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shit happen (5)
[이인영, 22게임에서 25타점]
[단축된 시즌이 원망스럽다]
개막 후 어느덧 한 달이 지난 시즌, 필라델피아는 13승 9패를 거두며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1위를 질주했다.
승리를 이끄는 건 모든 선수들의 책임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인영의 활약은 독보적, 22경기에서 타율 0.357, 홈런 8개, 25타점을 올리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미국을 덮친 바이러스성 독감 때문에 138경기로 치러지는 이번 시즌에 대입해 보면 무려 50홈런 - 156타점 페이스, 출루율 0.457, 장타율은 무려 0.717을 찍고 있다.
이런 페이스가 시즌 내내 계속되진 않겠지만, 어쨌든 많은 팬들은 단축 시즌만 아니었다면 역대급 성적을 찍었을 거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허먼 데이비스의 1946년 기록 넘어설 지도]
필라델피아 여론은 벌써부터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1946년, 필라델피아의 전설적인 3루수 허먼 데이비스가 단일 시즌에 타율 0.342, 52홈런, 154타점을 기록한 적이 있다.
홈런과 타점 모두 필라델피아 신기록, 한국에서 넘어온 젊은 선수가 이 대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지만 이인영은 평소와 달리 담백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요. 사람을 넘어선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자들은 모두 타석에서 안타나 홈런을 치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걸 막아서는 장애물이 한 둘은 아니죠. 일단 투수가 던지는 공을 쳐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죠.”
땅볼이 되면 내야수들은 공을 잡기 위해 몸을 날리고, 플라이가 되면 외야수들은 타구를 추격한다.
모두가 내 성공을 막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데 언제나 달콤함만 말 볼 수 있을까. 이인영은 성공이란 사람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사람들은 누구든 성공하고 싶어 하죠. 그리고 그건 곧 누군가를 밟고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제가 신경 써야 할 상대는 50홈런, 150타점, 이런 숫자가 아닙니다. 내일 붙을 상대팀 그리고 경쟁자들과 싸워 어떻게 이길지 그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숫자를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것,
여론의 주목을 받는 와중에도 자신이 갈 길만 집중하는 태도에 팬들은 경외심을 표했다.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
“그냥 그러네요.”
경기를 앞두고 피터 와이즈 감독은 주축 선수의 몸 상태를 살폈다.
최근 와이즈 감독은 이인영을 3번 자리로 옮겼다.
워낙 타점 생산능력이 좋은 선수라 2번에 배치하기는 아깝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인영은 감독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했다.
30홈런 100타점이 강타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절도 있었지만, 다 의미 없는 기록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지난 2007년, 시카고의 해롤드 뱅크스가 타율 0.297 - 28홈런 - 150타점이라는 해괴망측한 기록을 세웠다.
30홈런 미만으로 150타점을 넘긴 선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헤롤드 뱅크스가 2번 째, 그 정도로 희귀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렇다면 뱅크스는 득점권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유독 잘 쳤던 걸까.
그저 테이블 세터진이 양질의 밥상을 차려줬을 뿐, 다음 시즌은 타율 0.272 - 26홈런 - 87타점으로 쪼그라들었다.
내가 22경기에서 25타점을 올릴 수 있었던 건 능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동료들이 기회를 만들어 줬을 뿐, 그렇게 높게 평가받을 능력도 아니다.
이인영이 원하는 건 많은 타점이 아니라 안타, 지금이라도 2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는 타점보다 안타를 더 많이 치고 싶어요.”
“지금도 굳이 잘 하고 있는데 굳이 바꿀 이유는 없지 않나.”
“요즘 볼넷이 많아져서 그래요. 걸어 나가는 건 제 성격에 안 맞아요.”
테이블 세터진의 활약이 계속되자 요즘 투수들은 득점권에서 이인영을 볼넷으로 거르고 있다.
아름다운 비율 스탯을 찍으면 뭣 하나. 정말 타자에게 중요한 건 출루가 아니라 안타를 때려내는 것, 하지만 중심타선의 부진 때문에 자기 고집만 부릴 수도 없었다.
오스틴 카터는 작년 시즌 3번에서 22홈런을 쳤지만 타율이 0.252에 불과했고 출루율은 3할을 겨우 넘겼다(0.307).
그래도 90타점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이인영이 밥상을 차려준 덕분, 그런데 올 시즌은 그것도 안 되고 있다.
홈런 4개를 때려냈지만 타율은 겨우 0.221, 정확도가 망조에 접어들었다.
작년 시즌 타율 0.251, 홈런 14개를 쳐 준 박혁은 2년 900만 달러에 볼티모어와 계약, 이 정도면 연장계약을 맺을 만도 한데, 필라델피아는 미련 없이 박혁을 내보냈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볼티모어에 내줬어야 했을까.
필라델피아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이인영은 이 상승세가 언제까지 계속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봐 친구”
“왜?”
“만약 우리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면 배당금은 얼마나 받을까?”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스 브런들은 친구의 귀에 헛소리를 늘어놨다.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 배당금은 1억 달러를 돌파했다. 평균관중이 약간 줄어든 악조건에서 이뤄낸 쾌거, 정확한 정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선수들이 받은 배당금도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과 인연이 없는 필라델피아와는 인연이 없는 배당금, 이인영은 그딴 소리는 9월에 떠들어도 늦지 않다며 무시했다.
“야, 그래도 상상은 해 볼 수 있잖아.”
“배당금 받을 생각하지 말고, 네 형편없는 연봉이나 올릴 생각해."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냐?”
