠른 볼 아닐까. 예상은 들어맞았다.
“아!! 왜 이러냐?!!”
좋은 타이밍에 나갔지만 약간 빗맞으면서 너무 떠버린 타구, 하지만 3루 주자 퀼튼 바메스가 홈을 밟으면서 동점이 됐다.
어찌어찌 2타점을 올린 경기, 산체스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닥쳐라 아가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모든 말은 마음속으로 하렴~
내가 화나면 누군가가 다칠지도 몰라~ “
한숨을 돌렸지만 애리조나 벤치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옥의 악마와 마주할 시간, 오늘 애리조나는 볼넷 두 개와 2루 땅볼로 이인영을 잘 봉쇄했다.
하지만 언제 뭐가 터져 나올지 모른다는 게 문제, 2사에 주자 1 - 2루에서 굳이 승부를 해야 하나.
애리조나 감독 척 핀리는 다시 볼넷을 지시했다. 오늘만 볼넷 3개, 극성팬들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우우~ 우~ ”
“너희들은 내 아들의 로망을 망치고 있다고!! 다 죽어버려!!“
소년 팬의 아버지는 특히 과격한 반응을 보였다.
시간 내서 큰마음 먹고 아들을 야구장에 데려왔는데 이 따위 경기를 하다니, 이런 게 야구라면 어느 소년이 야구를 하겠는가.
너희들은 비겁할 뿐만 아니라 어린 팬들의 로망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맞아!! 나는 저 선수가 홈런 치는 걸 보러 왔다고!! 홈런이나 맞고 꺼져버려!!”
아버지를 따라 점점 과격해지는 소년 팬, 주위 팬들의 야유에 묻혔지만 소년 팬은 야유가 잦아든 후에도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어린놈이 성깔 한번 더럽네.’
그제야 이인영은 문제의 팬을 알아챘다.
자기 일도 아닌데 쓸데없이 핏대를 올리는 녀석, 그것보다 나는 저 녀석의 열정에 부응하고 있는 건가.
볼넷만 3개를 골랐지 이렇다 할 활약이 없는 하루, 뭔가 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어느 덧 9회 초, 7대 7 팽팽한 상황에서 애리조나의 공격이 시작됐다.
선두타자 로날드 윌슨은 볼넷으로 출루,
필라델피아의 피터 와이즈 감독은 수비 위치를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타석에 들어선 새미 크라운이 우타자라 시프트를 쓴 것, 하지만 이인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중견수와 좌익수가 포위망을 좁혔는데 나까지 거기에 끼어들 필요 없지 않은가.
나까지 좌측으로 치우치면 상대 타자에게 필드를 넓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줄 뿐, 코치가 다시 사인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따악~!!]
“자!! 우측으로 멀리 날아가는 타구!! 우익수!! 우익수가!! 깊숙한 곳에서 잡아냅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로!! 2루에서~!! 아웃입니다!!!! 아웃!!!! 이인영 선수가 주자 2명을 지워냅니다!!!!”
“이야~ 저기에서 다이렉트 2루 송구가 가능한가요?!! 윌슨은 지금 펄쩍 뛰고 있습니다!!”
2루심의 아웃 판정에 윌슨은 믿을 수 없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장면, 애리조나 벤치에서 챌린지를 요청하는 동안 이인영은 소년 팬에게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오늘 하루 종일 날 응원해줬으니 이 정도 서비스는 베풀어야겠지, 별 거 아니지만 소년은 흥분했다.
“아빠!! 지금 나한테 한 거 맞죠?!!”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아버지는 아들의 장단에 맞춰줬다.
솔직히 저게 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들이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그 사이 챌린지 결과가 나왔고 원심이 인정되면서 주자들은 사라졌다.
“멋지네!! 멋져!!”
한 선수의 판단이 팀을 살린 순간, 피터 와이즈 감독은 박수를 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웠다.
내가 지시한대로 수비 위치를 옮겼다면 대재앙이 벌어졌을 텐데, 이런 항명이라면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