“뭐가 심해? 배당금 받는 게 이득이야? 연봉 올리는 게 이득이야? 말 해봐. 그 잘생긴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세스 브런들은 필라델피아의 만년 유망주,
작년 시즌도 타율 0.241, 홈런 16개로 정말 애매한 시즌을 보냈다.
올 시즌은 그나마 타율 0.292, 홈런 5개, 10타점으로 2번에서 괜찮은 활약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이라 이인영은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알았어. 어쨌든 내 얼굴이 잘 생겼다는 뜻이지?”
“됐다… 됐어.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나도 미친놈이지만 이 자식은 답이 없는 수준, 슈퍼스타는 이후 바보가 어떤 말을 하든 철저히 외면했다.
* * *
“자, 1회 초 원정 팀 필라델피아의 선공으로 경기기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조시 빌라, 올 시즌 타율 0.327, 홈런 2개, 8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가장 불가사의한 게 조시 빌라 선수의 타율이죠. 작년 시즌 2할 5푼을 겨우 넘겼는데 올 시즌은 완전 다른 선수가 됐습니다.”
“어쨌든 테이블 세터진이 출루를 많이 하면서 이인영 선수가 타점을 올릴 기회가 많아진 건 좋은 일입니다. 거품이다 뭐다 해도, 어쨌든 타점이 많으면 보기 좋거든요.”
시카고와 필라델피아의 시즌 첫 번째 경기,
박한우 위원은 오늘도 필라델피아 타선에 기대를 걸었다. 예상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는 테이블 세터, 그 기대에 부응하듯 조시 빌라는 2구를 받아쳐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그래, 사람을 넘어선다는 건 힘든 일이지.’
조시 빌라는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갈 때까지 방심하지 않고 전력 질주 했다.
어느 녀석의 말대로 성공이란 사람을 넘어서는 과정,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동안 야구를 그렇게 간절하게 생각했을까.
작년 시즌 극적으로 부활했지만 2년 동안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조시 빌라는 내외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이젠 이겨냈고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 할 뿐, 노장 선수의 투혼은 젊은 선수들에게도 많은 자극이 됐다.
‘어? 다리가 아프다.’
감상도 잠시, 후속 타자 세스 브런들이 2구를 받아쳤다.
조시 빌라는 2루로 뛰었는데 허벅지가 뻐근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2년 전 날 지독히도 괴롭혔던 그 부상, 설마 또?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노장의 야망은 무너져 내렸다.
“아~ 빌라 선수가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데요.”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가 허벅지 쪽이거든요. 또 햄스트링인 것 같습니다.”
“한 번 다치면 계속 다치는 부위에요. 영 좋지 않은 부위에 말썽이 일어났네요.”
대주자로 교체된 조시 빌라는 코치의 부축을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물러났다.
한때 한국 선수는 메이저리그의 수준을 떨어트린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미우나 고우나 지금은 동료,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그 초라한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래도 먹을 건 먹어야지.’
어쨌든 노 아웃에 주자 1 - 2루 상황, 테이블 세터진이 차려준 밥상은 감사히 받아들였다.
초구는 바깥쪽 빠른 볼, 원하는 공이 아니라 보냈고 차분히 2구를 기다렸다.
“공이 튀었고!! 아!! 여기서 3루로 들어가지만!! 아웃입니다!! 대주자 프랭크 애치슨이 3루에서 저격당하는 군요!!”
“아!! 이건 아니죠!! 왜 여기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겁니까?!!”
2루 주자 애치슨의 진루에 박한우 위원은 격노했다.
지금 타석에는 이인영, 좌타자다.
우타자가 들어섰다면 포수가 송구에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니고, 무사 주자 1 - 2루에서 굳이 3루로 뛰었어야 했을까.
기본을 무시한 플레이에 공격의 맥이 끊겨버렸다.
하지만 이인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투수와 승부를 이어갔고,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배터리는 미련 없이 볼넷을 택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필라델피아의 피터 와이즈 감독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매번 경기가 잘 풀릴 순 없지만 오늘은 첫 단추부터 꼬여버린 느낌, 테이블 세터가 죽어버리자 중심타선도 힘을 못 쓰는 상황이 반복됐다.
앗 하는 사이 3회까지 흘러간 경기, 필라델피아는 3안타를 기록했지만 1회 초 조시 빌라와 세스 브런들의 안타 외엔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나는 다치면 안 된다. 절대로’
대기 타석에 들어선 이인영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근육에 감당할 수 없는 운동량이 걸리면 일어난다.
조시 빌라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던 선수가 분수에 맞지 않은 무리를 하다 일어난 일, 나는 절대 다쳐선 안 되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너도 성공하고 싶겠지만 나도 이것저것 많이 짊어지고 있다고’
타석에 서기 전, 투수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자식은 지금 날 삼진으로 때려눕히고 싶겠지, 그 건방진 생각을 쳐 날려주겠다는 생각으로 배트를 돌렸다.
[딱~!!]
“1루 땅볼!! 투수가 달려옵니다!! 타자 주자도 같은 방향으로!! 1루!! 1루에서~!! 발이 빨랐다는 판정입니다!! 이인영 선수의 내야안타!! 집념으로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지금은 크리스 선수가 주자와의 충돌을 의식한 것 같네요. 이인영 선수가 한 눈에 봐도 굉장한 기세로 뛰어들었거든요.”
“지켜보는 입장에선 흠칫흠칫 하네요. 제발 부상만 안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인호 위원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타구로 투수를 저격한 사건도 있고 야구를 너무 전투적으로 하는 아들, 개인 성적도 중요하겠지만 지켜보는 부모 입장에선 다치지만 않기를 바랐다.